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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할 수 없는 고난

LNCK 2011. 7. 25. 22:03

◈모방할 수 없는 고난               벧전2:21               11.04.17.    출처보기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예수님은 이 세상에 뭘(복음을, 말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기 보다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죽으시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길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늘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뜸하게 가르치는 주제이지만요..


‘잘 가르치는 지도자’도 훌륭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지만,

그 윗 단계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1. 성육신의 고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지우라고 말씀 한 마디만 하셔도, 이루어지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이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셔야 하셨을 가요?


예수님의 고난은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신비를 다른 데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선 성육신의 고난은 이 세상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2:5~14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고난은 최고의 고난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의 고난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상 깊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광야입니다. 온 대지에 눈이 쌓였습니다.

새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날아가도 날아가도 끝없는 광야였습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다가 결국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던 동물 애호가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새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 새들을 따라갔습니다.

모두 잡아서 차에 실고 가서 먹이가 있는 곳에 내려놓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는 줄 알고 도망치다가 눈 속에 쓰러집니다.

또 쫓아가면 또 도망갑니다. 그 사람은 새들에게 외쳤습니다.


‘얘들아! 도망가지 마!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을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야.

먹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으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외쳐도 새들은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쳐서 눈 위에 서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저 새들을 살리는 길이 하나 있다. 오직 하나의 길이다.

내가 새가 되어 새들에게 새의 언어로 새에게 말하면

새는 새의 언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성육신은 예수님 고난의 시작입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가 있고, 우리 인생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2. 삶의 고난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고난의 삶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 땅을 떠나실 때까지 온통 고난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눅1;28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계집종의 가문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나마 아버지 요셉이 일찍 돌아가셔서, 소년가장으로 집안을 꾸리셔야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탄하셨습니다.


길거리에서 태어나셔서, 길거리에서 사셨습니다. 길거리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 묻히셨습니다.

사람의 도리인, 최소한 자기 죽을 준비를 할 겨를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할 그리고 따라가야 할 부분이란 뜻입니다.



◑3. 멸시 천대의 고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사시는 것 자체도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멸시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멸시천대 하였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따라다녔습니다.

한 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전에 성막 세미나를 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대사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오자마자 초청된 것입니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환영하면서 내가 물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첫 날 밤을 지내시고 느끼신 것은 무엇입니까?’


대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저 나라 이스라엘 대사로 다니다가 한국에 왔습니다.

첫 날 밤 내 생애 처음으로 푹 잤습니다. 안심하고 잤습니다.’


아랍권에 가는 나라마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해칠 사람이 없어서 처음으로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한국은 참 좋은 나라이고 안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게 멸시천대를 받으시면서 사셨습니다.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사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높은 곳에서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던 자리에서 물러앉았습니다.


그 때 대통령으로 앉아 있을 때는 감히 말도 못 붙이던 말단 검사들이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다루었습니다. 자존심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멸시받는 다고 못 이기고 자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왕이 아닙니다. 왕중에 왕이 아닙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우주 통치자이십니다.


그 분이 멸시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고난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으시는 멸시,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를 생각하시면서,

‘그까짓 것’ 정도로 여기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4. 십자가 고난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 고난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1~2


십자가의 처형은 원래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죄수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방법입니다.

가장 비인간적이고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처형방법입니다.


십자가의 전체 무게는 대략 135 키로그램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횡목만 죄수로 하여금 나르게 하였습니다.

횡목만 하여도 34~57kg 정도였습니다.


십자가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 틀을 만들어 땅에 뉘어 놓습니다.

그리고 죄수를 십자가위에 눕힙니다.

양 팔을 십자가 횡목에 뻗게 한 다음 양 손에 못을 박습니다.

철못의 길이는 대략 13~18 cm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을 박는 것이 아니라 팔목에 박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웁니다.


숨을 쉴 때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벌레들이 땅에서 피냄새를 맡고 기어 올라와 눈이나 귀, 코로 들어가기도 하고

새들이 몰려와 살점을 뜯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처형하는 이들은 보통 칼이나 창으로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주로 1.5-1.8m 되는 창으로 가슴 심장을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출혈은 과다하여지고 혈압은 급격히 떨어져 쇼크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수의 가족들은 처형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밑에 있는 다리를 잘랐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옆에서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는

오랫동안 십자가에서 죽지 않자 다리를 잘라서 억지로 죽였습니다.

가장 극심한 고난이 장시간 괴롭힙니다. 생각만 하여도 처절한 죽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악과 죄값이, 그만큼 엄청나고 크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을 안고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짊어진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신비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가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쫓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허물은, 영어로는 trespass, transgression, fault로 번역되는 말인데,

 우리 말로는 '허물, 잘못, 침입, 위반, 실수'의 뜻입니다. '죄'이지만 좀 약한 개념의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대신 찔리셨습니다. 허물이 무엇입니까?

모르고 지은 죄를 허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허물은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지은 허물까지 다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죄를 지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큰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죄가 허물입니다.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또 어떤 분이 ‘과실’로 남에게 상해를 입힐 때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실수해서 자재를 떨어뜨렸는데, 아래서 어떤 사람이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런 것도 ‘허물’에 속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해를 입힌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여, 제 허물을 용서하여 주소서’


알게 지은 죄는 죄이고, 모르게 지은 죄는 허물입니다.

하나님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죄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내 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시골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부인은 늘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닭장에 암탉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글쎄 이게 웬일인가?

그 암탉이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이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이 닭은 족제비가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느라고

십자가 고통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는데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벧전2:24

여기서 ‘나음’(헬, 이아오마이)은

1)질병의 치료란 뜻이 있고

2)온전하게 (회복) 되었다.. 란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병을 짊어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8:17

예수님은 우리의 병도 짊어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우리 대신 맞으셨습니다.


덴마크의 윌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안과 의사였습니다.

눈병을 고치는 데에는 그를 따라 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안과계의 최고 전문의사였습니다.


윌리 의사는 캐서린 부스(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의 아내)의 전기를 읽고 감격하여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도 포기하고, 명예도 버렸습니다.

선교사로 십자가를 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습니다.

졸업 후 선교부로 가서 선교사로 파송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은가요?’

‘세계에서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으로 파송되었습니다.

그 곳은 눈병환자가 매우 많은 곳이었습니다.

인구의 5분의 1이 눈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큰 안과 병원을 설립하고 전도를 목적으로

토인들의 눈병을 치료하여 주면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30년 간을 봉사하고 노령으로 은퇴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여왕은 그에게 그 나라 최고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처럼 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간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윌리도 대신 병을 짊어지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닮은 삶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채찍 때문에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음을 믿고 나가면

수많은 고침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 성육신 고난

2. 삶의 고난

3. 멸시 천대의 고난

4. 십자가 고난


예수님의 고난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설교제목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당하신 고난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진정성과, 구세주의 신비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복음과 진리를 잘 가르치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말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삶을, 매일 자기가 살아내면서,

가르치다가.. 결국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남을 죽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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