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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허용된 길을 가는 신자들

LNCK 2011. 9. 8. 09:48

◈적당히 허용된 길을 가는 신자들       롬12:1~2, 시106:15        10.09.19.설교녹취

             

 

성도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perfect will of God  롬12:2 

자기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알찬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따라 사명자의 길을 가는 길도 아니고,

정반대로 완전히 죄악 중에 죄인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중간에 어중간하게 살 수 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삶’이다.


이런 삶을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아니지만 허용된 길’ 이라 이름 붙여 본다.

오늘날 어쩌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허용된 길’을 가고 있는데...



◑‘적당히 허용된 길’을 가는 사람


▲때로 하나님의 도우심도 있는 것 같고, 때로는 자기 기도도 응답 된다.

어떤 일이 외적으로 성취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안 될 때도 많지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적인 평강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감동, 자기 마음의 확신과 평강.. 이런 것은 없다.

그저 그렇게 ‘먹고 사는’ 것이다. 사실은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목적에 ‘만족감’도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도 없다.    이게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하면.. 없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그럴듯 한데, 크게 문제가 없는데,

내적으로는 왠지 평안함이 없고, 마음이 곤고하고 답답하다.


▲광야의 출애굽 백성들이 그랬다.


시106: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출애굽을 하기는 했는데,

광야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길을 가지 못했다.

불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먹고 사는 것에 염려가 많았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은 해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고,

응답도 어느 정도 받았는데...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자기 심령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확신이 없었고,

자기들이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 감격, 감동이 없고..

그들의 영혼은 파리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영혼이 파리한 사람들이다.

예수 믿는 흥분, 감격, 열정, 평강을 잃어버린 신자들이다.


이렇게 ‘파리해’ 지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온전한 뜻대로의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결정적 싸인이다.


이 때는 빨리 눈치를 채야 한다.

‘아, 내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아니라,      *롬12:2, perfect will of God

허용된 뜻 가운데 살고 있는 거구나!’

그리고 그 길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소중한 내 인생을 허비하면 안 되니까!


▲야곱이 처음에 ‘허용된 뜻’ 가운데 살았다.

야곱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본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처럼..

하나님의 기업(장자권)을 사모하고 받으려 애쓴 것.. 이런 열심이 있었다.

그런 것을 하찮케 여겼던 에서보다는 백 배 낫다.


그런데 그는 아직 ‘온전한 뜻’ 가운데 살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뜻(출생 예언)을 추구하면서도,

자기의 뜻과 방법과 수단을 거기에 섞어버렸다.

그래서 야곱은, 처음에 ‘하나님의 허용된 뜻’ 가운데 살았다는 것이다. ←설교 제목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이고,

그래서 장자권을 얻었는데.. 그 마음에 평강이 없었고,

오히려 도주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 열심으로 얻었다.

영적인 지혜도 일부 있으니까, 그런 것을 동원해서, 장인을 속이고

자기 재산을 늘리기도 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마음에 확신/평강/감격/성령의 열정은 아직 없었다고 본다.


그때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삶에 온전히 이루려는 삶이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자기 삶에, 자기 열심으로 온전히 이루려고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냥 그를 허용하신(내버려두신) 것이다.


얍복강 이전까지 야곱은,

하나님이 적당히 허용하시는 범위 가운데서 살았다.

그렇게 완전히 타락해서 죄인의 길을 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헌신해서 온전한 길을 간 것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많이 그렇게 하듯이

한 발은 하나님 뜻에 두지만,

한 발은 여전히 내 뜻, 내 이익, 내 야망, 세상에 둔 것이다.


이런 삶은.. 뭐가 약간 되기는 되는 것 같은데,

크게 망하지도 않는데..


자기 삶에 감사/성령의 열정/확신/평강이 없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작정하신 온전하신 뜻을 아직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 야곱은 ‘철저한 회개’를 체험했다.

‘네가 누구냐?’

‘예, 저는 야곱(속이는 자)입니다.’


야곱은 자기 내면을 직면했다.

그 전까지는, 야곱은 스스로 이렇게 자기만족을 했을 것이다.


‘나는 꽤 대단해, 출생 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을 받았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야.. (남달리 신령한 체험도 있었음)


나는 내가 소원하는 것은 다 이룰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야.

봐, 장자권도 얻었고, 아내도 원하는 사람을 얻었고,

빈손으로 외국에 가서, 이렇게 부유하게 재산도 모았어!

자녀들도 수두룩해. 나 같은 사람 있으면, 한 번 나와 봐!’


그런데 계속되는 환란의 삶 가운데서,

드디어 야곱은 그 자신의 강한 육의 겉껍질이 깨어지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면서


이제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알량한 능력을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사는 인생으로 변화된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환골탈태(완전히 변화) 한 것은,

무슨 신령한 체험을 했기 때문 보다는,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부터 야곱은,

‘이스라엘’(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최상의 삶)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분명히 이루어졌다.

그의 허리에서, 이스라엘 12지파가 나온 것이다.


▲‘허용된 뜻’ 가운데 사는 것은

마치 양말을 신고, 발을 씻는 것과 같다.


여러분, 양말을 신고 발을 씻으면.. 그게 얼마나 찜찜하겠는가.

그런데 어느 정도 씻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허용된 뜻 가운데 사는 성도의 삶이다.

어느 정도 사는 것 같기는 한데..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항상 찜찜하다.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느낌은 그렇다.

마치 양말을 신고, 발을 씻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시원하지 않고/ 감사/ 열정/ 성령의 감동/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양말을 벗고, 발을 씻어야 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기의 양말까지 비로소 완전히 벗어던졌던 것이다.

