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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시는 쉼은?

LNCK 2011. 12. 1. 12:02

 

◈주님이 주시는 쉼은?      마11:28~30. 롬7:21~25       11.04.03.설교녹취 Ro#23. 58'~70' 

 

 

◑멍에를 메는 가운데 .. 쉼을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멍에를 메어야, 쉼이 있다.

너희들이 나에게 오면, 내가 멍에를 너희 어깨에 지울 거야.

멍에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가야되는 결박이다. 그런데 그게 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성도에게 진짜 일어난다는 뜻이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내가 너에게 멍에 지우고 끌고 갈거야!’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준 목걸이를 항상 목에 메고 있었다.


신부들은 항상 열 드라크마, 신랑이 준 목걸이를 목에 메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계속 찾아야 했다.

그걸 목에 거는 이유는, 남편(예수님)이 끌고 가는대로 끌려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다 교만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목이 뻣뻣한 자인데,

거기에다 멍에를 걸어서 끌고 가는 것이 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쉼을 주시는데.. 먼저 ‘끊어내고’ 주신다.

우리 삶이 왜 이렇게 고단하고, 힘들어 하는가?

우리의 육적 자아의 욕망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게 채워지지 않으니까, 고단하고 힘든 것이다. ↓


전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자꾸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게 있으니까,

의, 식, 주, 명예, 권세, 욕망이.. 자기 성에 차지 않으니까 피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죽여주신다.’

‘멍에를 메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욕망들을 다 강제로 끊어내게 만드시고,

그래서 강제로 멍에를 메우고.. 강제로 끊어내게 한 다음에..

우리가 피곤하지 않도록 하신다. 피곤할 꺼리가 다 사라졌으니까!

그게 성도요, 교회의 삶의 본질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늘날 교회가 무엇들을 구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고단/피곤하게 해 달라고 발버둥치고 있다.


끊어내는 게 아니라, 주님께 더 달라고 발버둥치니까.. 더욱 피곤한 것이다.

(그런다고 주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다.)

더 얻어서, 자신을 더 피곤하게 해 달라고.. 발광 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이 교통사고로 거의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었다.

며칠 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났는데, 그 때 경험을 이렇게 책에서 말했다.


‘죽음이 내 눈 앞에 닥치는 순간,

나의 모든 정욕, 불안, 고통, 미움, 아픔이.. 일시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이

그 순간 너무나 명확하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죽음이 자기 코앞에 당도하자, 그 동안 자신이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던 것,

(그것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가?)

용서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것,

‘상대적 궁핍’으로 부끄러워했던 것,     *요즘 우리나라에 ‘절대 궁핍’은 거의 없다.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더라는 것이다.

왜?

죽음 저편에 다른 세계가 보이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그 세상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다 소멸되고, 부정된다는 것을.. 그 죽는 순간에, 비로소 알겠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은,

나의 감정을 지배하고 휘둘렀던 이 옛 세상이

이제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는데, 나우웬의 체험처럼 죽었는데 왜 내가 피곤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못 죽으니까, 하나님이 대신 나를 죽여주신다.


우리는 죽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피곤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쇼부(승부, 결판)를 보려고 하니까, 이렇게 고단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세상에 대해서 여러분을, 여러분에 대하여 세상을 끊어내는 것이다. 갈6:14

그게 신앙생활이다.


왜 하나님이 못을 박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냥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안 된다고들 안달을 떨고, 뭐가 그렇게 부족하다고 원망하고,

되고 싶은 나의 위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절망하시는가?

다 두고 떠날 것인데..


저도 죽음 직전 까지 갔다가, 살아난 적이 몇 번 있는데..

한 번은 군대에서, ‘결박수영’이란 것을 했다.

훈련을 받는데, 몸이 꽁꽁 결박된 상태에서 바닷물에 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기다리면, 분대장이 와서 보트에 확 채어서 끌어올린다.


그런데 저를 빠뜨리고 간 것이다.

제가 버티다 버티다가, 그 검은 바다 속으로 쑥 빠져 들어가는데,

(이때 보통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한다.)


-그때 내 돈 빌려가서 안 갚은 사람,

-나한테 해코지 한 사람,

-예전에 내가 굉장히 괴로워했던 여러 가지 일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기만 하면, 그런 것 아무 상관없어, 더 이상 섭섭하게/고통스럽게 생각 안 할거야!’


그런데 나중에 저를 건지러 왔다.

그래서 다시 살만 하니까, 또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내 돈 꾸어간 것, 왜 안 갚지?'


▲얍복강 체험은, 인생 가운데 계속 찾아온다.

그러니까 주님이 철장(쇠몽둥이)을 들고, 백마를 타시고,

계속 성도를 (깨뜨리시러) 찾아오시는 것이다.


