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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부흥이 필요한 때 사6:4, 히11:21 젠센 플랭클린 Why We need Revival
◑전도는 되는데, 부흥은 안 되는 현실
*부흥 : 가장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부흥'은 성령충만을 의미함.
re-vival 라는 말도 '다시 살아난다.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뜻.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과, 미전도자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열정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가 계속 늘어나고 있기는 합니다만...
제가 한 가지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는 전도는 늘어나고 있지만,
오늘날 어쩐지 부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면, 부흥도 점점 더 강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Evangelism이 increase하고 있다는데, 이상하게 Revival은 점점 decrease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도들이 점점 모여든다고..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진정한 부흥이 있는가?’ - 그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미국의 A교회)에 지난 주에 1백 명이 등록했어!’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부흥은 아닙니다.
물론 전도가 되어지지만, 부흥이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가 되어지면서, 부흥까지 일어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전도가 늘어났는데, 부흥은 되지 않았던가요?
아닙니다. 전도가 늘어난 곳에는, 반드시 심령의 부흥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여러 지역의 교회를 순회 설교하면서 발견한 점은,
(지금 젠센 프랭클린 목사님은, 타교회를 방문해서 설교하는 정황임)
오늘 제가 설교하는 이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교회마다 신자들은 자꾸 늘어난다고 합니다. 전도는 되어진다는데,
그런데 어쩐지 기존 성도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이 안 일어납니다.
오늘날 전도자는 많은데, 부흥사의 숫자가 적어서 그런 것일까요?
물론 그런 원인도 있을 것입니다.
전도자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분이라면,
부흥사는 성도들의 열정에 다시 불과 열정을 붙이는ignite 사람입니다.
여기서 부흥사는 특정 목사님만 가리키지 않고, 성도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제 소원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전도자뿐만 아니라 부흥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세상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도 필요하지만 (전도)
기존 신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도 동시에 꼭 필요합니다. (부흥)
▲그럼 제가 지금 제 설교를 들으시는,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예배당을 나선 적이.. 그 언제였습니까?”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보신 적이.. 그 언제였습니까?”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참된 부흥이 일어났던 적이.. 그 언제였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세상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전도’도 필요하지만, 이것은 좀 있습니다.
기존 교인인 우리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부흥’도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좀 없습니다.
꼭 눈물을 흘리지 않더라도,
심령이 새로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채워지는..
그래서 내 가슴이 주님이 주신 열정과 불로 타오르는..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요즘 우리는 무슨 집회/수련회를 가지더라도, 이런 심령 부흥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부흥의 간증을 감격스럽게 간증하고 나누는 것은..
20년이나 30년 전의 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령은 20년 전에도, 오늘도 똑같이 살아계시는데,
우리 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20년 전과 지금은.. 아주 큰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참 회개를 한 사람들이, 계속 회개하듯이)
참으로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계속 성령충만을 더 받기 원합니다.
더욱 사모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전도에 대한 열정,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열정을 불태움과 동시에,
부흥에 대한 열정, 바로 우리 영혼들이 새롭게 되는 열정(부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흥이 필요한 때는?
▲1. 어떤 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새롭게 열정적으로 믿는 성도들을 정죄합니다.
‘A는 이것을 바꿔야 하고, B는 저것을 개선해야 해!’
이런 말을 자주 하는 분들은, <부흥>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입니다.
‘부흥’은.. 남을 정죄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정죄하고, 교정합니다.
▲2. 여러분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중요한 무언가를 포기한 때가 언제입니까?
‘권리 포기’를 확실히 하거나, ‘뭘 끊은’ 적이 언제입니까?
지금 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난 사람은 ‘자꾸 포기하고 끊습니다.’
그렇게 끊었던 적이 과거 10년이 지난 사람은.. 지금 부흥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지금도 계속 끊습니다.
▲3. 교회가 앞자리를 비고, 뒷자리부터 차츰 채워질 때.. 그때는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저는 ‘주님을 사모함’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앞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열정이 식은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뒷자리를 좋아합니다.
