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대헌장 선언 마12:1~8 출처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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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 본문의 키워드는 <성전 안에서>입니다.
다윗이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자기가 먹고
자기와 함께 사람들이 먹은 사건의 이야기를 들추어내십니다.
이 진설병 먹는 이야기를 들추어내신 이유는,
<성전 안에서>는 그것이 ‘위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12:4
지금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 가지고 비벼서 먹었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께 시비가 접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예를 하나 더 드십니다.
‘너희는 지금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맞다.
그러나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있다.
그건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12:5
(바리새인의 답이 성경에 안 나오지만, ‘그 말은 맞습니다.’)
안식일에 아무리 일을 갑절로 많이 하더라도,
<성전 안에서> 하는 일은.. 위반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그러므로 제자들이
안식일날 밀을 타작하고, 추수해(비벼)서 먹었다 하더라도 *먹은 것은 위반이 아니고요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또는 성전 보다 크신 예수님 안에서> 행한 일이므로
그것은 ‘안식일 규례 위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안식일의 의미>가 어떻게 변했느냐하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입장으로 안식일이 바뀐 겁니다.
*구약의 안식일
며느리가.. 부모님께서 멀리 따로 살고 계시고
명절(안식일) 때가 되어서만.. 부모님을 찾아 갑니다.
내가 서울에서 벌려 놓고 있는 모든 삶의 현장의 일은, 다 접고
시골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신약의 안식일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뒤에 안식일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면,
부모님을 항상 모시고 사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자, 고약한 시누이가 있는데, 바리새인에 비유
시누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막 화를 냅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집에 놔두고, 혼자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는구나!’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며느리가 집을 나가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계절이 바뀌면서 겨울에 부모님이 입으실 내복과 외투를 사기 위해서
시장에 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비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모든 행동은
시어머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집을 비워도 시어머니 때문이 집을 비운 것이에요.
시어머니께 밥을 제때 못 드려도
시어머니 옷 사느라, 지금 나가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논리가 그대로 ‘안식일 논쟁’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서울 일을 다 접고, 시골에 내려가는 며느리와 같고,
신약의 안식일은, 서울에서 시어머니를 24시간 모시고 사는 며느리와 같습니다.
그가 집에 있을 때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며,
그가 집을 비울 때도..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
<시어머니 곁에 꼭 붙어 있어야, 시어머니를 잘 모신다>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시어머니 안식일 규정 에 대해 자유하면서도, 시어머니를 더 잘 모신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안식일의 의미는 뭐에요?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 노동을 중단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내 마음이 완전히 죽는다는 걸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장들이 안식일 날 노동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까?
-제사장의 <성전 안에서> 노동은.. 그게 하나님께 예배고,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안식일의 주인이요,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께> 적용하면
이제는 1주일 내내, 1년 365일이 ‘안식일’인 셈입니다. 예수님이 늘 제자들과 함께 계시니까요.
그래서 ‘시부모 모시고 사는 며느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명절 때 한 번 시골 내려가는 며느리가 아니라요.
▲이제는 안식일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매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고요.
매일이 독립한 날이지만, 그래도 광복절을 지키잖아요.)
내가 삶의 현장에서는
내 가족을 위해 살고, 내 사업을 번성하기 위해 살고 행동합니다만,
이제 신약시대는,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동행하시므로,
매일 매시간을 안식일을 지키듯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6일동안 하나님과 완전히 떨어져 있고, 잊어버리고 살다가,
안식일에만 딱 성전에 나와서, 제사드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는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성전보다 크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므로,
늘 24시간이.. 예배하는 시간이요,
매일이.. 예배하는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찾아가기 위해
명절 때 서울에서의 삶을 접고 찾아 갔지마는
이제는 그 부모님께서 서울로 와서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다 부모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태라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며느리가 바깥에 함부로 외출을 하더라도,
이게 다 부모님과 연관되어 있어서, 시부모님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불효(안식일을 범하는 게)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12:8, 자, 그래서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안식은 어떻게 얻었냐 하면,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돈 때문에 걱정도 하고,
건강이나 자녀 문제로 속이 썩다가도..
안식일에는 그 세상 문제들을 다 끊어내는 겁니다.
노동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세상에 대해 단절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만으로 만족함을 느끼고,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느끼고...
그래서 시편 37편에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래서 여호와가 기쁜 상태에서 세상에 나가서 살아라.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그거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심을 통해서 신약의 안식은
그렇게 일주일에 하루만 하나님만이 기쁨의 이유가 되고
하나님만이 만족의 이유가 되었던 그러한 안식의 상태가,
늘상 계속 이루어지는 거예요.
시장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상업행위가 그 이전에는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내가 잘살기 위해서 장사하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아, 이게 장사에 미쳐 돌아가는구나, 이제 하나님을 찾아야지’ 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매일 늘 함께 하심을 통해서
상업 자체가.. 주님 때문에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과거에는 안식일 날에만 하나님 때문에 만족했고, 기뻐했고, 평강했던 그 상태가,
이제는 시장에서 물건 팔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만족해요.
