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일 고전15:10, 약4:6 설교녹취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주제 요약
위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이하 바울)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은혜’라고 말할 때는, ‘일을 안 하는’ 개념을 연상한다.
그런데 위 본문 바울의 고백을 가만히 읽어보면
‘은혜’란.. 일을 전혀 안 하는 개념이 아니라
더 많이 수고/일 하고 나서..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은혜’라고 한다.
이 혼동되는 주제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 생각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수고/일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라고 여긴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럼 사도바울의 경우,
그가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지역마다 교회가 팍팍 세워졌느냐..
그게 아니다.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고,
또한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모든 수고를.. 바울은 ‘은혜’라고 설명하다.
※이 주제에 대해 우리 각자가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OO교단에서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강조하면서, 즉 은혜를 강조하다보니,
구원 받은 이후 성도의 성숙된 삶의 열매(행위)를.. 너무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떤 신학에 치우쳐 성경을 읽다보니까.. 자꾸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물론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 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은혜’의 전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개념 한 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혜’를.. 똑같이 표준/규격화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럼 ‘은혜’란 무엇인가? (정의)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행할 수 있도록
나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이것을.. 받을 만한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은혜가..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란 말은 맞는데..
그게 은혜의 정의definition는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특징 중 한 가지’를 설명하는 말일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떤 아빠가, 아들에게, 생일선물로 ‘USB’(외장 메모리)를 사 주었다.
그러면 어떤 컴맹은 ‘USB가 뭡니까?’ 하고 물어본다.
그때 그 아빠가 ‘값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뭔가 대화가 어색하다.
USB는, 아빠가 아들에게 선물로 ‘값없이 거저 준 것’은 맞지만,
그게 ‘USB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로 ‘값없이 거저’ 구원을 주셨지만,
‘값없이 거저’라는 표현이.. 은혜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즉, 은혜의 정의는, ‘값없이 거저주시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정의는.. 위에서 이미 설명 드렸다.
‘하나님의 명하신 바를, 내가 실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현재적 도우심’이다.
▲‘은혜’하면 생각나는 일화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결혼주례를 했던 날이었다.
예식장에서 주례를 해 보면, 모든 순서를 35분 만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주례자 역시 마음이 분주하고, 정신이 없다.
사람들도 결혼식에 올 때, 또 예배드리러 오는 마음보다는, 결혼 축하해 주러 온다.
이래저래 결혼식에서, 설교로 은혜를 나누기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첫 주례라서 그런지,
제가 식장에서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대단히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압도하시면.. 분위기가 잠잠해진다.
안 믿는 사람들도, 결혼식에 오는데.. 그들까지도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가족들 가운데, 울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그런 저의 첫 결혼주례였다.
그런데 딱 1주일 후에, 두 번째 결혼 주례가 있었다.
식장은 종로5가 ‘여전도회관’이었다.
저는 교회 봉고차를 타고, 그곳까지 운전해서 가는데..
토요일 시내교통이 너무 복잡해서, 다행히 늦진 않았지만, 벌써 많이 지쳤다.
그래서 제가 식장 의자에 앉아서, 기도로 준비하는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지. 지난 토요일에도 나와 함께 하셨잖아!’
그런데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이,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내가 여태까지 너와 함께 한 것은, 한 번도 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은혜였다.’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에, 식장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주례를 하니까, 오늘도 주님의 임재가 자동 나타나겠지..’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는 내 몸자세를, 고쳐 잡았다.
처음에는 식장에 오느라 지친 심신으로, 털썩 주저앉아 기도하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의자에 허리를 곧추 세워 앉았다. 그리고 간구했다.
‘주님, 오늘 주례도, 주님이 함께 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날도, 주님의 은혜로, 주례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은혜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주님의 도우심(주님의 임재)이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값없이 거저 주신다는 것이다.
그 은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그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내게 오셔서 운행하지 않으시면,
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 가운데 이룰 수 있는 능력임을 알고 (내가 아니라)
날마다 철저히 주님의 은혜만 바라야 하겠다. 그게 겸손한 사람이다. ↑
*은혜란.. 주님의 일을 이루게 하시는 도우심이라고.. 서두에서 정의했다.
▲여러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사람이 나이가 젊거나,
또는 특별히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은,
‘내가 뭔가 결심하고, 투신해서 하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업이든/공부든/사역이든..
‘내가 밤잠 안자면서 뛰고, 내가 철야/금식기도하고, 내가 부지런히 살면.. 뭐 든지 된다’
이런 낙관적 미래를 가진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그래서 보통 내가 힘을 주면 안 되고, 오히려 힘을 빼면.. 된다고 한다.
서두에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고전15:10
우리의 일과/수고와/행함은.. 내 수고였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롬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런 구절을 보면, 은혜와 행위가 상반된 개념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통해서,
‘내가 아무 행위 없이 가만히 있어도,
거저 선물로 주시는 것이.. 은혜다’ 라고 (부분적인) 이해를 하게 된다.
나아가 ‘내가 노력을 하면.. 그것은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착각한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할까봐’ ↑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전15:10절과
즉, ‘일하게 하시는 은혜’의 개념과 (일 안 해도 주시는 은혜와 비교 요)
동시에 봐야 한다. 한쪽 면만 보면 안 된다.
............... 더 읽으실 분 ................
▲은혜는.. 되돌아보면서의 고백
(예정론도.. 되돌아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예정했다.. 라고 봐야지
길에 가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을 예정했다/안 했다’라고 보면.. 극단에 빠지듯이)
은혜도.. 일을 열심히 하고 나서..
되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였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지..
일을 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된다’ 하면서, 팔짱 끼고 있으면 안 된다.
(물론 무작정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확인하고, 사역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을 확인하고도, 모든 것을 은혜 핑계를 돌리면 안 된다는 뜻.)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섬긴 효자는, 장례식 때
‘저는 불효자입니다. 더 잘 모실 수도 있었는데.. ’ 하며 탄식한다고 한다.
반대로 부모를 아무렇게나 돌보고, 거의 내팽개친 자녀는, 장례식 때
‘그래도 나는 자식 도리를 할 만큼 했다’ 라고 무덤덤해 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고백이 반대로 나와야 하는데..)
아마 부모를 잘 모신 효자는.. 일을 하다 보니.. 일이 자꾸 더 보이는데
거기까지 다 봉양하지 못해서 ‘자신을 불효자’로 탄식하고,
불효자는.. 일을 거의 안 하다 보니.. 일이 자기 눈에 안 보이니까,
‘자기는 자기 할 도리를 거의 다 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도 마찬가지다.
은혜는 .. 주님의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의 부족함’이다.
그러나 일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기가 일한 고작 몇 가지 일만 보인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했다, 저것을 했다’며.. (은혜가 아니라) 자기 공을 내세운다.
▲홍콩의 사역자, 재키 플린저의 책 <추룡>에 보면 *Chasing the Dragon
처녀로서,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완전한 우범지대에 들어가,
거기서 창녀, 마약중독자, 갱단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우리가 생각하면,
‘야,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며 입을 쩍 벌린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면 이해가 된다.
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와 함께 하시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