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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종의 영, 양자의 영

LNCK 2011. 9. 7. 18:49

◈종의 영, 양자의 영              롬8:14~15, 눅15:18~21            출처  



성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이 지키는 삶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로 즐거이/기꺼이 지킨다. (지키는 삶을 추구한다.) 



◑양자의 영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2, 15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과,

-“양자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양자의 영”을 받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받는다고 역설하고 있는데,

과연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먼저 ‘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   spirit of the slave

신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벌이 두려워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간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종의 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무서워서 순종하고,

주인이 주는 대가를 노리고 일을 하는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유대인들은 전혀 빚진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함과 헌신에 대하여, 빚 보상의무 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렸고 희생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세운 공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구원까지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내가 이렇게 많은 봉사와 헌금을 드렸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갚아 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


자신이 드린 헌신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따라다니고,

형벌을 받기 무서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된 부자지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순종하고,

아버지께 먹을 것을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종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롬8:15절에 기록한

“양자의 영”이다.


▲1. ‘양자의 영’을 받으면 ‘은혜의 빚진 자’로 산다. spirit of the sonship

이것은 ‘진짜 아들이 되는 경험’이다.

당시 로마문화에서 양자는, 진짜 아들과 똑같은 법적 권리가 있었다.

     혈통이 강한 우리 문화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양자’이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지위까지 물려받는다.

     아버지는, 일찍 자기 후계자로 ‘양자’를 택한다. 벤허도 장군의 양자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양자가 황제가 된 경우도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게 된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순종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친밀한 부자관계를 연상해 보시라.


아버지 앞에 설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격해서

자신이 아버지께 놀라운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는

빚진 자의 심정이 샘솟게 된다.        *빚진 자 - 롬1:14참조


빚진 자의 심령으로 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의 양심 속에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좇아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양자로)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2-13


▲2.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산다.

“양자의 영”을 받은 신자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빚’에 감격한다는 좋은 의미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아버지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죄나 양심의 가책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 속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온 마음 가득 감격을 하고 소리 높이 아버지를 “부르짖게 cry”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양자)이 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난 세월 동안 늘 원치 않는 죄에 끌려 다녔기 때문에

눈치만 살피던 무서운 하나님이

이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아버지로서 느껴지게 된다.


우리의 경험이 여기까지 오면 그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너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8:16


날마다 우리 속에서 성령께서 이런 확신을 주신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놀랍게 달라질 것이다.


여러분, 제가 어릴 적에, 자기 아버지가 <장학사>인 급우가 있었다.

얼마나 위세를 떨치는지..

아마 자기 집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찾아와서 굽신거렸던 모양이다. (지금은 이런 일 없음)


예가 좀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내 아버지 이셔!’

-이게 보통 자존심이 아니다. 대단한 자존심이다.

이게 생기면, 세상이 두렵지 않다. 부럽지도 않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한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 몰래 숨어서 나쁜 짓을 하면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한다.

왜 그런가? 아버지가 계명으로 금해 놓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달려가서 죄를 고백하면 될 텐데

그 죄를 포기하기는 싫고, 또한 포기할 수도 없어서

죄를 꼭 붙잡은 채 아버지 눈치만 살피면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죄를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것이 영혼의 평안을 잃어버린 상태이고, “종의 영”을 받은 상태이다.

 


◑탕자.. ‘양자의 영’을 받다.


양자의 영을 받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탕자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고난을 통해, 양자의 영을 회복하다.

아버지는, 탕자가 자기 몫으로 받을 유산을 챙겨서 집을 떠나려고 할 때,

가지 말라고 호소했겠지만, 강제로 막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면 막아 주세요.”라고 기도드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그것은 이미 자신의 뜻을 세운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을 강제로 막지 않으신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다른 것을 추구한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 주며,


자신의 뜻과 목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세속과 자아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오려면

“돼지 우리”에 떨어지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치면 “아버지 내 것을 주세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에서 ←현재 상당수 신자들

“아버지, 나로 하여금 당신의 품꾼 중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회개한 신자들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과하여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15:18


돼지우리가 좋은 사람은,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돼지우리의 생활이 싫은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께 평생 갚을 수 없는 빚,

즉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께 돌아가기 원한다. 이것이 빚진 자의 심령이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19


아버지께 너무나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스스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정말 사랑과 자비가 많은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이 집의 종으로 받아달라고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양자의 영”을 받은 상태이다. 탕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런데 탕자 자신은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될까?

-자신이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탕자의 마음속에는 “무서워 떠는 종의 정신”이 전혀 없다.

의도적으로 죄를 품거나 붙잡고자 하는 정신이 전혀 없어서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다만, 자신의 부족과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간다.


여러분은 양자의 영을 받았는가? 아니면 두려워 떠는 종의 영을 받았는가?


양자의 영을 받아야만, 그때부터 제대로 된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서로 부둥켜안는 사이가 된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그런데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 아들을 안아 준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렇게 해야만

아들도 용기를 내서 아버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탕자는 아들이 되고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먼저 안아 주지 않으면, 탕자는 도저히 아버지를 안을 수 없다.


