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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 평안, 변화

LNCK 2011. 7. 11. 22:32

 

◈탄식, 평안, 변화           시68:19         11.06.25.설교스크랩, 출처, 축약

 

 

◑찬송가에 탄식시가 많다.

 

개인적으로 나는 찬송을 부르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찬송 중에, 마치 렘브란트적인 명암의 대조처럼

‘평안과 걱정’을 노래하는 찬송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꽤 놀랐다.          

 

다음 찬송을 음미해보자.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하시고, 사랑하시고, 건져주시니 나 곧 평안이 쉬리로다.(486장)

 

이것은 곤고하고 근심, 걱정 많은 삶에 평안이 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찬송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또 다른 찬송은 이렇게 탄식한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그리고 이어서 피난처는 우리 예수, 우리 주께 맡기세. 라고 권고한다(369장).

 

이 또한 세상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이야기다.

 

시편의 한 시인도 “날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시는 여호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시68:19)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니,

그도 어깨를 짓누르는 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영적 짐들과 정신적 짐들과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들이,

또한 생계에 대한 재정적 부담들과 가정적 짐들이,

더 나아가 교회적⋅사회적⋅국가적 짐들이,

그리고 각종 관계들로부터 오는 무거운 짐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만성 두통거리들이다.

주름살의 골만큼이나 걱정과 근심의 골 역시 깊어만 간다.

과연 이 가운데서 우리가 평안을 노래할 수 있을까?

 

위에서 잠시 말한 바와 같이

찬송가의 상당 부분이 탄식조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못 놀란다.

 

더 예를 들면,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시편의 상당 부분이 탄식시라는 것을 알면 다시금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질병, 고통, 소외, 죽음과 같은 비극적 일에 직면할 때 탄식한다.

아니, 그런 일을 만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두려워한다.

 

역시 찬송가 가사인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가 삶 속에서 후렴처럼 반복된다.

 

 

◑탄식 속에서 찬송하기란 쉽지 않지만..

 

주님이 주시는 탄식은.. 거기에 평안도 동시에 주신다. 

그래서 탄식의 한숨 가운데서도.. '내 영혼 평안해'를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늘의 평안을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찬송 413장의 고백이다.

내가 이 찬송을 좋아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한 신앙고백이 그 찬송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글 번역에는 정확하게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1절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들어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슬픔이 큰 풍파처럼 소용돌이 쳐 밀어닥치든지

하늘이 내게 준 삶의 몫이 어떠하든지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후렴) 평안해. 평안해, 내 영혼아!

 

When peace like a river attendeth my way,

When sorrows, like sea billows roll,

Whatever my lot, Thou hast taught me to say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절규하는 여인이든,

혹은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축 처진 어깨를 추스를 수조차 없어

 

내일 아침 햇살 보기를 거절하는 중년의 남자이든,

혹은 십 대 자녀의 탈선과 방황으로 수많은 밤을 애타게 보내는 부모이든 간에,

이 찬송의 후렴을 확신 있게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안다.

 

누가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이 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한글 번역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문 찬송가에는 그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1절 ↖)

    Thou has taught me to say!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가 말하는 뜻은 이것이다.

내가 너를 붙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나는 그 가르침에 의지하여 이제 확신 있게 내 스스로에게

“괜찮아. 괜찮아, 내영혼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한 작사자에게는 그럴만한 애달프고도 깊은 사연이 있었다.

 

그는 호레시오 게이츠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다. 시카고의 변호사였다.

부지런히 일하여 그곳에서 많은 재산을 쌓았다.

그러나 1871년 시카고에 대(大)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시카고 시의 복원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가난한 사람,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그들의 재활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해에 그는, 급성 전염성 피부 질환인 성홍열로  *(scarlet fever, 猩紅熱)

첫아들(1남 4녀 중)을 잃게 된다.

 

첫아들과 재산을 잃은 호레시오는 2년 후인 1873년 추운 겨울 11월에

아내와 남은 네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는 시카고에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겨

아내와 네 딸만 먼저 보내고 나중에 합류하기로 한다.

 

그녀들은 대형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간다.

그러나 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한 전보 한 장이 날아왔다.

아내 애나에게서 온 전보였다.

여객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대형 화물선과 충돌하여 바다에 침몰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대형 사고로 딸 넷은 모두 죽었고 자기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애나의 전보에는 이렇게 단 두 마디만 적혀있었다. “Saved Alone.”(혼자 살았음.)

 

사고가 난 지 한 달 후 그와 아내는 다시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간다.

