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는 쓴 복음 계10:9~11, 11:3 11.03.20.설교일부녹취 25'~35'
☞지난 호 내가 안 원해도 빚진 자에 연속으로 이어지는 설교문
지난 호에서 바울의 <빚진 자>는, 사도 요한식 버전으로 말하면 <두 증인>이다.
둘 다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같은 개념이다.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복음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사도 요한은, <작은 두루마리>를 먹는다.
이 책은 복음이 적힌 말씀이다.
그 책이 입에서는 달콤한 데, 배에서는 쓰다.
이 말은, 그들이 받아먹을 때는 달콤하던 말씀이 믿으면 구원을 주신다니까!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기 시작할 때, 즉 몸으로 복음을 살아내게 될 때는
쓰디쓴 일로 화하여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복음을 받으면.. 몸에는 쓴 이유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도 ‘내 멍에’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셨다.
또한 ‘핍박을 받게 될 것’도 종종 말씀하셨다...
그래서 복음이 달콤한 것만 아니라.. 쓴 맛도 있는 것이다.
복음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너를 성전삼고, 너희 가운데 거하여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이다.
얼핏 들으면 너무 달콤하다.
쓰디쓴 면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은 일면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소화가 되면서
실제로 크리스천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다보면.. 고통스런 현실에 부딪힌다.
왜 그런가?
계시록은 구약의 여러 내용들을 짜깁기 한 것이다.
그것을 세상 역사, 사건, 사람을 대입해서 풀면 안 된다.
계시록은, 구약의 내용들을 가져다가
거기에 빗대어서 뭔가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문의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 쓴 복음’도 마찬가지다.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지금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데,
그 메시지의 내용은,
구약의 에스겔2장의 ‘에스겔이 받아먹은 책’ 내용과
딱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 2장 내용을 빗대어서,
지금 계시록 본문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 쓴 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10:9의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복음’을 이해하려면,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에스겔 2장을 풀어보면 된다.
▲에스겔이 받아먹은 두루마리
겔2:8~10 인자야 ..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겔3:2~3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이 받아먹은 책에는, 애가, 애곡,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계10:8에, 배에는 쓰디쓴 것이었다.)
▲1. 내부적으로 쓴 복음
왜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애가, 애곡 재앙인가? ←하이라이트
복음,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자아 숭배와, 자기 바벨탑을
우상처럼 떠받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다 죽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애가, 애곡, 재앙이 있는 사람만.. 구원 받는 다는 것이다.
즉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만.. 영생 얻는다는 것이다. 복음이 한 마디로 그렇다.
구원은 달콤하지만, 애가, 애곡, 재앙은.. 쓴 것이다.
이것은 두 증인(복음 전하는 정체성을 가진, 크리스천)부터 먼저 적용된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다.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그래서 이 세상에서 ‘증인’으로 살게끔 되어있는 ☞ 내가 안 원해도 빚진 자
신실한 크리스천은,
자기부터 먼저 자기 배가 쓰게 되는 것이다.
에스겔서의 표현으로는 애가, 애곡, 재앙이 닥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복음의 말씀(책)을 먹은 자는,
자기 옛 자아가 곡소리 나는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실제로 자기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회개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사람에게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곡성’이라면,
외부적으로 얻게 되는 ‘곡성’도 있는데, 그것은 ‘핍박’이다.
안팎으로 애가, 애곡, 재앙인 것이다.
▲2. 외부적으로 쓴 bitter 복음 (전도자가 겪는 외부적 핍박)
‘세상아, 너네는 구원/영생 얻으려면 다 죽어야 해.
자기 자아, 자존심, 자기 성공.. 이런 것 다 내려놓아야 해.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해.
그게 어렵지만, 거기에 참 행복의 삶, 복음의 삶이 있어!’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역시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나에게 대한다. 나에게 핍박을 가한다.
그래서 계10:9절이 성취되는 것이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멀쩡하게 자신들이 정상이며, 훌륭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회개하라는) 복음을 전하게 되면,
즉,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곡소리 나는 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단골로 늘 전했던 말씀이다.
