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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없는 빵집 룻1:1~6 Russian 영어보기
토미 테니 말씀강해 / House of Bread
◑빵 없는 빵집
▲현대교회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우선순위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빵을 파는 빵집은 맞는데,
그 진열대 안에, 빵은 거의 없고, 텅텅 비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 상황?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빵가게 사람들이, 빵을 팔고자 하는 마음도, 의욕도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오븐과
텅 비어있는 진열대 주위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기를 즐길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에, 교제하러 옵니다.
▲이런 ‘빵 없는 빵집 같은 교회’의 현실을 보고서, 저 Tommy Tenney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지, 계시지 않은지.. 알고나 있기는 한 건가?’
‘만일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면, 그 분이 어떤 일을 행하시고 계신지,
그 분이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고나 있기는 한가?’
제가 보기엔, 그런데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빗자루로 바닥 청소하는 일, 텅 빈 진열대 유리 닦기 등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의 임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에 나오거나,
다른 크리스천 교우들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에.. 지친 듯합니다.
빵집의 진열장과 선반은 그럴듯해 보입니다.
심지어 빵 냄새가 아직 약간은 묻어 있습니다만,
그 안의 오븐은, 오래 동안 사용된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조명을 가게 안에 비춰 놓고,
식탁과 의자를 그럴싸하게 배치해 두었습니다.
그 안에는 메뉴도 있지만,
메뉴에 표기된 빵들은, 예전에 팔던 것들이요, 지금은 '단품'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빵집에 있었던 제품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말 찾아보려면,
바닥이나 진열대 구석을 뒤지고 다녀야, 겨우 부스러기만을 조금 찾을 정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닥의 부스러기와 빈 선반에는.. 이제 질렸습니다.
제게는 빵이 필요하고, 여러분에게도 빵이 필요합니다.
◑룻기 이야기
▲룻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엘리멜렉이란 남자가 나옵니다. 나오미의 남편입니다.
그들에겐 말론, 기룐이라는 두 아들도 있었고,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룻1:1
그래서 먹을 것이 없어서, 이 가족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모압에서, 그들 가족은 약 10년 정도 살았습니다. 룻1:4
그 사이에 말론과 기룐은, 각각 모압 여자 오르바, 룻과 결혼했습니다.
왜 엘리멜렉의 가족이, 모압 땅에서 10년이나 살았을까요?
그것은 유대에 기근이 오래 10년이나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이에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 등
남자들은, 모압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가 다시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었기’ 때문입니다. 룻1:6
▲이 나오미 가정의 이야기는, 제게 놀라운 통찰력을 줍니다.
‘빵이 떨어지면 비극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 ‘빵집’이란 뜻입니다.
아마 그곳에 밀수확이 많았든지, 아니면 빵을 만들어 팔았든지.. 어쨌든 ‘빵집’입니다.
그 ‘빵집’에 빵이 떨어지자 기근이 들자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 버립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10년 후에 비참하게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고향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한 마디로 그 가정은 <'빵집'에서 빵이 떨어진 가운데 벌어진 비극>을 겪었던 것입니다.
서두에서 제가 ‘빵이 떨어진 빵집’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에도, 빵집에 빵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빵을 구하러 ‘모압’에 갈 것입니다.
(모압은 자기 자녀를 인신제사로 바치던 풍습이 있던 곳입니다.)
그런 악령의 역사가 강해서 그런지, 나오미는 모압에서 자기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빵집에 빵이 떨어지면,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구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동양신비종교, 불교, 인도와 티벳과 이슬람으로 노크합니다.
'빵집'에 빵이 떨어졌기 때문에, 다른 집으로 가서, 빵을 찾는 것입니다.
◑적용
▲저는 지금 바닷가에 나와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제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노래에 자신이 없어서, 지금처럼 제 혼자 있어도,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항상 제가 사방을 먼저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이 확인되면.. 그제야 노래를 부릅니다.
또 지금 저는 청바지를 제대로 입었나.. 저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바닷가에, 어린아이들이 나오면,
그들은 ‘사람 눈치’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바다를 향해 손을 저어 지휘도 할 것입니다.
자기 바지 모양새에 관계 없이,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즐겁게 뛰어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를 잘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사람 눈치>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노래(찬양) 부를 때도.. 주위 사람 눈치 보고..
옷차림도.. 주위 사람 눈치를 보고..
그러니까 어린아이처럼, 주님 앞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임재를 잘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그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 사람눈치를 봅니다.
하나님의 눈치와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봐야 하는데.. 현실은 그게 쉽지 않습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빵 집’에 빵이 없으면..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그곳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떠난 그 가정에도.. 여러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회복되기는 했지만요.. 과정에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 토미 테니는
경건한 허상과 조작에 질려 버렸습니다.
은혜를 주기도 하고, 은혜를 받기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말은.. 그저 허상인 것입니다.
▲어떻게 빵집에 빵을 다시 채울 수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방문하셨다’고 말합니다. 1:6
The Lord had visited (come) his people (개역엔 ‘여호와께서 돌보시사’)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룻1:6
집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룻1:6
자녀들은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떡(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마4:4
만약, 빵집에 빵이 없으면.. 사람들은 다 굶어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마치 빵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허위광고, 과장광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만,
그들을 배부르게 만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린 영혼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제가 ‘빵집에 빵이 없다’고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제게 화를 내십니다.
