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1

내가 안 원해도 빚진 자

LNCK 2011. 11. 25. 20:09

 

◈내가 안 원해도 빚진 자          롬1:14           11.03.20.설교일부녹취



도입 예화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인가?


10년 전에,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집어서 읽다가

한 2시간 만에, 저자후기까지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그 소설 속의 주인공 베로니카는

세상 삶에 권태를 느껴서, 자살을 시도했던 젊은 여자였다.

그런데 그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정신병원에 갇혀 버린다.


그런데 일전에 다량의 수면제 복용(자살시도)으로 인한 심장질환이 생겨서,

겨우 1주일만 살 수 있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만다.


바로 그 기간 동안에, 베로니카는,

세상으로부터 ‘비정상’이란 진단을 받고, 외롭게 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소위 ‘미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


어느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한 마법사가

모든 백성들이 물을 길어먹는 우물에다, 묘약을 풀었다.

그래서 그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 미쳐버렸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날마다 물을 마시니까,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미쳐버렸다.


그런데 왕과 그 가족은, 왕실의 우물을 따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 미치지 않았다.


제 정신인 왕은, 백성들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서

‘공중위생에 관한 일련의 조치’를 담은 칙령을 내린다.


그런데, 모든 백성들이 그 우물물을 마시고, 이미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하야 시위를 한다.


왕은 쓸쓸이 왕위를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왕비가 왕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도 우물로 가서, 그 물을 마십시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 질 것입니다.’


왕은, 왕비의 지혜에 감탄하면서,

얼른 가서, 그 우물물을, 왕비와 함께 마신다.


그래서 왕도, 백성들과 같이 미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왕은, 죽는 날까지, 그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베로니카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 제드카에게

‘당신은 미친 것 같지 않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제드카는 말한다.

‘아냐, 난 미쳤어.

베로니카, 저 정신병원 담장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


베로니카는, 제드카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마법사가 묘약을 탄) 같은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죠!’


제드카가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 담장 밖 사람들을 다 정상이라고 믿지.

그래서 나도 그 우물물을 마신 척 하고 살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는, 그들과 다른 미친 사람으로 살 거야!’


제드카는, 그들이 미쳤다고 하는 그런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 우물물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정신병원에 계속 있겠다는 것이다.


정신병원 울타리 바깥의 사람들이

마법의 우물물을 마신 ‘미친 사람들’임을 아는 제드카는,

그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자신이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은 삶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작가 코엘료는, 그 소설에서 끊임없이

‘누가 진짜 미친 사람이냐?’를 묻고 있다.


여러분이 그 소설 내용을 생각해 볼 때,

그 ‘마법의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 가득한 그 세상에서

그들로부터 비정상이란 진단을 받고서,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사람이..

진짜 미친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마법의 우물물’을 마시고,               *이를테면 맘몬주의, 세속주의 

모두 다 힘과 부귀라는 것에 미쳐있는 정신병원 바깥의 사람들이..

정상인이라는 그들이.. 진짜 미친 사람들인가?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소설과 똑같이,

자기들 스스로 정해놓은 선악구조 또는 어떤 세상적 가치 기준을 두고서,

그 자기들의 기준에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내고 있다.


‘정상’에 속했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세상적 잣대와 힘으로.. 누군가를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를 당하고,


그것을 작가는, 마치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존재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바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속성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그 ‘정상’의 범주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즉 '비정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들의 전 인생을 건다.


아담 안에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 중에

그러한 세상적 삶의 공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러한 세상적 삶의 공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들은, 정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들’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공식과 정반대인, 성경적 공식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치 정신병원에 갇혀 버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두고서

거룩 또는 구별됨이라 말한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다. 그 모든 영광과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비록 세상의 ‘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는 ‘비정상’이라는 말을 듣겠지만!


그러한 상태를 사도 바울은 본문 롬1:14에서

빚진 자’라는 단어로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빚진 자’ 의식으로 사는 성도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


사도바울은 자기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그야말로 정신병원에 갇히기에 딱 적합한 표현이다.


아니, 자기가 무슨 빚을 졌기에 ‘빚진 자’라는 것인가?

그러나 바울의 말을 뒤집어 보면,

‘빚진 자 의식’이 없는 여러분이 비정상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법정에서 갚을 의무가 있는 죄인으로 판결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채무상환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면, 잡혀 가야되는 사람이다.


