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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든지, 흥하든지.. 예수 안에서 둘 다 복되다

LNCK 2012. 2. 9. 16:27
 

◈망하든지, 흥하든지.. 예수 안에서 둘 다 복되다                설교스크랩, 출처


 

▲도입

나오미 가정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그냥 이사 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신(神)을 바꾸는 행위와 같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도(背道)한다는 말입니다.


난 하나님이 싫어!

이방 신(神)이 좋아!

그래서 이방 나라로 삶에 근거지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할 백성이 본분을 망각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이방 신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이걸 바울 식으로 말하면 땅에 일을 생각하고

신(神)을 자기 배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망함도 결국은 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가정에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들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잘 살고자 내려갔는데 도리어 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성도에게 있어서 망함이란..

망하게 해서 버리고자 함이 아니고.. 망하게 해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가 아니고, 사실은 징계discipline입니다.


‘이방인’에게 내려지는 저주는 끝장을 내 버리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저주란.. 고치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저주라고 하여도.. 실상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말은 곧

“너희들 내 말 안 들으면 혼이 난다” 라는 사랑의 소리인 것입니다.


언약 속에 들어온 성도는 ‘말 안 들으면 혼이 난다’는 것이지,

‘말 안 들으면 영원히 잘라버린다’가 아니지요.


그러니 혼 나는 것도, 그래서 망하는 것도

모두 다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복(福)인 것입니다.


이를 알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역설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못 알아들었지만 말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다루고 계신데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시고 계신데

우리는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느냐?’고 악악댑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난 나오미가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청상과부가 된 것도

언약에 의한 법 집행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나오미도 나중에 다 망하고 난 다음에 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내가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하나님에게 된통 얻어맞고 빈 털털이로 돌아 왔다’고 간증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자기 백성에겐 저주가 없습니다.

망해도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끊어진다고 하여도 사랑입니다.


이걸 알아야 두렵지가 않아요.

이 신앙이 있어야..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생깁니다.


◑망하게 하신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제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해요.


그런데 도리어 맨날 낯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만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잖아요.

이건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서로 높은 자리 앉겠다고 다투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부 거지로 만들어 버렸어요.


12 제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 땅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한 사람이 없어요.

다 비참하게 살다가 죽임 당했어요.


모두 다 바울의 말대로 ‘만물의 찌끼처럼 살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았어요.

땅에 것은 한 뼘도 못 취하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게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버리라는 식으로, 하나님이 강권해 가십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과 반하는 쪽으로 이끄시니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어요.

경험해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즉 죽도록 고생하는 가운데,

‘야곱 속에 있는 죄성’들이, 내게서 똑같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옵니다.

신앙생활은 원리적으로는 순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불순종으로 나타나요.


우린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죄를 토해내고 살아가요.

우리의 원함과는 상반된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본성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세상 것들을 탐하는 내 본성,

-그런 것 안 주신다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본성,

-하나님의 간섭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타락한 본성..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노후의 야곱처럼 ‘나는 참으로 험난한 팔자를 살았다’고 고백한다니까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아프고 힘든 길이에요.


아프고 힘든 이유는,

천국에 데려갈 사람들은,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 뒤에는

하나님께서 모질게 간섭하신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의 결과이지.. 우리 스스로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 갈구고, 그냥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 상태가 현재보다 10배로 더 비참한 상태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나를

끊임없이 간섭/징계/태클 거셔서

오늘의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에 지금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그 바탕엔

하나님의 간섭/징계/태클하심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세월을 고스란히 거치면서,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자를 꺼내서

복음 전하는 목사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전 복음을 전해도 하나도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쬐끔 하나님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어요.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게 해 오셨구나 를 알게 되어요.


나오미도 그런 인생, 집중 간섭 당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리 저리 간섭하여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오미 스스로 온 것이 아니에요.

질질 끌려 왔어요.


오늘 본문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입니다.

“여호와께서~ 잉태케 하셨다”

“여호와께서~ 나오미의 잃어버린 것을 회복케 하시려고 기업 무를 자를 주셨다”


이 “여호와께서” 라는 주어(主語)를 놓치지 마세요.

“여호와께서” 란 말은 여호와가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를 망하게 한 것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고!

룻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준 것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룻이나 나오미에게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십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모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망하는 것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福)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왕 망해서, 새로 건축할 바에야, 일찍 망할수록 복입니다.

40대에 망한 사람은, 인생을 새로 건축할 시간이 40년 있다면,

70대에 망한 사람은, 인생을 새로 건축할 시간이 10년만 있게 됩니다.

    (70대에 망한 사람도, ‘새 건축’ 없이 죽는 사람보다는 낫겠지만요..)


그러므로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福)에 민족은 그 어떤 상황에 놓였어도 복(福)이고!

저주의 민족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저주에요.


그러므로 성경은 복(福)과 저주를 어떤 환경이나 조건으로 말하지 않고

어느 영역 안에 있느냐로 구분해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느 아래 있는지가 중요하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중요치 않아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福)이에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우린 모든 것이 복(福)인 것입니다.


예수 안이라고 한다면 망해도 복(福)이고!

흥해도 복(福)입니다.


그러니 삶에 무게가 무겁고 힘들더라도

그걸 내 삶이라 생각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럴 때 사도 바울 같은 안목으로 보게 됩니다. ↙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겨쌈을 느끼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땅에서 망하는 것이 복(福)이냐’ 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깨달아질 때 비로소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범사가 감사하게 되어 지고, 살아가는 내 삶의 무게가 가벼워져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사건이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려 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나오미 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나오미 속에서 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룻기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대신 찾아 주셨듯이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룻이 대신 되찾아 주는 구원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



◑나오미는 옛사람, 룻은 새 사람


룻기에서는 “나오미”와 “룻”이라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하나입니다.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동일한 운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의 약전(略傳) 속에 요셉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약전(略傳)이란? 이력서와 같은 뜻입니다.


야곱의 이력서(履歷書)에 요셉의 일생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이는 두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야곱과 요셉은 한 사람이에요.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요셉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야곱은 우리 옛 사람이고.. 요셉은 새 사람이에요.


이걸 나오미와 룻으로 비교하면

나오미는 옛사람이고.. 룻은 새 사람이에요.


그래서 룻기는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룻이 대신 되찾아 주는 구원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 입니다.


그런데 옛 사람 야곱이 얍복 강에서 죽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삭제 당하였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거듭났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난 새 사람인 이스라엘의 삶을.. 요셉이 대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의 약전(略傳)에 요셉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자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은 “예수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 야곱 속에는, 아담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새 사람 요셉 속에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니까,

“나오미 속에는 아담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하니까

“룻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사적으로 보면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한 요셉이나 룻은 모든 성도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요셉이나 룻 속에는

우리 성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도 함께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나 룻을 다루어 가는 모습 속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삶’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