이제는 장사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에 하게 되는데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고, 적게 벌어서 슬픈 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쁜 상태가 되어버리면서.. 장사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동행해주시는 기쁨..)
▲이제 안식의 상태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에,
이전에는 구약 때는 돈을 많이 벌었을 때 기뻐하다가
안식일 되면 ‘아이쿠, 내가 돈 때문에만 기뻐하면 되냐? 돈아 내 마음에서 물러가라’
그리고 안식일 날은 하나님 때문에만 기뻐하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율법을 묵상했는데,
이제는 어떤 상황이 되었느냐?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돈이라는 상황이 내 마음에 붙기도 전에,
자식과 가정이라는 상황이
사업의 상황이 내 마음에 붙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통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 때문에 만족하고 기쁜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매시간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뭡니까?
안식의 내용은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이 뭐냐?
그 ‘안식의 내용’을 주시는 분이.. ‘안식일의 주인’ 되십니다.
즉 주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기쁘고, 만족하고, 평강하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겁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12:8
만약에 사업이 성공해야만 기쁘고 만족하다면.. 사업이 그의 안식의 주인입니다,
자식이 잘 되어야 내 마음이 기쁘고 만족하다면.. 자식이 그의 안식의 주인입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얘기는
‘내 기쁨과 내 만족과 내 평강이.. 주님만 있으면 된다’라는 의미에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얘기에요.
▲12:7, 그러면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은?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겁니다.
이제 신약시대는 날마다 안식이고, 때마다 안식이고,
언제든지 주님과 함께 안식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붙어서, 하나님 때문에만 만족할 때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 나를 통해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안식’이지만,
병자를 돌아보고, 갇힌 자를 돌아보는 ‘자비’를.. 하나님이 더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과 교제하면서 ‘안식’을 얻지만,
그 예배와 교제에서 얻은 힘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이웃에게 나타냄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더 크고, 더 완전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께 받는 은혜와 자비도.. 큰 은혜지만,
내가 남에게 베푸는 은혜와 자비도.. 베푸는 사람이 더 큰 은혜와 자비를 누립니다.
받는 사람보다요! ☞ 내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함이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인 것이지요.)※가톨릭에서 이렇게 강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미사 드리는 것과, 병자 심방하는 것을, 둘 중에 꼭 1개만 하게 된다면
차라리 병자를 심방하라는 것입니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에 의거해서요. 마12:7
▲놀라운 혁명적 선언
여러분, 이 본문은 지금 우리들에게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영국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원이 높습니다. ←설교문 제목
그 선언으로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긍정적인 충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순간 동안에
세상의 상황에 대해선 죽은 상태에서,
오직 주님과 함께 동행/교제/연합하면서,
완전히 행복하고 완전히 기쁠 수 있다고 하는 이것이.. 혁명이 아니고 뭡니까?
과거에는 오직 안식일에만 그 행복을 누렸는데,
이제는.. 매일 매 순간에.. 그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헌장 마그나카르타 입니다.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건강하건 안 하건 어떤 상황이던지 간에
완전히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로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끙끙거리던 상황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내게서 뿜어나가는 상황으로 변해간다는 겁니다.
돈 벌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비가 뿜어 나가는 그 일을 위해서 살고 있는 거예요.
회사에서든지 뭐 하든지 간에
아내를 만나 대화할 때도.. 하나님의 자비가 내게서 뿜어져 나가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안식하며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아내를 보면, 아내를 향하여 자비가 나갈 수밖에 없지요.
남편을 봐도, 하나님의 자비가 나갈 수밖에 없고,
자식을 봐도 그렇고,
회사에 그 사장님을 봐도,
십자가로 날마다 내가 죽으면서,
날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안식하고, 만족하게 되면,
고약한 사장을 보면서도, 그 전에는 원망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낼 대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혁명적이지 않아요? 혁명적이지요,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것을 허락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린 나 자신을 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시간 안식, 일주일 내내 안식, 일년 365일 안식.
안식의 내용은 뭡니까?
기쁨과 만족과 평강입니다.
십자가가 그걸 해 준다는 거예요.
오직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은 자다’를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기쁨, 만족, 평강이..
이것들을 한 마디로 하면 ‘안식’이.. 나에게 푹 적셔질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내게서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이 주어진 상태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마치 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장을 보러나가기 위해 집을 비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외식外食하거나 쉬는 시간도..
▲본문 마12:1~8을.. 마태가 왜 여기에 갖다 붙입니까?
바로 앞에 무슨 얘기가 있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지우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
하나님 때문에 안식하고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을 나타내며 사는 것,
그게 바로 ‘가벼운 짐’이라는 얘기지요.
하나님 아버지! 이 기가 막힌 혁명적 복음의 내용을
우리가 몇 퍼센트나 삶에서 경험하고 확인하며 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바라보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안 되어서 우리가 이 혁명적 복음의 내용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겨 주셔서,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해 주시고
24시간 약속된 안식이 내 마음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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