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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설교 행14:1 *원래 글 및 출처
“왜 칼빈의 영성은 리바이벌 되지 않는가?” 김남준 목사
▲1. 성경 자체에 대한 열정
존 칼빈이 박해를 피하여 도망한 스위스 바젤에서,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찬란한 빛을 던진 불후의 명저인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였을 때는,
바로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자기 옷소매에는 항상 이런 문장紋障이 새겨져 있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사실 ‘마음 Cor’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심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사람 칼빈의
전존재적인 갈망의 표현이었다.
칼빈의 설교를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칼빈은 자신이 발견한 개혁사상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설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역사의 소용돌이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분주해 하지 않고
모든 성경을 골고루 설교해 나갔다.
우리 생각에는 그가 로마서 같은 교리적 서신을 주로 설교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균형을 유지하면서 신구약을 골고루 설교해 나갔다.
그는 실로 개혁 사상의 종이 아니라
‘말씀의 종’(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이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균형은, 종교개혁이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렸다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그런데 오늘날의 신학은, 경건성을 상실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신학적인 유산을 사랑하면서도, 그와 같이 설교하지는 않는다.
전기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처럼 살지 않는다.
같은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그 사람처럼 불타는 마음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의 학문의 세계에 대하여 감탄하는 이들은 많지만
칼빈을 닮은 ‘성학’(聖學, the Divine)들은 출현하기를 그쳤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영역이 무엇이든지 간에, 찬미자들은 찬미의 대상을 닮아가게 마련인데,
칼빈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회와 신학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그의 신학함에서 발견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그의 신학함의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였으며,
교리를 세울 때나 성경을 해석할 때, 언제나 적용되는 원리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탐구들은 늘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사와 동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신학에 있어서 이와 같은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은
종교개혁 이후 청교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학함의 문제는 너무 사변적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의 동기가 지나치게 순수(?) 학문적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이런 방식의 신학함은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하여
신앙의 원칙들을 발견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교리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실천적인 삶 속에서 진실임을 입증받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삼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었으며,
현학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이론과 지식의 자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사는 거룩하고 투쟁적인 삶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3. 신학에 ‘영적인 체험/ 경건’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그의 신학함은 ‘경배 의 과정’이 되어야 하고,
경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결론은 하나님을 향한 ‘송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신학의 시작점은 진리인 성경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체험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의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은 불 붙을 때 비로소 신학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불 붙은 신학을 칼빈에게서 본다.
베자(Beza)는 칼빈의 말씀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그의 설교에는 동정이나 매력이 부족하고 상상력의 결핍도 나타났으며,
예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어떠한 시적인 전환이나 감동적인 호소나 솟구쳐 오르는 웅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장점은 놀라운 것이었다.
용기, 정직함 진리에 대한 불같은 사랑, 맡은바 직무에 대한 헌신,
신앙적인 원칙에 충실한 삶과 섬김, 동료들에게 보여준 신실함,
거룩한 목표에 대한 열심,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순결과 사역에 몸과 마음을 바친 것 등
여러 가지 뛰어난 특성들을 주목할 때 앞서 언급한 결점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의 설교에 대한 또 다른 평가로, 에드윈 다아간 Edwin C. Dargan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설교에는 설교자의 기교를 더함이 없이,
성경의 표현으로 성경의 사상을 드러내는데,
날카로운 자각과 명확한 이해, 표현력이 총동원되어 있다.
설교 양식은 명쾌하고 박력 있고 예리하며, 꾸밈이 없으면서도
순결하고 엄격한 우아함이 있고,
인간적인 따스함은 없지만 거룩한 열정과 힘에 불 붙은 설교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말씀으로 섬기기 원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지적인 준비와 함께 영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거룩한 정서가 깃든
경건을 소유하는 것이
성경에 관한지식을 삶으로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됨을 잊지 말아야한다.
신학적인 지식이 어떻게 신앙과 조화되고,
신학을 통해 알게 된 성경에 관한 지식이
어떻게 사람들의 인격 속에서 불 붙여져서 구체적인 섬김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에 대한 신앙체험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이해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언제나 깊은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을 통한 사랑과 헌신의 경건을 유지하지 못한 채 계속되는 신학 연구는
단지 그로 하여금 현학과 인간적인 자랑을 위하여 헌신하게 한다.
▲4. 학문과 경건의 조화
18세기 미국교회들의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오늘날 볼 수 없는 희귀한 현상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 시대의 신학교 학장들의 이름을 적은 목록은
곧 당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능력있는 경건한 설교자의 목록과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뛰어난 학자들이었고, 동시에 뛰어난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목회할 수 없는 신학자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모든 교회의 설교단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영적인 설교자였으며 목회자들이었다.
1790년대 미국 버지니아의 부흥과 대각성의 역사를 개관한 후 던져진
이얀 머레이(Iain Murray) 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된다.