내가 좀 살만하면 ‘두더지 잡듯이’ 때리고, 또 때리고   *망치로 때리는 게임에 비유

그래서 ‘너는 죽어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게 쉼이니까!


그러니까 제발 엉뚱한 것 갖고서,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지 마시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이 쉼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깨뜨림과 부숴뜨림을 당하여,

자신의 죽음 가운데, 모든 욕망에서 자유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과하면.. 자유하게 되면.. 사명을 위해서 세상 것을 주실 수도 있다.)


최근에 성룡(재키 챈)이란 배우가 자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했는데, 자녀에게도 난 한 푼도 안 물려 줄 것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고,

어차피 다 기부하겠다고 내놓고 나니까, 이제 '어떻게 모을까'가 걱정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해서 자기 자아가 죽은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삶의 일부 분야에 있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삶의 자유를 누리는데..


예수 믿는 성도는 뭐하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자식에게도 안 물려주고, 천국에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

.. 뭘 그렇게 애써 모은다고 난리인가?


진정한 자유는, 육의 소욕이 죽을 때,

육의 영광과 가치를 향한 추구가 박살이 날 때, 우리에게 찾아온다.

하나님이 그래서 오늘도 철장으로 우리를 부수시고, 내일도 철장으로 나를 내리치신다.



◑얻어터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만 붙든다.


그런데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예수님의 철장을 매순간 막아내고,

예수님을 향해 오히려 대항한다. 안 두들겨 맞으려고.

바울이 그 일을 정확하게 체험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보시라. 나를 묻으려고 하는 예수님의 열심과,

절대로 ‘교회라는 무덤’에 묻히지 않겠다는       *‘교회라는 무덤’ - 교회는 자아를 죽이는 곳

우리의 옛 자아 사이에 전투가 일어난다.


그런데 내 마음의 법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 자주 진다.

바울은 사도였다. 그런데 사도도 가끔 졌다니까요!


그때 성령을 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자의 마음속에

 

‘아니 수시로 내가 이겨버리네, 내가 져야 되는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 가운데서 나를 좀 건져주세요!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 좀 기억해 주세요..‘ 이 말과 고백이 나온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이다.

이것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자이다.


‘오! 나는 안 되는 군요. 하나님 늘 나는 져요.

죄의 법 아래로 늘 내가 사로잡혀 오는데, 이것을 어떻하면 좋아요?’


▲반전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나를 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다오’

 

그렇게 탄식했던 사도 바울이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나는 이런 곤고한 존재인데

‘하나님의 의’를 부어서,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감사 속에서 찬양한다.

‘하나님 저 이런 존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서 죽이시는 수밖에 없었군요’


‘하나님의 의’,

그게 진짜 의고, 우리의 의는 이렇게 초라한 것이다.


이게 ‘의의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마5:6

'하나님의 의'만 바라게 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사회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

열심히 정의를 추구하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라,


자기 절망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그들만 (의로) 배부른 자가 된다.. 이게 산상수훈인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죽여 가신다.

그래야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붙드니까!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매일 폭로 당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의'가 수여/전가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보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하늘의 의를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게 변화이다. (자신의 성화적 노력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의 ‘변화’)

여러분 변화되셨는가?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의만 붙드는 상태로 ‘변화’)


그렇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그런 간절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게 될 때,

여러분이 만들어내는 의를 가치 없는 쓰레기로 취급하게 되고,

 

그렇게 자아가 죽은 가운데서,

그때 진짜 내 속에 사시는 ‘예수의 삶’이 문득 문득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여러분은 은혜를, 복음을 먼저 받으셔야 된다.

그렇게 여러분은 교회(피밭, 아겔다마)에서 죽으셔야 한다. *아겔다마 : 다음 호에!

의인은 그렇게 교회라는 무덤 속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체험해 간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끝까지 내 육적 자아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질뻔 한 자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하나님의 의를 꼭 붙드는 자.. 그가 의인이다.


몸을 불사르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자,

전 재산을 다 내놓고 구제하고 그런 자가 아니라!   이건 성경적인 의가 아니다.


▲정리하면

그렇게 나약하고 힘없이 때로는 구차하게,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는 자들이 의인이다.

명확히 알고 계셔야 한다. 그들만이 구원으로 초청받은 의인이다.


다른 것에 주리고 목마르면 안 된다.

-돈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식에 주리고 목마른 자,

-건강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런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오늘날 교회라고 문패를 붙여놓고 있다.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다. 그들만 배부르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끊어내라고 하시지, 또한 강제로 끊어내신다. 멍에를 지우신다.

그걸 내 가치로, 내 자존심으로, 내 자랑으로 챙기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