항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지금 1개월 전에 사고가 난 바로 그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날 밤 호레시오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과 재앙들,

잃어버린 다섯 어린 자녀들 생각에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음 속 깊은 곳 그 어디선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확신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내 영혼 평안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런 고백이 입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강한 기도였다.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영혼아, 괜찮아. 괜찮아.”

 

이 부부는 3년 뒤인 1876년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도 4살이 되어 죽는다.

2년 후인 1878년에 그들은 벌사(Bertha)라고 이름을 지은, 또 다른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호레시오와 그의 아내 애나는 모두 6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

라고 노래하였다. 얼마나 눈물겹고 장엄한 간증인지!

 

1876년에 블리스(P. P. Bliss)는 이 구절에 곡을 붙였으며,

그 후로 전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애창하는 찬송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경건한 할머니는 딸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이 찬송을 꼭 불러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나머지 절들을 직접 번역하여 싣자면 이렇다.

 

사탄이 우리를 삼킨다 해도, 수많은 고난이 닥친다 해도

우리에겐 흔들리지 않는 복된 확신이 있도다.

'내가 애쓴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Though Satan may buffet, though trials may come,

Let this blessed assurance control,

That Christ has regarded my helpless estate,

And has shed His own blood for my soul.

 

오, 내 죄여, 아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생각인가!

내 모든 죄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나 더 이상 짊어지지 않으리!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My sin, oh the bliss of this glorious thought,

My sin, not in part, but the whole,

Is nailed to the cross, and I bear it no more.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h my soul.

 

주님, 주님 오시는 날 급히 이를 때,

구름이 두루마리처럼 공중에서 말려나갈 때

트럼펫 소리 울리며 주님 강림하실 때,

‘그때에도’ - 내 영혼 평안해!

 

And Lord, haste the day when he faith shall e sight,

The clouds be rolled back as a scroll,

The trump shall resound, and the Lord shall descend,

Even so, it is well with my soul.

 

 

◑구약의 ‘샬롬’의 뜻

 

▲1. 개인적 평안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 치고 걱정, 근심 없이 평안하게 살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또한 족장들의 가족인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라헬, 요셉. 또한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들인 갈렙,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걱정, 근심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그들의 개인적 삶과 그들이 속한 나라와 민족의 삶을 엮어간다.

 

그러므로 평안과 걱정은 언제나 짝꿍 단어다.

평안할 때도 걱정스럽고 걱정스러울 때도 평안하다.

삶이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온전한 평안과 온전한 걱정이 있을 수 없다.

 

▲2. 사회적, 공동체적 평안

우리가 평안이나 근심, 걱정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개인적⋅가족적 차원에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개인적⋅가정적인 평안을 넘어 사회적⋅국가적 평안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평화)란,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념 간의 갈등도 없고 빈부의 차이도 적고

노력한 만큼 대가도 얻을 수 있는 공정한 사회,

서로를 배려하고 경제 상황도 좋고 천재지변도 없고,

이웃 나라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평안하다고 한다.

 

달리 말해, ‘평안’(well-being)이란 개념은

개인을 넘어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온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샬롬의 상태를 가리킨다.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다.

샬롬은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성(creational intention)에 맞추어 움직여갈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인간의 노력의 대가다.

 

이런 의미에서 ‘평안’을, 단순히 개인적/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신약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가 말하는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샬롬’이다.

 

원래 샬롬이란 용어는 ‘가득하다’, ‘풍성하다’, ‘넉넉하다’, ‘모자람이 없다’는 단어다.

보통 ‘평화’, ‘평안’으로 번역되지만 ‘번성’, ‘번영’으로도 번역된다.

 

영육 간에 건강할 때, 나라가 강성하고 번영할 때,

온 피조세계가 단순히 평온할 때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여된 신적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때,

오는 풍요와 번영과 즐거움을 히브리적으로 ‘샬롬’이라고 부른다.

 

이런 세계는 진정으로 자유로움을 누리는 곳이다.

자유는 숨 쉬는 호흡이며 마시는 공기다

 

 

◑탄식과 고난을 주시는 섭리 - 변화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평안만 주시면 좋을 터인데,

왜 자기 백성에게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종종 탄식, 한숨, 눈물을 주실까?

 

이유가 있다.

놀랍고 장엄한 그 무엇은 궁극적으로

오직 ‘힘든 길’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힘들고 고된 길에서만 발견되는 놀라운 그 무엇이 무엇일까?

변혁과 변화다.

 

변혁과 변형과 변화! 그 내면과 형태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미용적인 성형이 아니라, 본질적인 정형이다.

구조와 틀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정형적 변화다.

 

어디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가?

광야 길, 고단한 길, 힘든 길에서만 발견되는 놀라운 선물이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밝은 때에 노래와 어둘 때에 기도로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찬송 543장 1,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