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딤후1:7 출처보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1:7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아닌가?
세상에 자기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부모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다 사랑하시지만,
나는 별로 사랑하실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은 '믿음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한결 같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중에 하나일 터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든지, 아니면 마귀가 주는 마음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마귀가 주는 마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딤후1:7a
▲존재론적인 불안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는 문득문득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떨 때에는 아무 근거도 없이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와 같이 나의 존재 자체에 항상 따라붙는 불안을
‘존재론적 불안 ontological anxiety’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움 없는 사람은 딱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이지요.
그러므로 살아있고 제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바울이 말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소심함 timidity’, ‘비겁함 cowardice’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단지 그런 마음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전 앞에서도 두려워 떠는 연약한 자세나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작은 문제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소심하고 비겁한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런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두려움에 처했던 바울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금 더 설명해 봅니다.
본문 디모데후서 말씀은 로마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된 바울이
젊은 후배 동역자 디모데에게 준 권면의 말씀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순교의 각오를 다지던 바울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쓴 후, 얼마 후에 바울은 순교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가 당면하고 있었던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래도 믿음의 아버지요 영혼의 대스승이었던 바울의 투옥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크게 위축시켰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디모데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처럼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순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디모데에게
용기를 주고자 바울은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1:7
두려움이 엄습할 때는, 내가 위 딤후1:7절을 암송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능력, 사랑, 근신이 생길 때까지.. 암송하며,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 dynamis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능력(두나미스)은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폭약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것과 같은 폭발적인 힘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능력이라는 말을 쓸 때
이것은 항상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복음’의 능력,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죄와 사망의 사슬에 묶여있는 인류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은 무서워 떠는 겁쟁이 제자들을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는 분들은, 부활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믿으시고 성령충만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입니다. 담대함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사랑 agap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사라지면 이상하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오해하면 내 마음이 불편해질 뿐 아니라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4:18절을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조차도 십자가에 던질 만큼 큰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도 그런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요한일서4:18절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어떤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그에게 담대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통제(self-control)를 말하는 것이지요.
근신하고 신중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면 절제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두려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과식, 과음에 빠지기도 하고 도박과 향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절제하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다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담대해진 디모데
디모데는 아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회자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유럽에 교회가 최초로 세워졌을 때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와 그리스에 교회를 세웠으며,
데살로니가 교회, 에베소 교회,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첫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 바울 옆에 있었으며
그 후에는 그 당시 가장 큰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를 맡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역시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디모데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젊고 소심하고 두려움을 잘 타던 디모데가, 장렬한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일체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다.
딤후1:7절을 암송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맡기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담대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 ※비슷한 주제의 설교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
◈2. 근심하지 말라 요14:1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대강 요약/타이핑/정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자신이 가장 불안하신 시점에, 위로를 건네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남 걱정 하시는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곧 어떤 일이 닥칠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온 인류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00%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내일 닥칠 그 일 때문에, 아니 그날 깊은 밤부터 닥칠 그 일에,
정말 불안하며, 초조해야할 시간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속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실만큼 마26:28
주님은 지금 심란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시간에도 주님은,
자신 앞에 닥친 문제보다, 제자들의 불안과 걱정에 더 마음을 쓰셨습니다.
자신의 깊은 고민과 걱정은 접어둔 채, 불행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본문 요14:1
사실 주님이 당하실 고난과 고통이 100이라면,
제자들이 당할 고난과 고통(주님의 부재)은 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위로해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제자들이 당할 ‘작은 걱정’이 염려되어,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것이 주님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아시다시피 주님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손발에 잔인한 못질을 당한 후에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면서도
옆에서 같이 죽어 가는 강도에게 시간과 관심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서도,
함께 못 박힌 비참한 자를 돌아보실 만큼
주님의 긍휼, 사랑, 연민은.. 큰 것이었습니다.
▲적용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제 코가 석자라서, 남을 도울 엄두를 못 내겠다’고 다들 하소연합니다.
