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 엡1:4~6, 빌3:18~19 설교스크랩, 출처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잃어버린 생명을 내게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되찾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되찾습니다.
그럼 잃어버려진 자가 되찾음 당하는 그 바탕엔, 예수님의 희생이 깔려 있겠지요.
이걸 놓치면 안 됩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에만 정신이 팔리면 안 됩니다.
그럼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나를 위한 구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목적이 어긋나 버립니다.
이건 또 다른 죄가 됩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려고.. 구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기 위해서.. 구원을 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미케 하려고.. 구원의 바탕에 예수님의 희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엡1:4~6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내가 구원 받은 그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게 되면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 됩니다.
이런 구원관은 이방인들의 구원관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입니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나의 자존감을 챙기는’ 식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그럼 구원의 목적을 상실한 죄가 됩니다.
내 자존감을 챙긴다는 것은.. 예수와 떨어져 있는 독자적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몸에 부속된 존재란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을 위한 삶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도록 인도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언약을 위한 부르심으로 나타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란?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스스로 왕이 되어 사는..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존재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러한 죄성이.. 하나님조차도 자기 삶에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인을 일컬어 우상숭배자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자기 몸뚱이를 챙기는 식으로 역사를 합니다.
구원을 받아도..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비록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에게 미혹 당하면
신앙을 자기 삶에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도 자기 우월성을 증명코자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으뜸이 되고자 합니다. (고지론)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영광 받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나의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목적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하시고,
죄는.. 우리를 위하여 살라고 합니다.
이걸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그럼 두 소욕 간에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성도는 이러한 사고와 싸우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이방인들의 구원관과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고가 죄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방인이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구원관에 빠지면.. 예수도 이용대상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나를 위한 구원이 되고 맙니다.
이러면 신앙 속에는 ‘나 구원 받았다’만 있지!
‘왜 구원 했는지..’는 없어집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고 구원 했는데.. 엡1:6
예수는 나를 구원하는 데에만 필요하고.. 그 후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이 자기 부인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오해하여
이방인들처럼 자기 구원(자기 영광, 자기 높아짐 포함)을 챙기고 있습니다.
“왜 나를 구원 하셨느냐”
“무엇을 위하여 나를 구원 하셨는가!” 는 없고!
“나 구원 받았다!” 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는지는 없고!
“나 구원 받았으니.. 내 맘대로 살거야!” 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긍정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 지경이 되고 말다 보니
예수는 ‘내 욕망 채워주는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고 자기 욕구대로 삽니다.
▲물론 죄인은 자기 욕구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것과 싸우는 자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금 저는 ‘우리에게 이러한 아픔이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이런 아픔을 몰라요.
왜 구원 속에 담겨져 있는 지향성과 전혀 다른 지향으로 살고 있을까요?
이 모두가 복음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곡해하면, 신앙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하게 됩니다.
그럼 룻기의 나오미처럼 자기 몸뚱이 챙기고자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어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만 남아요.
이게 죄거든요.
죄가 뭐냐고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살라고 구원을 했는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한 마디로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의 신神은 자기 배요, 땅에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누가 십자가의 원수냐?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神은 자기 배입니다.
여기서 배란.. 먹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땅의 일’이라고 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의 일’이란..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왜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빼내기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 말뚝을 박고자 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배은망덕한 자들입니까?
그러니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
좌우지간 신앙을 내 삶에 수단으로 생각하면..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징벌하십니다.
룻기에 보면 이렇게 살다가 징벌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라는 여인입니다... 물론 나오미는 나중에 회복되지요...
(후략, 전문은 출처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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