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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신경 제거수술

LNCK 2011. 9. 6. 10:04

◈마음의 신경 제거수술             나훔2:1~13          11.08.24. 인터넷설교스크랩



◑신경 제거 수술 


치과에서 치아 신경제거수술을 합니다.

아예 그 치아와 연결되어 있는 신경 자체를 제거해 버려요.


치아가 너무 통증이 심하고 견딜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망가진 치아의 상태를 원상회복시키기 어려울 경우에는

아예 신경을 제거해서, 통증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는 그런 치료입니다...


▲중추신경

‘신경’이라고 하는 게 그 뜻을 보면, 먼저 중추신경이 있습니다.

중추신경은, 우리의 뇌가 있고, 뇌와 연결되어서

우리의 등에 있는 척추 안으로 척수(중추신경)가 흘러들어가 있습니다.


그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서 사지로 신경섬유가 뻗어있는데

이걸 말초신경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러한 말초신경에 의해서 중추신경으로 자극이 전달되고

중추신경이 그 자극을 느낍니다.

‘아! 좋다, 아프다, 괴롭다’


▲마음의 신경

그런데 이런 육체적인 신경만 있는 게 아니라,

‘신경’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 갖게 되는 느낌이나 생각도.. 신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 신경 꺼, 네 일에나 신경 써!’

‘내 일에 대해서 네 마음의 생각과 느낌을 꺼라, 신경을 쓰지 마라!’

이럴 때도 우리가 신경이라는 말을 쓴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에도 신경이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마음이 아픕니다.

치아가 잘못 돼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도

마음의 신경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픔을 느낍니다.


또 어떤 때는 마음이 아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도 기쁜 것은, 이런 신경의 작용이라는 거예요.

마음의 신경을 통해서 느낀다는 겁니다.


마음의 신경을 제거하면, 마음의 통증이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신경을 제거하고 나면

분명히 아플 수밖에 없는 치아의 상태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픔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신경을 제거해 버리면

마음이 아플 수 있고,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상황은 있습니다마는

마음이 그것을 느끼지는 못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신경이 죽어있어서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

내 <마음의 신경>이 내 삶의 현실에서 완전히 제거되어버린 상태,

이 상태가 성도 됨의 필수적이 요건이라는 거예요.


‘아, 사람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궁금증이 많으시겠지만 이야기를 계속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성도 됨의 필수적인 요건으로서의

중추신경의 제거를 암시하고 전해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왜 성도에게 있어서 마음의 중추신경이 제거되어야만 됩니까?

우리 삶에 대해서 2개의 중추신경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중추신경계는 하나만 있어야 돼요.

말초신경의 신경섬유는 수백 수천 개가 되지만

중추신경계는 하나만 있어야 되는 거죠.


통일된 일치된 느낌이 있어야지

두 개의 중추신경이 있어서.. 서로 다른 느낌을 갖게 되면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지금의 현실, 삶의 현장의 상태,

가정의 상태든지, 직장의 상태든지, 내 인생의 상태든지 간에..

그 상태에 대해서 언제나 두 개의 중추신경이 존재할 수 있어요.


중추신경1.. 내가, 나의 육신이 내 상태를 보고 느낍니다.  

중추신경2.. 내 속에 계신 주님도 보시고 느끼십니다.


내가 지금 주어진 삶의 현장의 상태를 판단하고 분석하고 또 행동을 결단하지요?

하나님께서도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을 판단하고 분석하십니다.

그러므로 2개의 중추신경이 있다는 것이에요.


선민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이 직접 내 삶에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오셔서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이끌어가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삶에서는 자기 마음의 중추신경을 없애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신경이 느끼시고 판단하시는 대로

끌고 가실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내 속의 주님이 중추신경으로 느끼시는 것과..

나의 육신이 중추신경으로 느끼는 것이

서로 부딪혀서 갈등이 생기지 않으려면,

 

내 마음의 중추신경은 반드시

치과에서 잘못된 치아와 연결된 신경을 제거해 버리듯이

이 삶의 현장에서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자기 중추신경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설명


▲앗수르가 망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문 나훔서 2장은 나훔이 앗수르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하고,

그 멸망의 참혹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예언의 특징은

그 누구도 이렇게 앗수르가 망할 것을 알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느낌으로라도 예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예언이었습니다.


근동에서 팽창하는 앗수르의 세력에 맞서서 저지할 세력도 나라도 없었고,

도대체 앗수르의 제멋대로 자행자지하는 그런 태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세력 또한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함과 많음을 획득한 그 토대 위에서

앗수르의 잔악함, 제멋대로의 행동이 온 근동을 다 먹어버리고 있을 때,

나훔이 그 멸망을 예언하게 된 것입니다.


▲‘앗수르’ 멸망의 상징적 의미

나훔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역사적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데에 비중을 두고

예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민의 편을 들어주실 거라는 사실을..

예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그렇게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전성기를 누리고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는,

 

그리고 룰도 없고, 어떤 언약이라도 식은 죽 먹듯이 제멋대로 배반하는

저 앗수르의 잘못 됨이 반드시 망할 것이니.. 안심하라는 안도감을 가지라고..