또한 교회 예배 때, 열정적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는 성도는 적고,
많이 와서 앉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구경꾼’처럼 앉아 있을 때는..
그 때는 부흥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부흥한 심령을 갖고 있으면, 자꾸 밖으로 표현하려 합니다.
그래서 찬송, 기도.. 이런 것이 간절하고, 열정적이 됩니다.
▲4. 방문객들은 칭찬하는데, 기존 교인들은 불평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납니다.
방문객들이 어떤 교회를 방문하면, 쉽게 깜짝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몸에 전율이 돋는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방문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기존 교인들은 불평합니다.
‘설교가 어떻고, 찬양이 어쩌고, 뭐가 저쩌고..’
방문객이 맞는지, 기존 교인이 맞는지.. 누구의 평가가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저 젠센 프랭클린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교회에서 매주 회심(전도)자들이 일어나고, 성도들 심령이 새로워지는 부흥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방문자가 칭찬하더라도, 기존교인들까지 칭찬하더라도,
그 교회에 세상 죄인들의 회심이 없고, 기존 성도의 심령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도 불평이 있었습니다.
행6장에,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될 때, 원망과 불평이 생겨났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초대교회를 ‘부흥하는 교회’로 평가합니다.
그 문제 가운데서도 회개와 부흥이 계속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에 너무 개의치 마십시다.
원망과 불평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이게 없다고 부흥이 아닙니다. 북한 같은 체제에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심과 부흥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교회가 조용해도.. 부흥은 아닙니다.
물론 조용할 리가 없지만.. 말입니다.
▲5. 우리가 생각은 많이 하는데, 행동이 부족할 때.. 이때는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아주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아주 멋진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있습니다.
옷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닙니다.
이렇게 이전과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고 있는데,
왜 찬양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왜 열정과 열심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까?
물질적 복을 더 받으면, 더 열심히 주님께 드릴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물질적 복을 더 받을수록, 더 인색해 지지는 않습니까?
그럼 우리가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과거처럼 아프고, 가난하고, 괴로웠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더 잘 살게 되었는데.. 더 잘 믿는 것입니다.
더 성공했는데.. 이전보다 더 열심히 찬송,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실력자들이 됩시다.
축복 좀 줬더니.. 금방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그런 ‘아마추어’가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제 자신을, 갓 거듭난 새신자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는 함성과 찬양과.. 제 목소리와 찬양을 한 번 비교해 보곤 합니다.
그들의 열정과 헌신과.. 제 자신의 열정과 헌신을 한 번 재보곤 합니다.
저는 결코 ‘새신자’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실력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더 사용해 주시고, 저를 더 축복해 주실수록,
저는 주님께 더 헌신할 것입니다. 더 부흥을 사모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있는 자는 더 가질 것이요’ 하셨듯이, 더 주실 것입니다.
▲6. 교회 와서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카페테리아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거나
아니면 아예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부흥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분을 제외하고는,
주님을 사모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분들은,
교회에 와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따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방송으로 시청하면 되지 뭐!’ 하는 분들은, 생각을 잘못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축구경기나 무슨 연주회를 갔다고 해 봅시다.
여러분이 뒷자리부터 채우시겠습니까?
그런 자리는 앞자리, 좋은 자리부터 챙기면서,
교회 와서는.. 뒷자리부터 찾으시는 것은.. 영혼에 부흥이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7. 여러분의 자녀가 ‘아빠, 오늘 우리 교회 가요?’ 라고 묻는다면.. 부흥이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날은 비가 오든지, 아니면 반대로 날씨가 화창하든지..
자녀가 ‘아빠, 오늘 우리 교회 가요?’ 라고 묻는 것은,
그 가정이, 띠엄 띠엄 교회를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비가 오나, 날씨가 화창하거나
자녀들이 주일에는 당연히 교회 갈 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왜 자녀가 ‘아빠, 오늘 우리 교회 가요?’ 라고 묻는 것입니까?
