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1. 그의 회심 및 받은 영향
▲1. 어릴 적 6살 때 화재 체험
웨슬리 목사님이 6살 꼬마 때, 그가 살던 집에 불이 났습니다.
1709년 2월 9일 수요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가족 모두 급하게 집에서 빠져 나왔는데,
어린 웨슬리가 2층에서 자고 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떤 이가 목말을 타고 올라가서,
창문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웨슬리를 간신히 구출해냈는데
구출한 바로 직후에 그 불탄 집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평생 이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웨슬리에게 이런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큰일을 시키려고 우리 아들을 그 무서운 불길에서 건져내셨구나!’
웨슬리 목사님이 50세인 1753년 11월에 심한 병에 걸려서 죽을 뻔했을 때,
자기 비석에 새길 글을 스스로 적어 놓았는데,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을까 봐
“여기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존 웨슬리의 육신이 누워 있다.”
라고 적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만약 그때 돌아가셨다면, 이 말의 그의 비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웨슬리 목사님을 회복시켜서
40년 가까이 더 일하게 하셨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86살 때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11시경 내 생각에 떠오른 것은,
지금이 내가 80년 전에 화마에서 구출된 그날이고 그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잠시 기도드렸다.
찬양과 감사의 음성이 하늘로 치솟았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6살 때 죽어야 할 자기를 화재에서 구해 주셨다고 분명히 믿었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2.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여사는 19명의 자녀를 낳아서
6명은 죽고, 13명을 길렀는데,
생활이 어려워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고,
본인이 직접 집에서 홈스쿨링을 해서 13자녀의 교육을 시켰다.
여러분, 돈이 없어서 자녀를 학교에 못 보내는 고난을 당해 보신 적 있으신가?
가난한 순회설교자였던 남편 목사님은, 한 번 말을 타고 전도의 길을 떠나면
몇 달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수산나는, 자기 혼자서 아이들을 다 먹이고 키워야 했다.
애들 학교 보낼 돈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먹을 것도 부족한데 학교까지나..
그러나 수산나 여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회피하지 않았다. 풍랑을 정면돌파 했다.
그녀는 매일 저녁 6~9시까지, 모든 자녀들과 함께 말씀 공부와 기도회를 가졌다.
어린 자녀들이 걷기 시작할 무렵이면, 그들의 손을 잡고
감옥, 병원 등을 아이들과 함께 심방하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한 주에 한 끼 금식, 하루에 3번 소리 내어 기도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밤9시가 되면, 자녀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어머니 수잔나 여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얘들아, 너희는 누구냐?”
그러면 아이들이 합창을 했다.
“우리는 위대한 아이들입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다고 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예, 우리는 지금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하게 했느냐?”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문답이 끝나면 비로소 아멘 하며 모두 잠자리에 들게 했다고 한다.
그 자녀들 중에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요,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동생 찰스 웨슬리도 찬송가 작사로 그 부흥운동의 동역자가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일기Journal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우리는 매의 두려움에 대해 배웠고,
울 때에도 큰 소리를 내어 울지 않았다.
어머니의 그러한 가르침들... 만약에 그러하지 않았었더라면
우리는 많은 잘못이나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집 안에서는 자녀들의 떼쓰는 울음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자녀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늘 조용하게 생활했다.’
그렇다. 자녀들의 마음에 갖추어야 할 첫 번째는
자신의 의지를 다스리고 순종할줄 아는 성품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이러한 훈련은 또 서서히 오랜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만약에 시기를 놓치게 되면,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오기와 고집으로
똘똘 뭉쳐지게 될 것이다.
▲3. 모라비안의 영향을 받다.
진센돌프와 모라비안 공동체의 큰 업적은
요한 웨슬리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대서양 풍랑 이는 배속에서, 의연한 모라비안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또한 영국의 올드스게이트에 있는 모라비안 집회소에서
모라비안 피터 뵐허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을 때인 1738년 5월 24일에
그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후에 그는 유럽대륙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직접 방문해서 진센돌프를 만나며
그에게 영감을 받습니다.
웨슬리는 후에 킹스우드 공동체 학교를 세웠는데,
그것과 모라비안 공동체 herrn hut 와 하루 일과표를 비교해보면,
거의 똑 같습니다. 거기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휫필드와 웨슬리가 동시대 인물로 활동했는데,
휫필드는 무조직으로, 웨슬리는 조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적 흐름은 휫필드가 계승했고,
할레 대학, 진센돌프 등 경건주의, 성령운동의 흐름은 웨슬리가 계승했습니다.