그 말씀을 전하면,
세상이 그걸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쓴 맛을 보여주겠다!’고 나온다.
그래서 두 증인이 복음을 받으면, 그게 구원의 ‘달콤한’ 소식이지만
먼저 전도자 자기들 배부터 ‘쓰게 bitter’ 되는 것이다. 핍박을 받아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린다.
‘예수께서 완료해 놓으신 십자가와 그 은혜만을 붙드는 것이
인류가 살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멸망의 불바다, 그 재앙의 불바다에 던져져서
애가와 애곡을 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복음을 전하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너 미쳤니? 세상에 문명이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 우리가 발전하고 잘 사는 것을, 시샘하는구나!’
정리하면,
크리스천은 말과 삶으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살게 되어있는 운명을 타고 났는데,
그게 ‘배에서 쓴 복음’처럼..
내부적으로는.. 자기가 먼저 회개의 과정을 거치면서 ‘쓴 맛’을 보게 되고,
외부적으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할 때 받는 핍박을 통해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달콤한 소식’이지만,
그게 달콤하지만 않고, ‘배에는 쓴 맛’인 것이다. (양면을 균형있게 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두 세력의 싸움이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다. (내부적 쓴 맛)
그래서 올바른 복음을 받아먹게 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혼돈이다.
도대체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자신이 살아가야하는지..
그게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으니까,
내 육신의 법은, 세상 이치와 똑 같아서 별 불편이 없는데,
그것과 정반대 이치인 복음이 들어오니까..
내 속에서 불편과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복음을 받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도 할 수 없다. 구원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점점 살아계신 말씀에 의해서
내 육신이 점점 복음으로 점령을 당한다. 성화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옛 자아가 모든 통증/신경이 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
뽑히고, 무너짐을 당한다. 그러니까 고통스럽다. (위에서 '내면적으로 쓴 복음'으로 설명했다.)
여태껏 살아온 게 맞는 줄 알았는데
말씀/복음이 그것을 다 부인해 버렸으니까,
다 부수고 들어와 버리니까
그의 삶속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딜레마
불신자는 편안하게 사는데, 자기는 죽도록 고생만 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배에는 쓴 복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시73:1~4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14 (그런데)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나님,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만 삽니까?
죽을 때도 저렇게 편안히 죽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봅니다.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런 회개와 성화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본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배에는 쓴 복음’을 제대로 먹은 사람은
영생과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욥의 딜레마
욥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욥은 ‘이렇게 앙상한 뼈로 사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한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1
즉 ‘욥은 의인이다’에서 출발했는데,
그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은 욥을 벌거벗겨버리신다.
(욥이 ‘배에는 쓴 복음’을 제대로 먹었기 때문이다.)
욥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살기 싫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라고 호소한다.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분초)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아침마다 권징examine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놔 두지 않으시고, 욥을 쫓아다니시면서 단련하셨다.
하나님이 욥을 도와주셨다는 게 아니라 때린데 또 때리신 것이다.
쉴 틈을 안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시편 기자와 욥의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의 현실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채워지고 있다. ‘배에는 쓴 복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게 자기 육적 자아의 해체 과정이며,
‘(입에는 달콤한) 구원의 복음’을 얻기 위한.. 필수 코스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웬만하면 차라리 ‘안 믿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다. 구원/영생/천국을 얻어야 하니까!
▲뿐만 아니라 성도는,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을 당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육신, 역사,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빨리 빠져나가야 할 곳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애가, 애곡, 재앙의 삶을 체험케 하신다.
그렇게 ‘배에는 쓴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의 삶속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
그 전쟁에서 새사람이 승리를 하면 할수록
이 육신과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할 것으로 깊이 자각하게 된다.
그때는 내 자아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시도들이 줄어들게 된다.
이것은 죽어야 할 거고, 이미 죽은 것인데,
여기다 금칠 해봐야.. 그것은 이집트 미라에 화장하는 것과 똑같다.
