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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치유사역에 관한 신학적 소고 P1

LNCK 2011. 10. 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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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사역에 관한 신학적 소고 P1                        P2         P3                 스크랩, 정리

     

치유사역을 신학적으로 한 번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치유사역은 우리가 보통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또 사도행전에도 사도들의 행적 가운데 치유사역이 나타납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기도해서, 그들의 병을 낫게 해 주었다, 기적적으로 고쳐주었다..

그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반드시 인정하지만

그런데 그런 측면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병자들을 치유해 주는 그것만 <치유사역의 의미>가 아니고

좀 더 다른, 영적이고,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마태, 마가복음, 사도행전 등이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병자들을 치료한 그 시점에, 바로 그 해에

일기처럼, 다이어리처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서, 최초로 복음서나 사도행전이 쓰여진 시점이

30년 지나서입니다.

 

그러니까 약 30년 이전의, 과거의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사도들의 치유사역을

회고해 보면서, 거기에는 병자들을 그저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라는 그 의미 이상의

어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다 봐야 됩니다.

 

1) 하나는, 병자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기도로 부탁해서 치유해 달라고 하는

그런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그런 신유사역이 있고,

 

2) 그것 말고도, 성경에 기록된 바 신유사역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 병을 짊어지셨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목적 중 하나는, 십자가에서 우리 질병을 다 치료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     마8:14~17       출처, 정리

 

 

▲병과 자기를 분리해서 생각하다.

아프리카에 이상한 종족이 있습니다.

이 종족은 열병이 걸리면  

‘열병 귀신’이 자기에게 계속 다가온다고 여겨서

그 ‘열병 귀신’을 피하느라, 열병에 걸린 사람이 들판을 막 뛰어다닌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런 개념을 잠시 빌려와서, 본문을 해석해 봅니다.

즉, ‘병’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켜서 보는 관점입니다.

 

▲본문 설명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계신 모습을 보시고

열병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그 집에 계시는 동안에

그 동네에 많은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들이 다 모여와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다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이하게 생각할 점은

이렇게 예수님의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신 사역 끝에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take, 병을 짊어지셨다 carry’ 라고 얘기해요. 마8:17, 사53:4 

                          *‘연약함’을 공동번역은 ‘허약함’으로 번역함. 좋은 번역이라 봅니다.

 

질병을.. 마치 무슨 ‘짐’이나 ‘자루’를 짊어지듯이,

예수님이 우리 연약함과 질병을, 내 몸에서 떼 내서,

자기 등에 짊어지고 치워버리셨다 take, carry 라는 겁니다.

 

우리는 종종 <질병과 나>를

‘뗄 수 없는 하나’로 보고 있는데,

 

원래 ‘내’가 있고  (이건 정상인이나 환자의 차이가 없이 똑같습니다.)

거기에 장애우나 환자는 ‘질병의 짐’이 하나 더 붙은 것인데,

예수님이 그걸 치워주셨다는 겁니다.

 

▲더 세밀하게 보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다는 말과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해주셨다는 말은 다릅니다.

 

물론 ‘담당하다/가져가다 take, carry’라는 말이

‘치료해주다’는 말과 동일하게 쓰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맡아주셨다. 치워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질병을 ‘예수님께 맡겼다’는 말입니다.

‘꼭 우리가 나았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16절에는, ‘예수님이 병자를 다 고쳐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마8:17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take, 병을 짊어지셨다 carry’라는

이사야 53:4에 예언된 말씀을 살피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의 질병을 다 고치셨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두 다 고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take, 병을 짊어지십니다 carry’

  이 말씀은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1) 신학용어로 "already not yet (이미, 아직)"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마귀를 멸하셨지만, 아직 마귀는 살아있죠.

그러나 마귀는 이미 십자가에서 치명적인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뱀이나 도마뱀이 머리가 잘려도, 꼬리가 살아서 퍼드덕 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질병도 "이미, 아직"처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53:3절 예언을 성취하셨고, 그걸 마태가 인용했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나 질병과 불치병이 있는 현실은 뭡니까?

이미 다 치료하셨지만, 아직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천국에 가면, 완전히 치료될 것이고

또한 영원에서 영원을 사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다 치료 받은 것입니다.

 

가끔 영화에, 불치병 환자가 기적적으로 침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 영화의 끝을 다 보고 계십니다. 영원을 사시니까요! 그래서 '너희는 다 나았다!'고 하십니다.

영화속의 주인공, 그 환자는, 영화 속에서 아직 침대에 전신불수로 누워 있습니다.

아직 영화가 끝이 안 나고 중간 쯤 지나고 있거든요. 그러나 영화감독은 그 환자 걱정 안 합니다. 

다 나은 끝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감기에 걸려서, 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빨리 낫는 사람은 세 시간 만에, 천천히 낫는 사람은 사흘 지나서,
아주 느리게 낫는 사람은 두 주간 지나서 낫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질병을 다 치유해 주셨지만,

빨리 낫는 사람이 있고, 

몇 년 있다가 낫는 사람이 있고,

아주 느리게.. 저 천국에 가서 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낫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의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나은 것입니다.

다 치료 받은 것입니다. 마8:17, 사53:4 

 

공생애 때,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때는,

아마 제자들이 그 '신학적 의미, 즉 영원의 관점'에서 그걸 못 봤을 겁니다.

그저 병자가 불쌍해서 고쳐주신 면만,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서, 사도들이 복음서를 쓸 때는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마8:17, 사53:4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신학적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병’을 나에게서 분리해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내 몸에 병이 걸리면 ‘내가 병에 걸렸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병과 자기를 일치시킵니다.

 

그런데 마8:17만 놓고 보면,

내 질병을 나로부터 따로 분리해서 담당하시고 짊어지신다는 얘깁니다.