▲4. 데이빗 브레이너드에게 받은 영향
천국과 지옥과 이 세상을 흔들어놓았던 위대한 전도자 웨슬리는
영국의 한 부흥회에서
“주(主)의 일이 쇠퇴한 곳에서 그것을 다시 부흥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런 다음에
“모든 설교자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전기를 열심히 읽으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맥체인, 윌리엄 케리,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별처럼 빛나는 이 전도자들의 공통점은
병약하지만 기도에 힘쓴 ‘데이빗 브레이너드’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브레이너드라는 동일한 불꽃에서 불을 받아 활활 타오른 사람들이었다.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 中
▲5. 웨슬리의 성령세례
저/어느 미국인 목회자는 아래 일기문의 일부를 아예 통째로 외우며 살고 있다.
그 일기문에 적힌 일들이, 오늘날 제게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1739년 1월 1일
홀, 허친, 임그림, 휫필드, 내 동생 찰스 등 약 60명의 형제들과 함께
페터 레인地名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쯤, 우리가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격렬한 기쁨으로 인하여 부르짖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벌벌 떨다가
약간 회복되었을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새해 아침에, 온 나라가 진(술)에 취하고 있을 때,
이 60명의 형제들은, 런던의 좁은 골목인 페터레인에 모여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새벽 3시가 되기까지 그들은 깊이 기도하면서 천국의 문을 두드렸고
응답이 왔다. 성령이 오신 것이다. 마치 초대교회와 같이!
◑2. 회심과 성화를 강조한 웨슬리
▲웨슬리의 설교.. 회심을 강조하다.
당시 기독교 문화에 속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았구요, 가끔씩이라도 교회에 참석했고,
자기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기는 그렇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회심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어떤 신조(교리)와 맞바꾸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의 삶에서 거의 마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마음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웨슬리가, 휫필드가 나타났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바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영적 삶의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고후13:5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벧후1:10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지난 몇 십 년간 동안 (이상한) 전도자들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웨슬리가 강조한 회심론은.. ‘극단적 회심론’으로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청중의 회심을 강조한 전도자
존 웨슬리는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을 위하여 당신이 쓰여지도록 하시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을 원하는 사람에게만 아니라
당신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를 많이 했느냐
또는 이런 저런 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많은 영혼을 구원 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하게 하시오.
그리고 전력을 다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오.
거룩함이 없이는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면,
죄를 지을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통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계속해서 모든 생각과 언행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적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 우리 혀의 모든 말, 우리 손의 모든 행위에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저(어느 설교자)는 장로교 목사로서, 오랫동안 웨슬리의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신봉하는 장로교에서는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도, 잘못 사용하면,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저지르는 모든 욕망의 범죄를
‘타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어!’ 라는 합리화와 변명거리로 남용될 수 있다.
잘못된 욕망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영혼을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 말씀 등 신앙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
- 이런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라서 어쩔 수 없어!’ 하면... 교리를 오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용하는 교리가 아니다.
욕망은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맞불로 제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살았다...
요한 웨슬리의 기도
오, 나의 가슴속에 당신의 깨끗한 사랑 말고는,
다른 아무 것도 머물지 못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만이 이 몸을 온전히 거느리소서!
나의 기쁨, 나의 보물, 나의 면류관 되신 주님이여,
모든 차가움은 나의 가슴에서 사라지고,
내 행실과 말과 생각이 온통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도가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화를 ‘지향’하고 ‘추구’합니다.
혹시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늘 ‘지향’하고 ‘추구’하는 성도는..
정말 거듭난 성도가 맞습니다.
죽을 때까지 성화를 ‘지향’하고 ‘추구’합니다.
‘완전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가 아니라,
성화를 ‘지향하고, 추구한다’ 라는 뜻입니다.
▲저/어느 목회자는 어제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고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여러분, 17C 청교도, 18C 영적대각성운동, 이런 시기에
‘교회 안에도 구원 받아야 될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초점을 두고
많은 책과 설교들이 씌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
사실은 자기가 ‘구원자 예수’가 아니라, ‘해결사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3. 웨슬리의 받은 핍박과 부흥
▲1. 웨슬리의 전도 열정 (그의 일기 내용에 보면)
18세기 영국은 진(술)에 취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섰다.