“위대한 부흥은 장로교회들에게 정통적으로 성경적으로 올바른 설교
-물론 그것이 교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는 하지만-
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권위, 부드러움, 열정, 긍휼 - 이러한 것들이 하늘로 부터 쏟아 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사역 속에 이같은 것들이 깃들 때,
비로소 진정으로 신학이 불붙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목회를 하고,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신학을 가르치는 이상한 분업 체제(?) 같은 것에 대하여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신학을 아는 지식이 해박해진다고 하는 의미가
곧 신앙적인 정서와 열정을 상실하고 냉담하고 직업적인 학자가 된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논리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는 당연히 매우 낯선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우리에게 거룩한 경건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경건한 신학자들의 성경과 학문 연구의 유산들을 습득한다고 해서
그 지식이 곧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결쿄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이루어 놓은 연구 업적들과 신학의 결론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갔으며,
그들이 어떻게 신학하였는가에 대하여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진리를 예리하게 주석해 나가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긴 탄원으로 이어지는 칼빈의 주석이나,
자신의 저서 <프롤로그 Prologue>속에서 신(神)의 증명을 기도로 시작하던
안셀름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경험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를 터득하고,
삶의 실천을 통하여 진리를 획득하던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담대함과 거룩한 갈망이 넘쳐흐르는 루터나 오웬John Owen의 글들을 보시라.
17세기 이후의 영국의 청교도 계통의 많은 성학(聖學)들의 생애를 살펴보라.
신학은 그들에게 성경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영적으로 경험하여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5. 칼빈의 학문과 더불어, 그의 경건을 배우시라
신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재미있는 것은,
작은 신학자들은 신학 자체를 공부하면서 태어났지만,
교회의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신학자들은 모두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학문적인 준비가 갖추어진 사람이 성경을 통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그 시대가 심어준 신학적인 편견과 무지로부터 해방될 때
위대한 신학자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 그들 안에 한결같은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거룩한 열정의 체험이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을 한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
진리를 향하여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칼빈을 공부하고 그의 가르침을 존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닮은 후예들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그의 학문적인 결론을 이용할 뿐이지
그의 글과 학문에 의하여 감화 받는 기회로 도무지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학적 열매가 자기화 되기 위해서,
그에 관해서 공부하는 사람 자신이
칼빈이 잠겼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칼빈의 설교와 주석들을
단지 성경 해석을 위한 사전이나 단어장처럼 활용하기를 그치고
그가 행한 말씀의 풍부한 해설들이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명성에 영향를 미치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잘못된 성경 지식뿐 아니라 그릇된 신학함의 태도부터 고쳐줄 것이다.
단지 논쟁거리가 되는 성경 해석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의 글이나 주석을 대하기 때문에,
칼빈은 ‘또 다른 칼빈들’을 형성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영받는 책이나 글 가운데
거룩한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매우 적다는 것도
개혁자들의 사상을 환영하면서도
그들의 영성을 본받지 못하는 또 한 가지의 이유이다.
한 예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론’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기도에 관한 그의 해박한 이론들이
다른 모든 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지 학문적인 탐구의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일촉즉발의 교리 논쟁의 시대를 살면서도
모든 교리를 교리 자체가 아니라 거룩한 삶의 실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만을 차갑게 들려주는 신학적 정보로 가득찬
책만 대하지 아니하고 읽을 때 마음이 뜨거위지고 거룩한 열심이 촉발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리를 향한 신념이 더욱 견고해지는 책들을 통하여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해박한 신학 지식을 섭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신학함이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거룩한 감화는, 오직 거룩한 은혜의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더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우러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예처럼 살고 싶어 하는 신령한 소원들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모든 책을 읽으며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책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신학함을 배우는 토대로 삼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말씀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훌륭한 설교자들은,
신학 서적이나 경건 서적의 진가를 측청함에 있어서
그 책을 공부할 때 받은 거룩한 감동의 정도를 기준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독서를 하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조지 횟필드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쓰여진 책,
저자 자신과 그들 작품 위에 ‘그리스도와 영광외 영이 임재한’ 저작들을 필요로 한다.
횟필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 점에 있어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충고이다.
“그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저술하고 설교했다.
그들은 죽었으나 그들은 그들의 저술을 통해 지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언의 영을 빙자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저술들은 오래 생존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찾으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현대식으로 화려하게 쓰여지고 값싸게 장식된 저술들은,
성경적 표준에 가장 가까운 저술이 무엇인지를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의 평가 앞에서는
점차 쇠잔해지고, 사라지고 말 것이다.”
▲6. 마치는 말
수고와 슬픔, 계속되는 질병과 과중한 일들, 연속되는 긴장과 시련에 시달려온 인생을 마감하는 날,
칼빈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제게서 들은 교리들을
경솔함 없이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르쳤으며,
순수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책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1564년 5월 27일의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척박한 영적 현실은
이제 ‘세뇌된 칼빈주의’가 ‘경험된 칼빈주의’를 원한다.
목회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진리를 아는 체험이 가져다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함’ 때문에 칼빈의 신학적인 결론에 동의하는,
하나님을 아는 칼빈주의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그의 학문과 함께 독특한 신학함을 회복해야 한다.
학문적인 탐구의 과정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되고,
그 열매가 하나님을 향한 송영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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