▲그걸 (미라에 화장하지 말라고) 전하는 게 전도다.
그때 그 복음을 듣는 세상 사람들이, 전도하는 성도를 미친사람 취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울료의 소설 <베로니카.. >속의 어떤 이처럼
‘나도 우물물을 마신 사람처럼, 연극하면서 그냥 살거야’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놔두시지도 않는다.
세상이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인 것처럼,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고립시키시고, 소외시키신다.
세상 전체가 죄로 인해 타락한 암 덩어리와 같다.
그 가운데서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거기에서 꽁꽁 묶어서 고립, 구별해 버려야 된다.
그래서 여러분, 외로우셔야 한다.
그런 고립과 소외를 경엄한 자만이 여기에서 살아날 수 있다.
‘아 나는 고립당했다!’는 마음이 신앙생활을 통하여 안 드는 사람은.. 어쩌면 가짜이다.
이것이 바로 ‘빚진자, 혹은 두 증인’의 삶이다.
◑두 증인이 베옷을 입은 이유
계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옛 성전은 무너져야
그래서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에서 다시 예언한다. *계11:1~3 정황상 성전
성전은 옛 성전인데, 구약의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방식을 가르치는 본거지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구약적 신앙은, 다 꽝이기 때문에, 다시 전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신약의 복음을) 예언해야 한다...
계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베옷을 입은 이유
그 성전에서, 두 증인은 베옷을 입는데, 베옷은 장례식장에서 입는 옷이다.
그걸 입고, 애곡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기분 좋게 해서, 여기에 꼭 붙들어 놓게 할까?
그들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줘서, 어떻게 하면 야~ 우리도 괜찮은 존재구나!
이런 자존감 회복에 도움을 줄까?’ .. 할 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죽은 겁니다.
여러분은 애통, 애곡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안 그러고 육신대로 살면 재앙이 일어납니다.’
이런 내용이 다 ‘베옷’을 입고, ‘장례식 분위기’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여러분은 복음을 다시 들어셔야 한다.
지금까지 들었던 것 위에 다시 복음을 들으셔야 한다. 계10:11
▲1260일을 예언하리라
1260일은 42달인데,
이스라엘은 42년 광야생활로 상징되는.. 역사와 인생 전체의 기간이다.
혹은 예수 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인류의 전 역사 속에 던져지게 될 하나님의 증인들은
그 옛 성전, 즉 인간의 가능성을 고수하려고 하는 아담 후손들의 세상속에서
새 언약의 현실, 즉 은혜의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자기 인생과 세상 업적을 고수하고 수호하겠다는 것이.. 세상 아담의 후예들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고 부수는 이들이.. 복음의 증인들이다.
한 마디로 그들의 역사에 초를 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증인인 크리스천들이, 즉 옛 성전인 이 세상 속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것이다. ‘너네들은 다 죽은 거야..’
▲(굵은 베옷을 입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다.
여러분 왜 성경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한 번도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는지 생각해 보셨는가?
예수님은 이 죽은 자들의 세상 속에서, 차마 웃으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굵은 베옷을 입고 초상집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웃으시겠는가!
혹자는 '아니다 예수님도 웃으셨을 것이다.
다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아서 그렇지.. 반드시 웃으셨을 것이다..' 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굵은 베옷을 입고, 다 죽어있는 이 세상역사라는 무덤 속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보시고 웃으셨겠는가!
예수님은 반대로 주로 우셨다. 세상이 ‘초상집’이기 때문에 그렇다.
성도는 그렇게 예수님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뭐 대단히 기쁜 거리를 점점 찾아낼 수 없어야 한다.
‘여기는 초상집 맞구나!’ 해야 한다.
그래서 소설속의 베로니카처럼, 이 세상이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임을 알고,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한다. (위에서 욥처럼!) 단, 자살은 안 됨.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실제로 정신병원에 3번이나 들어간 경험이 있다고 한다.
거기서 이 사람은 ‘세상이 미쳤구나’를 안 것이다.
그래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소설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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