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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3320 아벨의 증거, 의인의 증거

LNCK 2011. 11. 30. 18:32

◈아벨의 증거, 의인의 증거 - 죽음, 환란            히11:4, 11:36~40, 요일3:12    

                                                                                          11.04.03.설교녹취 Ro#23. 28'~45'

 

◑서론/ 아벨의 제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믿음으로 그저 얻는 의


요일3: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이 말은, 아벨이 착해서 죽였다는 말이 아니라,

아벨이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는 것이.. 가인이 보기에, 꼴보기 싫었다는 뜻이다.


아벨은, 당시에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까, 당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양을 키우고 있었다.

고기는 노아 홍수 이후에 먹도록 허락되었으니까.


그때 양이란 짐승이 쓰이는 용도는,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가죽옷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벨은, 자기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그 가죽옷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인, 아벨은 어차피 당시 인간의 대표이고, 모형이다.)  

가인은 그 가죽옷과 양의 의미를 모르고,

자신의 힘과 가치를 쌓아 올리는 데만 집중하여 살았던 자로서 모형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저주하시면서 ‘네 근본된 토지 땅을 갈아라’고 하셨다.

‘네가 흙에서 나왔으니까, 그 흙을 갈으면서 무엇인가를 깨달으라..’ 이것은 저주였다.


따라서 인간은 농사를 지으면서, 자기가 나온 그 땅(흙)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로 살아야 했었는데..


나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지지 않으면, 나는 죽은 흙인데,

그거 배우라고 농사지으라고 그랬는데..


가인은.. 세상적 인간의 대표로서.. 농사지어서 얻은 소산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왜 내 제사를 안 받으세요, 왜 내 제물을 안 받으세요?’ 하면서 따졌다. 는 개연성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그러한 것을 가인이 배웠다면

농사를 짓고 그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 어차피 이건 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것은, 제게서 하나도 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 제게 은혜 베풀어주세요.’ 이리로 가야했다.


그런데 자기가 뭘(농사, 자기 의) 해 놓고 나니까,

이게 뭔가 굉장히 근사하고 기특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왜 내걸 안 받으세요?’ 하면서 따졌다.


그런데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보니까 그건(양) 먹을 수도 없는 것이요, 옷 만드는 재료에 불과한데

전혀 쓸데없어 보이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다.


그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는 자를 때려죽인다.

그게 바로 ‘인간의 의’, ‘율법/행위의 의’를 숭상하는 사람들과의.. 부득이한 충돌이다.


이렇게 태초부터, 아벨은 ‘하나님의 의’를

가인은 ‘인간의 의, 율법의 의, 행위의 의’를 주장하는 대표자/모형으로서 등장한다.


그러한 ‘인간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그 면목 없는 의, 그 ‘믿음의 의, 하나님의 의’를 공격했다.

 

그게 역사 전체에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어구는     from faith to faith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난다. 알파와 오메가까지 전부 믿음이며,

그 중간에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다.


위 문장에서 주어는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가 알파와 오메가처럼 처음부터 끝이다.  

그 외 모든 ‘인간의 의’를 전부 다 부정/배척해 버린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가,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그 의가 부정해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육적 자아를 죽여가시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죽여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본론/ 1. 아벨이 맞아죽은 당연한 이유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벨이,

결국 자신의 모든 행위를 다 부정당하고, 장렬하게 죽게 된다.


거기에 ‘세상 죄인, 행위 의인’의 모형인 가인이,

‘하나님의 의’를 믿고 받아들이는 성도에 대한.. 핍박자로 사용된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아벨은 의인이었다.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현장에서, 아벨이 맞아죽는데,

하나님은 안 말려주셨다. 뻔히 쳐다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으신다.

침 삼킬 동안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머리카락 세시듯이 같이 동행하시는데,

그 동행하시는 현장에서

의인인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죽는다. 왜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적 자아를,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맞아서 죽이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정하며 사는 존재이므로..

     아벨을 죽게 놔 두신 것이다. 육적 자아가 죽으라는, 상징적 의미다.


그래서 시편에서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다’고 말씀하셨다.  시116:15

우리는 어차피 죽어야할 자들이니까.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의’로 사는 자들이, ‘행위의 의’로 사는 자들에게 맞아 죽는다. 환란을 당한다.



◑2. 아벨의 증거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

제사(행위)를 잘 해서 의로운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자,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 것이다.

그의 제사(행위)로 그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설교의 전체 흐름은..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그 배경. 

 

▶2.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런데 그가 의로운 자라는 증거가 뭐냐면, 아벨의 죽음이었다.  ←하이라이트

즉,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환란/핍박/죽임당함을 통해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는다. 설명하면,


믿음으로 아벨이 의인이 되어서, 의인의 삶을 사는데,

그의 삶에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났다.

그 증거가 뭐냐하면, 가인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여기서 ‘증거’라는 단어에 주목하시라.    