그리고 빵은 없이, ‘감정’만 자극하는 것에 지쳐 있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배가 고파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닐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빵집에 빵이 있으려면,
주님이 와 주셔야 합니다. 롯1:6
주님이 방문해 주시려면,
우리가 간절히 주님의 방문을/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 제사장들처럼, (아래에 예 나옴)
나귀타고 초라하게 방문하시는 주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빵은 매일 새롭고 신선하게 구워져야 합니다.
(한국인이 밥을 매일 하듯이)
서구인은 빵을 매일 굽습니다.
빵가게에서 파는 빵도, 그날 바로 구운 것입니다.
빵은 그날 구워서, 신선하게 먹어야.. 맛이 좋습니다.
옛날에 구운 빵을 먹으라고 주는 것은.. 손님이나 고객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코, 과거에 받은 은혜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매일 새롭게, 날마다 ‘신선한 빵으로’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에 우리를 방문하신 주님만 말하지 마시고,
오늘 현실에 우리를 방문하시는 주님을 말해야 합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방문을 간절히 사모합시다.
주님이 방문하시면, 거기에 빵(양식)이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빵집에서 빵을 만드는 것을 보십시오.
밀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결코 깔끔하게 정돈되거나, 말끔히 청소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을 두려워해서 그럴까요?
우리는 항상 빵집이 깔끔하고, 잘 정돈된 상태로 유지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빵을 굽지 않는 것일까요?
괜히 논란과 분쟁을 야기할만한 요소들을, 다 제거하다보니..
정작 빵이 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빵이 없이 깨끗한 빵집보다는,
좀 정돈이 되지 않은 것처럼 어수선하지만,
신선한 빵을 구워내는 빵집을 더 선호합니다.
저는 살균, 무균 상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완전 살균, 무균 상태에서는.. 다른 생명(성령)까지도 다 죽어버릴 것입니다.
약간의 세균(유산균)이 있는 곳에, 다른 생명 또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진열대에 빵이 채워지면.. 사람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룻1:6에, 나오미가, 유대에 하나님이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유대로 가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며느리 룻까지 나오미를 따라 왔습니다.
양식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가.. 양식이 풍부한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차츰 굶주린 자기 친구들도 여럿 데려왔을 것입니다.
집에 양식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미국의 교회들을 보면,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교회에 오기만 하면,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그 광고를 보고, 교회에 와 보면,
굶주리기는.. 이전과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나오미를 따라온 룻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은, '그 곳에 양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양식이 있으면'
장차 미래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윗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그곳에서 <씨앗>처럼 잉태될 것입니다.
저희 집 근처에는 빵집이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지나칠 때면, 그 향기 때문에.. 늘 그 곳에 가서 빵을 사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빵이 가득 차서, 빵 냄새가 사방에 풍기는, 그런 빵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저 우리는 '메뉴판'만 바꿔끼우는, 그런 빵집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신제품이 출시되었다는데, 막상 가 보면.. 먹을 게 없습니다.
당신은 빵을 구울 능력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방문하십니까? 1:6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빵집이 크고 웅장하다고.. 거기에 들어가 봅니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의 빵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서 나오는 수가 많습니다.
물론 빵집 건물이 크고 웅장한 것은, 좋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파는 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운데 <빵>이 없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물질적인 부유함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부유함, 그 가짜 만족감/포만감이
진정한 영적인 갈급함, 배고픔을.. 잠시 잊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물질적인 부유함으로,
교회의 첨탑을 더 높이 올리고, 웅장한 빵집을 건축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고 도취하여, 실제로 정작 중요한 <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있기는 합니다.)
오늘날 물질적 가난함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불행을 안겨다 주지만
오늘날 물질적 부요함은..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앗아가고, 영원한 불행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큰 위협일까요?
▲과거에 한 때 여러분은, 기근이 심해서,
고향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까? 그래서 이방 땅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이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오실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빵 굽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지.. 잘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방문하는 그곳에는.. 풍성한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방문과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그래서 생명의 양식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관련글/마지막 한 단어까지 죽여야 들린다
...............................
◑메시아를 기대하면서도 못 만났던 사람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소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포즈로 몸을 앞뒤 방향으로 흔들며,
‘오 메시아를 보내주소서!’ 라며..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동안,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그 성전 곁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리는, 성전 앞에서 약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직원 한 명에게
‘나가서 밖에 무슨 소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직원이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소문으로 들어왔던 지배층에 반란을 꾸미는 자가, 여기 왔습니다.’
즉시로 대제사장의 표정에 비쳤을 불쾌함이 상상이 갑니다.
‘지금 우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저 친구들이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며, 우리 기도를 방해하고 있구나, 몹쓸 것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비슷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익히 알고 있던 찬송가’를 습관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이런 것입니다. ‘오 주여, 영광스럽게 다시 오소서!’
그런데 그 시간에, 실제로 주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씀하셔도.. 우리는 전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고 있으면서도,
그 주님, 그 임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전 안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며 기도하던 대제사장처럼 말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동안,
주님이 아무리 우리를 노크에도,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니까,
우리 교회당을 패스해서 지나가 버리실까봐.. 정말 걱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형식이나 틀 안에서
임재하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2천 년 전에 주님이
백마를 타시고, 전신갑주를 두르시고, 번쩍번쩍 빛나는 검을 들고 나타나셨다면,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금방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시고 초라하게
낮은 자리로 오셨을 때,
사람들은.. 진짜 오신 메시아를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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