이것이 참된 ‘빚진 자의 태도’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측은해서 껴안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해서 품에 안기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철저하게 빚진 자의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대가로

하늘 아버지께 복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15:21


탕자의 비유 속에는 참된 양자의 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가득하다.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은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감당치 못하겠다”고 대답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탕자의 이런 모습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이다.

부활의 경험이고 생명을 얻는 경험이다.



◑맏아들.. ‘종의 영’을 받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어떤가?

집 떠난 동생이 돌아오던 날에도

맏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눅15:24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반기를 든 적도 없고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완벽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너무나 좋아서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아들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맏아들은 그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29


맏아들의 불만은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죽어라고 일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 어디에 “양자의 영”이 있는가?

이 말씀 어디에 “빚진 자”의 태도가 있는가?


아버지의 집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지만,

부자의 정이, 형제의 정이 완전히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한 아들인데

속으로는 그 영혼이 썩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눅15:29이 한국어 성경에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노예처럼 일했는데”라고 번역되어 있다.


맏아들은 “양자의 영”이 아니라

“무서워 떠는 노예의 정신”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 벌을 받으니까

노예처럼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의 환심을 얻고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원했던 것이다.


맏아들은 자신이 일한 양에 비례해서, 아버지가 대가를 지불해 주길 기대했다.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삯꾼의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혹시 우리는 우리가 행한 헌신과 희생의 대가를 기대하지는 않는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또는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만큼 일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이만큼 자비와 친절을 베풀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대가와 공로를 기대하는 마음은 “양자의 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빚진 자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맏아들의 문제는 아버지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가?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눅15:24


아버지에게 있어서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이 돌아온 것은

죽었던 아들이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것이다.


생명이 없던 아들이 돼지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생명을 다시 얻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빚진 자의 심령으로 서게 되어서

양자의 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송아지가 아니라 더한 것도 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탕자가 돌아오면 온 하늘이 기뻐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사실상 맏아들도 탕자였다.              *흔히 돌탕, 집탕으로 부른다.

몸은 집안에 있었지만, 마음이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있는 탕자’ 즉 ‘집탕’이었다.                            *'돌탕'은 돌아온 탕자


맏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집안사람 아무도 그가 탕자인지 몰랐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림을 당했는지 스스로 몰랐다.


맏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성장하는 아이는 빗나가기 쉽다.

바리새인처럼 이기적이고 뒤틀어진 성격을 갖게 된다.


아버지가 늘 옆에 있었지만, 그에게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집안에서 그는 외로움을 느꼈고, 깊은 감사를 느끼지 못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 아니었다.)


둘째아들은 육신의 배가 고픈 고난을 겪었지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어떤 때는 맏아들로,

어떤 때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모습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어떤 때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멀어지고,

어떤 때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멀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 깊은 인생의 허무를 맛보게 된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빨면서 웃는다.

그러나 그 달콤한 사탕도 엄마 품에 있을 때 좋은 것이지,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의 사탕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사탕을 붙잡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두려움과 허탈함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야만 우리가 가진 것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비로소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맏아들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동생이 심한 고생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형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동생이 돌아왔는데..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늘.” 눅15:28


맏아들의 내면에는, 깊은 외로움과 분노와 자기 연민이 있었다.

평생 아버지 집에서 편하게 살았음에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충만한 감사가 없었다.


그래서 늘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웠는데,

몇 년 만에 돌아온 동생이 온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께 부복하여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에게는 저런 감사가 없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는 한 번도 그렇게 대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동생에게는 맨발로 달려가 끌어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아버지를 보면서

“왜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동생이 돌아오매.” 눅15:30

‘집탕’의 이 말에서

우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의 마음에 커다란 가시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 집안에 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신자에게서

오늘날에도 이러한 모습이 똑같이 나타난다.


맏아들의 마음은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를 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길 수도 없다.


▲율법주의자에겐, 고난의 은혜도 없을 수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는 고난을 통해서 다시 돌아오도록 섭리하였지만,


맏아들에게는 끝까지 고난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맏아들에게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맏아들에게는 고난이 별 효과가 없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노예의 정신(종의 영)을 가진 신자들,

즉, 율법주의자에게.. 고난은 별다른 효용이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원망을 더 크게 만든다.


아버지를 위하여 일하지 않은 둘째아들은.. 고난을 통하여 구원받았는데,

아버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한 맏아들은.. 고난 받지 못한 채, 구원도 받지 못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이다.


여러분 가운데 심한 고난의 삶을 살고 계신 분이 있는가?

고난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감사의 심령을 갖게 되었는가?

아니면 고난을 통하여.. 도리어 하나님을 더 원망하고 있는가?

만일 원망한다면.. 당신은 ‘맏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 모두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길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다.


좁은 길을 걷기 때문에 고단하고 피곤한가? 자꾸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지는가?

빚진 자의 심령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늘 가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관련글/ 마이크 비클 양자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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