                      ‘말튜레오’ 인데, ‘증인이 되다’이다.   *증인, 순교자(마르투스)의 동사.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 제사로 말미암아 아벨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로운 자가 된 아벨에게,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났는데,

그 증거가 아벨의 죽음이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3.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히11:4

아벨이 드린 제사의 예물은, 양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물 gifts'은.. '제사 드릴 때 드리는 예물', 즉 '제사'를 뜻한다.

       같은 단어가 히5:1, 8:3등에 쓰였다.

 

아벨의 제사(예물)는, 양을 드린 것이었는데,

당시에 아무 쓸데 없는 것을 (적어도 곡식보다는 쓸데 없었다) 드린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허물을 가려달라고 하는.. '자기 부정/회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것을 통해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아벨의 삶에 의인됨의 증거가 나타났는데,

바로 그가 드린 예물, 그 예물인 예수의 십자가가,

아벨의 삶에 그대로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이게 ‘증인 되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벨의 이름이 ‘하벨’ nothing이라는 뜻이다.

사53장의 전체 내용을 한 단어로 줄이면 ‘하벨’ 즉 nothing이다.


낫싱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게 맞아죽으신 예수,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손인 셋이 탄생하게 되는,

예수님 그 그림자가 아벨의 삶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세상에 맞아죽는 증인, 순교자의 삶이다.

그 핍박당함, 그 죽음이.. 바로 ‘의인됨을 증거’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은,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아벨처럼 핍박 받아 죽는 것’이다. 히11:4


      세상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 하면, 여러분을 바보 취급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율법적 의, 행위의 의’를 맹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벨은, 죽음으로써 자기의 의인됨을 증거했는데,

더 나아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 성도에게도.. 이런 증거가 똑같이 나타나게 된다. 

핍박을 받으면서.. 나아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4. 증인은 성전에서 죽는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성도를 ‘두 증인’이라 그런다. 다른 말로 순교자이다.

그들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는다.

거기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루살렘 옛 성전이다. 계11:8

따라서 성도가 죽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성전이다. 오늘날로 치면 율법적 교회이다.


오늘날 이렇게 인간들의 행위를 강조하고,

인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복, 세상적인 복을 강조하는 그런 곳에서


‘그거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떠나야 되고, 나그네로 살아야 되고,

여기서는 우리가 오히려 죽어서, 하나님의 의, 그 의를 받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의만, 십자가만 의지해야 됩니다. 피만 의지해야 됩니다.’


      그러면 증인들이 핍박을 받게 된다.

      ‘행동 없는 양심’이라고!           *행동하는 양심이 대세이니까!


여러분, 진짜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면 행동이 없어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십자가의 의만 의지하게 되면,

자기를 향하여 쏟아붓던 사랑이 바깥으로 터지게 되기 때문에,

그에게서 진짜 선함이 나온다.



◑3. 믿음의 선진들의 증거


그 ‘증거’라는 단어는 히11:39~40에서 잘 설명된다.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주인공들은, 히11장에 거론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다.

그들이 전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했다

아벨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는데, 그 증거가 맞아죽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했다.


증거는.. 바로 윗 구절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게 믿음의 선진들의 인생에 나타났던 의인됨의 증거이다.

-즉, 고난이다. 죽음이다.

믿음이 그분들을 증인, 순교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히11:39

-약속의 실체는 예수이다.


그러니까 지금 히11장의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예수라는 실체를 역사 속에서 받지는 못했지만, 증거는 받았다.


그 증거가 뭐냐면.. 순교요, 핍박이요, 환란이었다.

그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의 실체는 아직 오지 않았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니까,

그들은, 믿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취적 고난’

그래서 약속의 실체(예수)는 아직 못 받았는데,

증거(고난)는 받았다는 것이.. 그게 구약의 성도의 진면목이다.

 

그걸 '선취적 고난'이라 그런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실 고난을

구약의 성도들이 미리 그들의 삶속에서 경험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시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모든 말씀이.. 다윗의 시편에 다 들어가 있다.


     그것이 다 다윗이 경험한 것을 쓴 것인데,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또한 우리가 다 겪을 일들이다.  


이렇게 의인됨의 증거를 가진 이들이 계속해서 릴레이로 세상에 맞아 죽다가,

결국 예수에게 그 죽음이 당도한다.

거기서 그 죽음(핍박받음)의 릴레이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고,

‘아 우리의 이 고난과 죽음의 실체가 바로 이것 - 그리스도의 십자가였구나!’

라고 확 드러나게 된다.


그 죽음에서 하늘의 의인(믿음의 의인, 하나님의 의에 의한 의인)들이 창조된다.

그것이 교회이다. 거기가 의의 완성의 자리이다.


그래서 히11:40에

‘우리(신약성도)가 아니면, 저희(구약성도)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약속/선취적 고난이 가리키던 예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서지 않았다면,

교회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이 받은 증거는 거짓이며 헛것이 된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성도들의 그 증거를 온전하게 해 주는 것이 된다.

‘아 맞구나 그 고난이 예수의 고난의 선취적 경험이었구나!’ 하고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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