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11.05.11.설교일부녹취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1. 애통은 성도의 삶에서 계속 되어야 하는 것
위 구절에서 애통(펜테오)의 시제가 ‘현재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현재진행을 포함한다. ‘완료 시제’가 아니다.
이 말은, 애통이, 성도의 삶속에 현재에 계속되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성도의 삶이란, 자신의 죄인됨을, 늘 알아가고, 깨닫고, 회개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2. 애통은.. 회복과 위로의 시작이다.
내가 애통할 때, 어떤 방식으로 위로가 임하는가?
주님이 그 애통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나와 함께 애통해 주신다. 주1)
렘14: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애통)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이스라엘이, 범죄로 말미암아 처절한 자리로 내려갔을 때,
하나님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신다.
하나님의 눈물은, 회복의 시작이기도 하다.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애통하시며)
하나님이 우셨다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위로(회복의 약속)이 들어가 있다.
물론 그 회복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통한 회복이었다. 처절한 대가를 치른 후에 회복되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애통하는 자, 우는 자에게는.. 반드시 회복의 약속이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우셨다. 요11:35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서 우신 것이 일차적 이유가 아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지체하시다가, 뒤늦게 당도하셨다.
더욱이 조금 있다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뭐하러 우시겠는가?
죄를 보시고, 그 죄의 결과를 보시고, 비통해서 우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셨더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
-지금 ‘애통은 회복의 시작이요, 애통은 회복의 약속’이란 내용을 살피는 중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애통하실 것은,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애통)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애통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회복이 약속되어 있다.
애통은.. 내 속에 성령(예수)님이 임하신 증거요,
애통과 더불어 회복은 이미 시작되었다.
▲3. 오늘날 우리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위로를 체험한다.
성경은 <말씀이 위로자>라고 말씀한다.
롬15:4 무엇이든지 전前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죄로 인하여, 또는 공동체의 죄악으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위로해 주시는데,
그것은, 성경의 위로/말씀의 위로를 주시는 방식으로.. 그를 위로하신다.
설교를 들으면서.. 애통하는 성도가 위로를 받는다.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위로를 받는다.
▲4. 애통이 있어야.. 위로가 있다.
그래서 히브리어에 ‘애통’과 ‘위로’가 한 단어(나함)이다. 주1)
이 말은, ‘애통’이 있는 곳에 ‘위로’도 있다는 뜻이 된다.
‘애통’과 ‘위로’가 짝으로 함께 간다는 뜻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위로하고), 슬픈 자들과 함께 슬퍼하라(위로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를 잘 반영해 준다. 애통과 위로가 일맥상통하는 한 단어(나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이 위로(함께 애통해) 주신다.
'위로'(파라칼레오)라는 말이 파라(옆에) 칼레오(부르다), 즉 '자기 곁으로 부르다'인데,
본문이 수동형이니까, '자기 곁으로 불러와 진다'이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이 곁으로 와 주셔서.. 같이 애통(위로)해 주신다.
-이것이 본문의 진의이다.
위로란.. 같이 울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이 같이 울어주시는 위로가 임하기도 하지만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같이 슬퍼해 주시는 위로가 임한다.
▲5. 따라서 옳은 설교는, 성도를 애통하게 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듯이
성도들이 갖고 있는 수많은 위장과 가면들을 치워버리고
자기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기 무가치함이 발견되어져야 한다.
자기의 죄악된 실상을 보고.. 애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그래서 심지어는 설교자가 미워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자가 미워서, 돌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흥분하지만,
거기서 ‘애통’이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죄의 폭로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이 주류가 되면 안 된다.
참된 설교는, 여러분들을 끊임없이 발가벗기고, 그 위에 임한 십자가의 용서를 전파한다.
그것 이외에 다른 이야기가 주류가 되는 설교는.. 즉 인간의 감언이설은.. 올바르지 않다.)
일단 애통하면.. 위로는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는 자동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물론 말씀을 통한 위로가 필요하지만...
▲6. 애통과 위로가 함께 주어짐을 깨달은 바울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18~24절까지 ‘애통, 탄식’이 나오다가
25절에 극적으로 ‘위로’가 나온다. 이어지는 롬8:1~2절도 마찬가지로 위로!
25절의 위로를 가만히 보시라.
‘예수’가 위로이고, ‘십자가’가 위로이다. 다른 세상 복이 위로가 아니라..
▲7.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조건 우리를 복주시고, 우리를 잘 되게 하시는 것’... 이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나를 구원해 주신 목적도
무조건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이.. 나에게 좋으니까, 그게 내게 복이니까..
나를 구원해 주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주셔서,
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신다.
내가 뭘 성취하고, 내가 무슨 큰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성취/업적 이런 것에 크게 관심 없으시다.
그건 하나님께 마치 길바닥의 돌처럼 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결한 신부요, 애통하는 성도’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찬송하는 성도를 기뻐하신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다.
그래서 8복도
‘성취하는 자여, 큰 업적을 남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안 나온다.
현세적 관점에서 보면, 그게 큰 복처럼 보이지만,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천국에서 돌처럼 흔한 것이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열심히 뛰어서, 하나님께 박수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게 하나님께 무슨 큰 도움이 되나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나는 진토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고백/애통하며,
주님의 위로와 긍휼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원하신다.
‘주를 위해 내 목숨 바칩니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런 고백도 귀에 거슬릴 때가 있다.
자기 목숨이 무슨 꽤나 가치가 있다고 그러는 건지...
내 목숨.. 하나님께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수 있다.
다만 내가 진정으로 애통하고, 회개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때
그제야 그 목숨은 정말 가치 있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과 바꾸신 목숨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애통 없이, 회개 없이
자기 목숨 바치고, 우리 목숨 다 바쳐도..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수 있다. 주님께 전혀 도움(영광) 안 된다.
-그만큼 애통, 회개가 중요하다는 뜻!
‘주를 위해 제가 기꺼이 고난을 받겠습니다’
이런 말도 함부로 하지 마시라. 그거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정말 애통하고, 회개한 영혼의 그 고백은.. 참 귀중한 것이지만,
죄로 가득찬 심령의 그 고백은, 그 예배는.. 하나님을 귀찮케 할 뿐이다. 이사야서에 귀찮다고 많이 나온다.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주를 위해 고난까지 주십니까? (무한 영광입니다)'
애통하고, 회개하는 성도는.. 그렇게 고백한다.
행5:41에 사도들이, 그렇게 '주를 위해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주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주저 없이 나오는 것은, 자기 목숨이나 인생이 꽤나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게 회개하지 않은 자의, 애통하지 않는 자의.. 증거요, 교만인 것이다.
.........................
주1) 여기서 ‘위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함’인데
히브리어로 ‘위로하다’는 말과, ‘애통하다’는 같은 말이다.
히브리어는 한 동사 ‘나함’을
니팔, 피엘, 푸알, 히트파엘 형으로 동사의 형태를 변화시켜서
‘위로’와 ‘애통’의 상반된 두 의미를 모두 표현한다. 히브리인의 사고구조이다.
애통해보지 않은 자는, 다른 이의 위로에 참여할 수 없다.
배반당해 보지 않은 자는, 배반당한 친구의 위로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로>는,
먼저 <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자기 친구의 <애통>에 함께 내려가는 것.. 그래야 비로소 참 <위로>가 된다.
그래서 ‘나함’이란 단어에, <위로>와 <애통>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상반된 뜻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일맥상통하는 뜻이 된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위로하고), 슬픈 자들과 함께 슬퍼하라(위로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히브리 사람들의 그러한 사고를 잘 반영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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