그 때 하나님은 존 웨슬리를 일으키셨는데,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서 나는 많은 감동을 받는다.
“밤길을 달려 동이 막 트는 아침 7시에 브리스톨 외곽지역에 도착했다.
나는 언덕에 서서, 남자들이 일하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멈춰서서 듣던 무리들은, 썩은 계란과 토마토를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구주를 위해 고통 받을 수 있음을 특권으로 여겼다.
나는 다시 하루 종일을 달려 ‘바스’라는 도시에 저녁 6시에 도착했다.
나는 그 도시 외곽 언덕에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또 많은 이들이 내게 썩은 계란과 토마토를 던졌다.
나는 구주를 위해 고난 받을 수 있음을 특권으로 여겼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회심했다.”
웨슬리의 일기는 계속 이렇게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달려갔다. 전도했다. 일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회심했다.’
나는 그 일기들이 너무나 좋다.
▲2. 핍박은.. 로케트의 연료와 같다.
성경에 나오는 야곱, 요셉, 다윗,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베드로, 바울 등과 마찬가지로,
교회사에 나오는 인물로서
루터, 칼빈, 웨슬리도 죽을 때까지 일평생 고난과 시험 중에 살았습니다.
항상 칼이 그들을 뒤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핍박(받음)’은,
그들을 자동차, 불도저, 로케트에 비유한다면
‘연료’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연료가 없는 자동차, 불도저, 로케트는 아무리 성능이 우수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은 ‘핍박’을 연료삼아, 하나님 나라에 거룩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3. 영적 승리가 크면 클수록, 영적 저항과 영적 전투도 비례해서 거세다.
요한 웨슬리 역시 얼마나 거센 영적 전쟁의 도전에 직면했는지,
설교하기 전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몸에 경련이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탄의 공격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전했다.
그 대가를 치른 후에야, 결국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다.
18세기 말에 영국에 엄청난 부흥을 일으켰던 요한 웨슬리가 그랬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테러하려는 불량배들이 따라다녔고,
또 육체에 너무나 큰 병이 있어서,
설교하기 직전까지 몸이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지럽고, 설교를 못할 지경이었는데,
이를 악물고 강단에 서면, 그 때부터 불을 뿜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웨슬리를 위해 중보기도한 수많은 중보기도자들의 힘이었다.
▲4. 웨슬리의 가시, 아내
영국에는 유명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아주 훌륭하신 분입니다.
어머니의 신앙과 인격은 천하가 다 압니다.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그 어머니와 정반대되는 거칠고 아주 사나운 여자였습니다.
얼마나 드센 여자인지, 남편을 때립니다.
심지어 남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방바닥을 헤맸습니다.
요한 웨슬리에게는 그의 아내가 가시였습니다.
집에 들어와 부인의 가시에 찔림으로 인해, 그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온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는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아내의 가시가 무서워 밖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평생 4만 2천 번의 설교를 밖에서 했습니다.
매일 50~60마일을 말을 타고 여행을 하면서, 하루 세 번씩 설교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안방의 찌르는 가시 때문에 밖에, 나가서는 장미꽃을 피웠습니다.
향기를 발했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을 복음화시키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결국 가시와 같은 아내 때문에, 일생을 복음 전도에 바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느 설교에서 인용
▲5. 각오가 남달랐던 요한 웨슬리
요한 웨슬리가 한번은 그의 시대에 효과적인 세계복음화의 전략을 위해서
동료 지도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토의되고 있었어요.
갑자기 웨슬리가 일어나더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해요.
"방법이요?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죽음도..)
그리고 죄만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100명만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금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습니다."
▶6. 고령에도 여전히 구령의 열정
웨슬리 목사님은 87세의 고령 연세에도 마땅히 할 일을 연기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계속 말 타고 영혼 구원의 열정에 불타서 전도하였으며,
불붙는 열심이 하나님의 교회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수 있다.
활기를 되찾게 만들 수 있다.
◑4. 사회 참여를 강조한 웨슬리
▲2. 복음의 영향력이, 사회까지 변화시키다.
18세기 초 영국은 종교적인 갈등과 사회적인 혼란이 극심했다.
그 때문에 술 취함, 싸움, 도박, 자살 등이 전염병처럼 돌았다.
음주량이 급속도로 증가해서 18세기 초에는 10배나 늘어났다.