앞서 말씀드린, 아프리카 사람들의 열병 개념을 연상해 보세요.

 

자, 내가 질병에 걸려서 휠체어를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태가 보는 것은,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은

 

그 소아마비 걸린 자기의 몸을 마음이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환자가 주님께 나와서

‘고쳐주세요, 고쳐주세요’ 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지금 마태가 느끼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면,

승천하신 주님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온 세계의 모든 사람 옆에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점에서 마태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소아마비가 걸려서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는 내 몸으로부터

내 마음이 분리가 될 것을 마태는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하자면,

장애우나 비장애우나,

암환자나 건강한 사람이나,

어떤 고유한 인격, 그 인격체, 그 사람 자체는.. 똑같다는 겁니다.

 

다만, 장애우나 암환자는..

‘질병’이란 짐을 하나 더 달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그 짐을 맡겨버리기만 하면,

(예수님은 원래 그 짐을 담당하시고, 짊어지시는 분이시니까.. )

정상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아직 완전히 쾌유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마음/영혼/인격적으로는.. 정상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장애우나 암환자가

‘자기가 정상인과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기 질병=자기 존재’와 연결해서 보기 때문인데,

두 개를 따로 떼서 보라는 것입니다.

 

두 개를 따로 떼서 보면,

장애우(환자)와 정상인과

‘인격체 자체’는 똑같고요,

 

더욱이 장애우/환자가 자기 질병을 떼서

예수님께 맡겨버렸다면

지금 자신이 장애우/환자라도.. 정상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

 

우리는 이렇게 착각합니다.

병이 나면.. 자기 병든 몸을 이끌고 주님께 나와서

주님께 ‘내 병든 몸을 고쳐주세요’ 기도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태가 승천하신 주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병든 몸으로라도 내 병든 몸을 먼저 앞세우는 게 아니라

당연히 주님과 연합하는 게 먼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와 연합하게 될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병든 내 몸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상태에서,

내 몸이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연합되었고,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허약함과 질병을 짊어져 주시는 겁니다. 마8:17, 사53:4

 

     내가 병들었을 때 주님께 나와서 ‘병 고쳐주세요’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직도 내 몸에 매여 있다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께 맡겨져 있습니다?)

 

     이 말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을 따르는 자’라고 얘기를 해요.

 

이제는 주님께서 내 몸을 장악하시고 (이미 맡겨져 있습니다?)

질병이 있는 몸이,

주님께서 그 몸을 담당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모든 걸 할 수 있고

주님께서 휠체어에서 일으키실 수도 있고

그건 주님의 소원에 따른다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에

내 몸이 아프다고 내 몸에 대한 나의 소원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마태는 십자가를 보면서 (부활 후에)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 기적들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병든 몸으로서 병든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주님과 연합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마음과 몸이 분리되면서

마음은 주님을 섬기게 되고 주님만 바라보게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좌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타운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럴 때 병든 나의 몸, 이 몸은 주님께서 맡으셔서

낫게 하시려면 낫게 하실 것이고,

사도바울처럼 육체에 가시가 박힌 상태로도

로마를 뒤집어엎는 복음의 사역을 일으키시려면 일으키실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수많은 장애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밝게, 누구보다도 큰일을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휠체어에 앉아서도, 나라와 세계를 구할 수도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짊어지심, 하나님의 담당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적용

그러므로 여러분, 병이 들잖아요?

그러면 득달 같이 병원에 가시기 전에, 그렇게 급한 건 아니잖아요?

한 시간, 두 시간, 하루 이틀 기도 못합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십자가에 매어달려 함께 연합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십자가를 거쳐서 천국으로 들어가서

병든 몸으로부터 내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연약한 몸, 병든 몸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이 몸의 상태가 곧 ‘나’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이 없고,

휠체어에 앉았다고 못할 일이 없고 지금 병에 걸렸다고 못할 일이 없어요.

(또, 건강하다고 모든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거치면서 건강한 몸이건/병든 몸이건.. 다 분리되는 겁니다.

 

이지선 양이 그렇게 예뻤던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밝게 살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몸으로부터 분리되니까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가 그 자매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 몸을 나’라고 생각해서는 살 수가 없지요.

 

주님의 십자가는 이 몸으로부터 마음을 분리시켜 줍니다, 해방시켜 줍니다.

그리고 몸의 종노릇 하던 이 마음은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바꿔줍니다,

 

그러면 내 몸은 주님께서 장악하셔서.. 필요하면 낫게 하시고,

또 장애인으로 살게 되더라도 -주님 뜻이 그럴 수도 있죠-

장애인이기 때문에 못할 일은, 이 세상천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착각이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착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셨다’가 아니라 ‘연약함을 담당하셨다(짊어지셨다)’

그 연약함은 마음의 연약함이 아니고 몸의 연약함 입니다. 질병입니다.

 

      그리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

 

여러분, 병들면 ‘나와서 주님께 기도하자’ ‘병 고침을 얻기 위해 기도하자’

그 전에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통과하게 되면

내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있어요.

 

주님이 짊어지시고 담당하신다는 것은

내가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자는 게 아니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병고침을 받는 모든 사건들을

거기서 복음적 의미를 찾아 해석을 해나가는 것이

마태복음과 4복음서 전체의 내용입니다.)

 

기도/ 어떤 육체의 연약함과 질병이 발생할지라도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됨으로써

 

이 몸이 병원에 가서 낫든지, 식이요법으로 낫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이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내 병을 짊어지시는

한 방편으로서만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우리 마음은 몸에서 열병에서 떠나

오직 마음으로 승천하신 주님 곁에 가있는 것으로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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