 

그 후로 야곱은, 남은 인생을

perfect will of God을 이루어가며 살았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의 길을 가는 사람


시139편에 보시면,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 ‘온전한 뜻’을 갖고 계신다.


행2:17에, 성령을 받으면, 꿈과 환상을 본다고 했는데,

성령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온전한 뜻perfect will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런 내용은 많이 다뤘던 것이라 생략하고)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의 길을 가는데도.. 환란과 불행이 올 수 있다.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갈 때도.. 환란과 불행이 오는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의 길을 갈 때도.. 환란과 불행이 닥친다.)


일례로 요셉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 가운데 사는 길을 가는데.. 감옥에 갔다.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다. 순전하고 정직하며 온전하게 사는데.. 욥1:1

그에게 엄청난 고난이 찾아왔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것도 마찬가지이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길을 충실히 가다가 당한 어려움도 마찬가지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환란과 고통의 길을 갔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는 데도.. 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가는데도.. 잘 풀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외적 환경이 잘 풀리느냐/ 반대로 어려우냐..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행하고 있다는

완벽한 증거는 아니다.


그럼 완벽한 증거는? ↓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감격/열정>이다.

내가 ‘하나님이 정하신 온전한 뜻의 길’을 가고 있으면

환경이 잘 풀리든지/ 환란과 역경이 오든지 (둘 다 온다.)

내 마음에 감사/ 평안/ 성령의 열정/ 후회 없음이 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육이 원하는 길’을 가고 있어도

내 환경이 잘 풀리기도 하고/ 환란과 역경이 오기도 한다. (똑같이 둘 다 온다.)

둘 다 오지만 전자가 오면.. 하나님이 버리신 자이고,

후자가 오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다. 회개하라고 환란과 역경을 주신다.


환경이 잘 풀리든지/ 안 풀리고 환란과 역경이 오든지,

내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대로 길을 가고 있지 않는 증거는

내 마음에 감사/ 평안/ 성령의 열정이 없고, 대신에 후회막심/불안/찜찜이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의 평강/감격이 있는지 살펴보자.

똑같은 어려움이지만,

요나가 풍랑속에서 당한 어려움은.. 이런 평강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당하는 고난은, 요셉의 감옥생활과 같지만,

그 마음에 주님의 평강이 넘친다.

바울의 감옥도.. 주님의 위로가 넘치는 감옥이었다.


▲주님의 온전한 뜻은, 십자가의 길

대개의 경우, 주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길을 안 가는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의 온전한 길을 가기만 하면, 만사형통하다’

이런 공식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다.


‘주님의 온전한 길을 가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평강/ 감사/ 만족이 있다’ - 이게 정답이다.

물론 외적으로 사역의 열매가 풍성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외적 열매가 눈에 안 보일 수도 있다.



▲마치는 말

‘주님께 헌신’은 했지만,

쉬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많다.


적당히 헌신하고, 쉬운 길을 찾으려 할 때,

여러분은 ‘최상의 길’이 아닌, ‘적당히 허용된 길’을 가는 것이다.

여러분 마음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사/열정/평강/성령의 감동은 없을 것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롬12:2 perfect will of God

을 분변해야 하는데,

사람이 민감하지 않으면, 회개가 철저하지 않으면,

그저 양말 신고 발을 씻으면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간다.


아니다. 양말까지 확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깨끗이 씻은 후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변해야 한다.

철저히 회개한 사람만.. 그 온전하신 뜻을 정확히 분변할 수 있다.


..........................


▲케네스 헤긴 목사님도, <하나님의 온전한 길>이 아닌,

<허용하신 길> 가운데, 오래 동안 살았음을 고백했다.


사역에 성과도 어느 정도 있고,

자기 삶에, 하나님의 도우심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은 아니었던 것이다.


헤긴 목사님은, 처음에 12년 동안 지역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다.

사택도 좋고, 사례도 좋고, 교회도 어느 정도 성장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외관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목사님 자신에게는 ‘죄다 불편했다.’


‘주님, 하나님의 역사가 조금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주님이 이 교회를 도와주신다는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제게 평강이 없습니까?’


그때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너를 지역교회 목회자로 부른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교사로 불렀다.’


그가 12년 동안 목회한 것은.. 주님의 ‘허용하신 뜻’이었다.

‘완전한 뜻/사명’은 아니었다. ‘최상의 부르심’은 아니었다.

 

헤긴은, 자기의 주된 사명, 자기의 ‘최상의 부르심’은

목양도 아니요, 순회 전도도 아니요, ‘가르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헤긴 목사님은 그때부터

초청 받아 설교를 하더라도, 목청 돋워 불을 뿜는 부흥회가 아니라,

잔잔한 목소리로 차근 차근, 조목 조목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헤긴 목사의 사역에 놀라운 열매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감사/열정/성령의 감동이 밀려왔다.


그 후로 헤긴 목사의 저서는 영어로만 3천7백만 권(부피가 작은 책이 많다)

이 출판되었다. 매년 1백만 권이 팔린 셈이었다.

그리고 그의 설교테이프는, 1주일에 1만개씩 나눠졌다고 한다.


헤긴 목사님은, 그 전에도 목회를 남들 하는 만큼 하셨지만,

그것은 ‘허용된 길’이었다.

그때는 자기 마음에 감사/열정/성령의 감동이 없었고, 항상 찜찜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발견하고 난 후에,

교사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부터

그는 자기 마음에 감사/열정/성령의 감동이 항상 동행했다.

자연히 사역의 외적 열매도..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