천연두로 말미암아 13명 중에 한 명꼴로 죽었다.
그래서 장례식 횟수가 세례식 횟수보다 두 배나 많았다.
이처럼 사회가 붕괴되어 갈 때, 요한 웨슬리가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 하니 온 영국 사회가 뒤집어졌다.
술주정뱅이는 60%나 감소했고, 죄수는 40%나 줄어들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말하기를
“웨슬리의 영적각성운동은 영국을 폭력혁명에서 구출해 주었다”고 했다.
안 그러면 영국에 유혈혁명이 일어날 판인데,
웨슬리가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해서
온 영국이 (전체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고 변화를 받았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이 영국 나라를 구원했다고도 말한다.
웨슬리가 없었던 프랑스는 ‘프랑스대혁명’이란 피값을 치르고 왕정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왔지만,
영국은, 웨슬리의 복음전도 운동으로, 명예혁명 등을 통해서
거의 평화적으로 왕정시대가 끝나고 근대사회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서 발달했다고 하지 않는가!
▲3. 웨슬리,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폐지를 격려하다.
더치 쉬츠가 쓴「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수년 동안 영국 의회에 노예제도 폐지를 건의했다.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않아 낙심하여서, 그는 막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든 친구 존 웨슬리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임종의 침대에 누워서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 일에 사용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사람들과 악마들에 의해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데, 누가 너를 해칠 수 있겠는가?
그들 중에 하나님보다 센 자가 누가 있는가?
오,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힘과 능력으로 계속 싸워라.
영국은 물론, 미국의 노예제도조차 없어질 때까지!"
웨슬리는 6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45년 동안 더 싸운 후에,
1833년 죽기 3일전에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았다...
노예 제도 폐지가 실행되는 데는, 이후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역사상 위대한 이정표가 되는 이 사건은
그의 친구인 웨슬리의 격려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4. 개인적 절제의 본
웨슬리는 ‘지갑이 거듭나야 진짜 거듭난 것’이라 말했는데,
초대교회가 진정 성령의 충만한 교회였다는 증거는, 나눔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 받았다는 고백, 하나 되었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한 것이었음은..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돌보고 기쁘게 하는 일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웨슬리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청지기로 우리를 부르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자기 수입이 늘어도, 생활비 지출은 늘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빈한 마음은 청빈한 삶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면, 수입이 1백만원일 때나, 수입이 1천만원 일때나,
웨슬리의 생활비 지출은 거의 똑같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인색하고, 타인에게 후하게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5. 그 외 일화
▲웨슬리가 잠시 꿈을 꾸었는데 천국에 갔답니다.
18세기에 그들 감리교와 장로교 칼빈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서로 많이 싸운 모양입니다.
웨슬리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감리교인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여기에 감리교인들은 없습니다."
(속으로 덜컹 했겠죠?)
웨슬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자들은 얼마나 왔습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칼빈주의자도 없습니다! 여기는 천국 백성들만 있습니다!"
▲웨슬리, 대학시절에 휫필드와 함께 홀리클럽 활동하다.
휫필드는 1714년에 태어났고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후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 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감리교 목사들은 언제든지 3가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전할 설교 준비와,
-또 복음을 위해서 어디든지 이사 갈 준비와,
-복음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풍랑보다 ‘더 큰 충격’ 받은 웨슬리
웨슬리가 신앙에 각성을 하게 된 유명한 계기가 있다.
그가 처음에 미국에 선교사로 갔다.
당시에 그는 믿음이 너무 연약한 목사였다.
풍랑을 보고 너무 두려워하는 것을 봐서도, 그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영국에서 미국 신대륙으로 선교하러 갔다가
거의 실패해서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자기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모든 승객들이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고, 웨슬리도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 풍랑의 와중에, 배 한쪽 구석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웨슬리가 거기 가 보니, 모라비안 성도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험한 풍랑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웨슬리가 신기해서 물었다. ‘당신들은 이 풍랑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풍랑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데, 무섭기는요...
이 풍랑으로 인해 우리가 더 빨리 가게 될 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게는 풍랑의 충격보다
그들의 대답이 더 충격적이었다!”
웨슬리는, 그 날 풍랑 앞에서,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모태신앙으로 목사가 되어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참 믿음을 갖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게 되고,
나중에 그는 성령충만을 체험하고, 근대시대에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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