‘자녀가, 부모의 신앙이 나이롱인줄 뻔히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부모를 존경하지도 않고,
존경하지 않으니까, 부모 말을 듣지도 않는 것입니다.
▲8. 너무 신학에 치우치고, 신학 학위를 너무 사모하거나 자랑한다면.. 부흥이 필요한 때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이 필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하고, 직분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신학/지식/학위/직분으로 심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을 연구하고, 학위나 직분을 받는 것은
더 많은(진실한) 섬김과 봉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신학/지식/학위/직분은 으리으리하지만,
섬김/헌신/봉사/사랑이 부족해서.. 부끄러움을 당해서는 안 되도록,
오늘을 정신 바짝 차리며,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더 열심히 섬기는 성도’들이 됩니다.
더 열심히 섬기기 위해서, 신학을 연구하는 것 아닙니까?
‘직분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직분이 주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가 되기 십상이므로
그래서 우리에게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흥이 없으면,
많이 공부할수록, 직분이 높을수록,
오히려 반대자요, 부흥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 역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제가 고함지르며 설교하면,
‘저 목사는 깊이가 얕다 (깊이가 깊으면 안 저럴 터인데..)’ 라고 걱정해 줍니다만,
진짜 신학적/신앙적 깊이가 깊은 사람은..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싸늘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에스겔서에 1천척, 또 1천척, 또 1천척 측량하는 비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물이 허리까지 잠긴 사람은 ‘손뼉을 칩니다.’ (높이가 비슷)
물이 1천척 더 깊은 곳까지 다다른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높입니다.’ (높이가 비슷)
물이 창일해서 헤엄할 깊이에 다다른 사람은 ‘몸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손뼉도 제대로 못 치는 사람은, 생수의 강에 겨우 발목까지만 잠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발로 걸어서, 겨우 교회까지 오기는 했습니다만..
부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적용
▲거룩하게 살려면, 거룩한 분이 내게 임재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은,
우리 부모 세대가 이해comprehend 할 수 없을 정도의
음란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또래의 압력 peer pressure을 받고 있습니다.
부모의 훈계로는 이제 부족합니다.
우리 자녀를 구하고,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뜨거운 기름부음이.. 우리 자녀들에게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과 능력으로 충만해져야만.. 그 음란한 환경, 또래의 압력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교회에 그 일을 행하소서!
성도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무슨 가르침을 받아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하신 분이, 성도 속으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이가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면,
그 분이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도록 인도/주장해 가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이,
직장 마치면 맥주 한 잔 꼭 마셔야 되고,
어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날 기대를 하면서, 바 Bar로 향합니까?
왜 여러 파트너를 가지려 하십니까?
이런 매일의 일상을 산다면.. 그는 반드시 성령충만(심령부흥)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안 그러고는 그런 일상을 청산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자기 속에 확실하게 내주하셔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 기쁨의 근원을.. 거룩한 데서 찾고 추구하게 됩니다.
▲저는 ‘성전 문지방’이 떨리는 환상을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변호하는 설교자들은 많은데, preaching for us
우리에게 설교하는 목사들은 많지 않습니다. 현실입니다. preaching to us
저는 오늘 여러분께, 변호가 아니라, 설교하기 원합니다.
사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가득한지라..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고,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면,
‘문지방의 터 posts of the door가 요동하게’ 됩니다. 가만히 쥐죽은 듯 앉아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의 터’는 다시 말하면 일종의 ‘기둥’입니다.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 posts’입니다.
성전의 기둥(지도자)들부터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흔들거려야 합니다.
성령충만으로 벌벌 떨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부흥이 임하는 증거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며 경배했습니다.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기대야할 정도로 .. 노쇠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축복기도하고, 경배 했습니다.
‘나는 예전에는 예수님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찬양했단다.
그런데 이제는 관절염도 있고, 힘이 노쇠해서.. 안 된단다’ .. 가 아닙니다.
야곱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야곱의 신앙과 믿음은..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지팡이 짚고도,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보행기를 끌거나 휠체어를 타시더라도.. 야곱처럼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하나님을 경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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