즉,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을 할 의무나 필연성에 묶여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모든 성도가 그렇다(빚진 자)라는 것이다.

성도는 아무렇게나 막 살게 되어 있지 않다.


반드시 뭘 해결해야 하는 어떤 의무나 필연성에 묶여 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누구에게인가 갚아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다.

‘복음에 빚진 자’니까!



◑성도는 그 빚진 자의 삶을 반드시 살아내게 되어 있다←하이라이트


성도 속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밖에서 띠를 띠우고 어떤 저항 할 수 없는 힘이, 성도를 끌고 간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빚진 자로 사는 것은.. 힘이 든다.

마치 거꾸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연어 떼들처럼

그들은 사투가 시작된다. 그게 성도의 삶이다.


서두에 코엘료의 소설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그 성도의 삶은 한 마디로 ‘비정상, 정신병자’의 삶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삶을, 영생을 얻기에 치러야 하는 마땅한 대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이 미친 세상의 허무함과 덧없음의 실체를 살아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투의 현장에서

성령의 은혜로, 소망으로 말미암아.. 기쁘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한다.


그렇게 ‘빚진 자’로서 (진짜 갚아야 될 빚이 없는데도)

기쁘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욱 진짜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복음에 빚진 자’

이 말은 단순히 ‘전도해라 선교해라’는 권고의 말이 아니다.

복음을 선물 받은 모든 성도의 삶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복음은 말이나 글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의 삶으로 녹아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의 삶을 보면, ‘아 저게 복음이지!’ 하고 알 수 있다.


그러한 성도의 삶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

사도바울이 그러한 성도의 현실을 어떻게까지 표현하는지 다른 구절을 보시라.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여기서 ‘부득불’이란 말에는 강제, 강압의 의미가 담겨있다.        *헬 아낙케

누가 성도를 띠 띠우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설교문 제목이 ‘내가 안 원해도 빚진 자’이다.

    원하든/원하지 않든.. 성도는 복음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일종의 운명이다.


거기에 더 보태서, 한 술 더 떠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는 어구는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했을 때 그 말이다. 사6:5


‘화로다’ 라는 탄식은

망자가 지옥문 앞에서 터트리는 비명이다.

‘어 이거 큰 일났네, 나 지금 지옥에 떨어지네!’ 하는 그 소리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는 표현이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탄식하며 외치는 소리로.. 매우 심각한 탄식이란 뜻이다.


-‘빚진 자’의식으로 복음을 전하든지

-혹은 ‘강제로 주어지는 그 복음 전파의 현실’속에서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는 두려움을 갖고서라도

성도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복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것을 입술로/자기 삶으로 살아내게 되어있는데,

즉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만일 그 것이 내 속에서 터져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지옥갈 사람이 분명해'(화로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만큼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성도의 삶은 필연성과 당위성을 갖고 있다.


주님도 똑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되리라이다. 여기에 주목하시라.

네 의지로 되어라가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성도가 ‘증인’이 되는 삶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게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 내시는 분이시다. 

성도는 빚진 자의 삶, 즉 증인의 삶을

반드시 필연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구절에서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디오코’인데

‘어떤 강압과 강제적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쫓겨서 도망가는 것’을 뜻한다.


지금 예수님이 가르치신 ‘성도의 운명’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복음전파 방식이다.

기독교 복음은, 어떤 성공하고, 부자되어서, 그 힘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인간의 생각이고)

핍박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쫓겨가는 가운데..

‘뒤집기’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이게 성경적 가르침이다.)


사도행전만 보더라도,

그렇게 쫓겨가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행8:1


사도바울의 복음전파 사역은,

자기가 원해서 어느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기 보다는,

계속 수동태로 쫓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


그렇다면 그 빚진 자의 삶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

그에게서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살펴봐도 똑같은 얘기다.

목사는.. 같은 마네킹(복음)에다가 매주 다른 옷을 입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된다.


언젠가 제가 다른 마네킹을 갖고 오면, 여러분은 반드시 저를 배척하셔야 한다.

복음은 똑같은 마네킹이다.

‘왜 맨날 똑같은 얘기냐?’ 하고 불평하지 마시라는 것이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전 척량  (0) 2011.11.27
배에는 쓴 복음  (0) 2011.11.26
성화도.. 이루어진 사실  (0) 2011.11.24
예수님의 대헌장 선언  (0) 2011.11.23
이미 이루어진 사실  (0) 2011.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