자기도 시간이 없어서 쩔쩔 매는데.. 어떻게 남을 위해 시간을 내느냐고 합니다.
자기 문제도 해결 못해서 사면초가인데.. 어떻게 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겠느냐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형제, 부모, 친척의 일도.. 낯선 이웃과 똑같습니다.
그들이 처한 어려운 일을 전혀 돌아보지 못합니다.
모두들 자기들의 무거운 짐을 메고, 허덕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자신의 큰 문제를 안고도,
이웃의 작은 문제를 돌아보고, 염려하신 주님의 긍휼.. 말입니다.
크리스천의 이웃 사랑은,
자기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었으니.. 타인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자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된 크리스천은,
제 코가 석자이더라도, 남의 문제를 돌아보고, 같이 위로해주고, 같이 염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자기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다 맡겼으므로.. 이것이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삶의 염려, 불안,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1. 회피 .. 아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덮어두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염려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되니.. 그냥 못 본체하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식은 ‘운명에 돌림’입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는 것입니다.
▲2. 심리학적으로 자기 마음을 컨트롤 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그 문제 자체(10%)보다, 그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이 90%를 차지합니다.
즉 울면 더 울고 싶고, 화내면 더 화내고 싶고, 걱정하면 더 걱정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자기 마음을 다스려,
그 ‘불안한 문제’만을 직시하지,
그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어떤 감정적 동요, 패닉 상태를
자기 스스로 조절하는 가운데.. 불안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영 터무니없는 방법은 아니나, 성경적인 근본적 해결은 아닙니다.
▲3. 동양신비종교에서 유행하는 방식인데,
‘신과의 합일’에 들어가면, 근심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믿습니다.
우주의 중심, 만물의 배후에 있는 영과 합일되면.. 그래서 명상/요가를 하지요.
자기들 나름대로 하는 기도 방식입니다.
그러나 ‘참 복음(예수)’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명상, 요가를 하고,
신과 합일(만약 되면 귀신이 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된다고 해서
‘참 행복’이 찾아오고, ‘평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샘물을 마셔야 하는데,
물은 비슷하게 물인데, 짠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위의 방식의 모든 공통점은 또 다른 방식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결국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는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염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을 얻는데요...
◑염려를 해결하는 성도의 방식
▲1.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지금 이 말씀의 정황은, ‘죽음을 앞둔 상황’입니다.
요13:1절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설교(강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가르치시자, 제자들이 근심합니다. 요14:1
그 근심은, 다름 아닌 <죽음과 그로인한 이별에 대한 근심>입니다.
사실, 죽음의 근심과 두려움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2:15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평생 거기에 종노릇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통해서, 반드시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자기도 함께 부활할 것을 믿으며, 이미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원초적 두려움(죽음)을 해결한 사람은,
여타 작은 두려움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 죽기를 각오한 사람에게.. 뭐가 더 두렵겠습니까?
▲2. 보혜사(위로자)를 보내주시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요14:18
그리고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합니다.
요14:1절과 14:16절, 18절을 연결해서 보십시오.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은 ‘곁에서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 안에 평안을 주시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특별히 본문의 정황을 보십시오.
보혜사는, 예수님 대신에 보내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재로 인한, 근심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예수님 대신에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평안이 없고, 대신에 근심이 많다면..
내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떨어져 있고,
또한 성령님을 멀리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 읽고, 부르짖어 기도해서.. 다시 그 떨어진 믿음을 회복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실제적 제안
미국과 한국의 많은 성도님들이
근심과 두려움에 처했을 때,
아래 찬송을 부르며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로 시작!
두려움을 이겨나갔다고 합니다.
영어를 쓰는 이유는, 한글 가사 번역이 좀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번역하다보면 어쩔 수 없겠지만..
chorus: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찬송듣기 http://blog.naver.com/kwonusa1991/1001320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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