예언한 내용도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앗수르가 망한다’는 것은

그렇게 자기 멋대로 강함의 토대 위에서 행한 모든 세력들은

(‘앗수르’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이 땅의 삶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결국은

반드시 참담한 멸망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나훔서를 통해서, 선민들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너희 삶의 현장에서

너희 마음대로 하지 못해 안달하면서 살게 될 때에는

반드시 앗수르와 같은 패망이 너희에게도 주어질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는 내가.. 바로 ‘앗수르’다. 

그런데 이 경고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은

남 왕국 유다도 앗수르의 패망의 길을 걸어간 것은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안달 하며 살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상을 섬겼던 것이지요,

우상이라야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으니까요..

     우상은 내 삶에 인격적으로 간섭 안 하고, 그냥 내 소원만 비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중추신경과, 내 중추신경이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나훔서 2장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을 - 선민은 절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메시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적용


그러면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내 육신의 중추신경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해요.


제가 척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척수에다가 마취제를 주사했어요. 그것까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7시간 동안 잠을 자는데,


내가 마취를 하지 않고, 신경이 마취되지 않은 채로 살아있었다면

그 척추수술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아픔이 내 몸을 비트니까요.


내가 아픔을 못 견디고 있으면

의사선생님의 신경이 수술에 집중할 수도 없습니다.


수술을 해야, 편안하고 건강하게 허리를 사용할 것인데,

수술을 안 하면.. 척추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지요.

다행히 저는 수술 결과가 좋아서, 그 후로 지금까지 척추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믿은 뒤에도, 평강의 삶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 중추신경이 살아있으면서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의 상태에 대해서

내 신경이 그것을 느끼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수술을 못 하시는 것입니다.

수술 좀 하려면, 사지를 비틀고, 몸을 퍼덕거리니까.. 수술이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수술 하시려면,

먼저 내 중추신경부터 마취를 해서, 마비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내가 스스로 십자가에 안 죽으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나를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그것은 마치 마취 없는 수술과 같아서, 굉장히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추신경이 자발적으로 죽어야 돼요.


▲성령충만을 신경과 빗대어 설명하면

여러분, 상상해 봅시다.

머리에 뇌가 있고, 뇌에서 연결된 척수가 있습니다. (척추 안에 있습니다.)


척추 안에는, 마치 전선을 수십 가닥 묶어놓은 것처럼 척수(중추신경)가 흐르고 있잖아요?


그 척수(실다발)를 다 뽑아서,

마음의 성령충만 방에 연결시킵니다. 그 그릇에 담가 둡니다.


그러면, 내 중추신경계로,

성령이 흐르는 거예요. 병원 마취약을 연상하면 될까요?


그게 바로 ‘육체를 따르는 사람’과

‘성령을 따르는 사람’을 대별해서 말할 때의 내용이라는 것이에요.

 

성령이 우리 마음의 신경계를 감쌉니다.

그래서 오감관을 통해서 접하는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모든 것을

이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중추신경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중추신경계의 지배를 받아서 살아갑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보시는 그 느낌이 그대로

내 마음에 다 전달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노래합니까?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수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앗수르와 같은

정말 제멋대로이고, 잔악하고, 통제 불가능한 이런 원수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을 때,


내 마음의 중추신경이,

자기 육신이 처한 상태에 있지 않고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성령에 접속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 어떤 느낌이 주어지는가 하면,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내 마음은 하나님께서 잔칫상을 베풀어주신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나아가면, 현실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그런 거지요, 내 마음은 지금 칼로 째고 있으니까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 중추신경을 빼내가지고

아주 따뜻하고 향기가 가득한 곳으로 중추신경을 연결해 버렸다고 한다면

몸은 아파도.. 중추신경은, 성령에 접속된 그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선민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의 삶의 현장에 대해서는.. 우리 중추신경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추신경을 성령님께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느끼시는 것을, 내가 똑같이 느끼게 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다’는 말씀이.. 바로 그 상태입니다.

그러면 내 중추신경은, 주님의 느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아직도 내 마음의 중추신경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내 육신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삶에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게 뭡니까?


‘강함과 많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함,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많음을 얻어서

그 토대 위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어 안달하며 사는 게

이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의 절대적인 삶의 태도 아닙니까?


그것이 선민에게는 극약이라는 겁니다.


..................


▲마음의 중추신경이 죽은 사람의 예 

영국이 낳은 명장 가운데 찰스 조지 고든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수단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입니다.

그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직접 군인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갔습니다.


그런데 고든 장군이 기거하는 막사 앞에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하얀 손수건 한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이 걸려 있을 때에는 특별한 용무가 아닌 한,

그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그 손수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든 장군은 매일 아침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간에 그의 막사 앞에 하얀 손수건을 걸어놓았던 것입니다.


영국 정부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제작하며 동상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로 만들지를 못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 대신 그에게 작위를 주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든 장군은 그것마저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그를 겨우 설득해서,

그의 업적을 새겨 넣은 자그마한 금메달 하나만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유족들은 그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보여야 할 금메달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금메달은 그가 애지중지하던 것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금메달의 행방을 찾아보았습니다.


나중에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금메달을 녹여서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양식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아끼던 것을

오늘 하나님께 기쁜 마음으로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