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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자란다

LNCK 2012. 2. 10. 17:11

 

◈키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자란다      막4:26~27     가톨릭 글 스크랩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고,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막4:27



◑하나님이 키우시고, 자기들끼리 서로 배운다.


과거에 제가 수련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수련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야심(?)에

많은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선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형제들을 내가 ‘잘 양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키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 생각은 너무도 잘못되었음을 깨달아가게 되었다.

형제들은 하나님이 키우시고, 또한 저절로 크는 것이지..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형제들은 서로 배우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키우는 것이지

수련원장인 사람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차로 저는

<교육무용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라 하더라도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 -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교육학적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달은 결과였다.


그때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한 책임감에서 형제들을 양성시키기보다는

실질적인 양육자는 성령이심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식 키우기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은 누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실 스스로 크는 것이다.

하나님이 키우시고,

또한 자기들끼리 서로 배우며, 스스로 자라고 커나간다.


우리는 가끔

‘내가 누군가를 키운다’고 생각하기에

그 결과에 연연해하는 것은 아닐까?


수련자가 훌륭하면 마치 ‘내가 교육을 잘 시켰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내 탓이오’ 라고 생각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웃고, 울고 한다는 이야기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님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키울 수 있고

내가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어주시는 선이나 결실이 있다면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자.


혹 나를 통해 좋은 결실이 없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아니, 어쩜 아직 싹이 트고 있고

거름을 주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자.


이렇게

그 어떤 결실에 대해서도 집착과 판단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기뻐 뛰게 되리라.



◑저를 키우소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 커진다.”


지난 회의에서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는 ‘패배주의’를 경계해야한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저의 이 말을 보완하여, 한 형제가 ‘승리주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패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

제가 승리주의를 얘기하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형제의 현명한 지적처럼, 승리주의도 우리는 경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신앙을 빙자하여.. 내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커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자씨 같은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의 나라가 (겨자씨를 빙자해서 )커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크게 하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라가 커지기를 바라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 나라를 ‘내가 키울 수 있다는 교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지극히 작은 겨자씨를 뿌리지만

어떻게 그 씨앗에서 줄기와 이삭이 나오고, 이삭이 영그는지를

그 사람은 모르고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겨자씨 같은 우리,

겨자씨 같은 우리 능력과 정성과 노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음을 없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비록 작아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니

있는 것을 없이 여기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도 깎아내려 쓸모없다고 무시하는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시고 크게 만드십니까?


물론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만

하나님은 작은 것도, 크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에

작은 것도 작다고 탓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랑도 크시고, 능력도 크시기에..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당신의 큰 사랑과 능력을 주소서!

내가 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커지도록,


그래서 당신의 나라가 커지도록

저의 사랑과 능력이 당신의 사랑과 능력만큼 되도록

겨자씨 같은 저의 작은 사랑과 능력을 먼저 키우소서!”

 

 

 

 

2인승 자전거 타기


이 세상 나라는 인위적입니다.

인간본위 또는 자기본위라고 하면 더 적절할까요?


하나님도 없고 땅도 없습니다.

내가 씨 뿌리고, 내가 싹트게 하고, 내가 자라게 하고,

내가 열매 맺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온통 “내가” 하는 겁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씨는 내가 심지만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은 땅이 저절로 그렇게 하게 합니다. 막4:27


“저절로”라는 말은

인간행위는 무위無爲라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땅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땅, 자연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그대로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그리고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위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씨는 우리가 심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애쓰지 않고 코 풀게 하셨다고 할까요?

애쓰지 않고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씨만 뿌리면) 그 중간 과정은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해주십니다.


우리가 선의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선을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당신의 전문이시니

우리가 뭘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수록..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내가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2인승 자전거를 타는 셈입니다.

한강변에 가면, 많은 연인들이 2인승 자전거를 타고

아빠와 딸이 2인승 자전거를 탑니다.

해질 무렵.. 석양 가운데, 그렇게 자전거 타는 것을 보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때 남자친구와 아빠는.. 여자 친구와 딸이 가자는 곳으로

데려 가는 것이 기쁨입니다.

여자 친구와 딸은.. 남자 친구와 아빠가 운전하도록 운전대를 맡기고

그저 페달을 같이 밟음으로 힘을 보탤 뿐입니다.


2인승 자전거처럼

하나님과 우리는 한 곳을 향해 가고 같이 갑니다.

사랑으로 가고, 사랑을 향해 갑니다.

가는 길이 쉽고 행복합니다.  



◑버려야.. 따른다


몇 년 전에 성지순례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멋진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성당보다도, 성당 앞의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비둘기 떼였습니다.


특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깨에 또는 손바닥 위에 앉기도 하는 비둘기를 보면서..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광장 한 가운데에 서서, 손을 들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지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어깨에 통증을 느낄 정도까지 되었지만

단 한 마리의 비둘기도 제 곁으로 오지 않더군요.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줄기차게 비둘기들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것들이 인종차별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뒤, 비둘기들이 저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새 모이를 사서는 자기 손바닥 위에 놓았던 것입니다.


즉, 비둘기는 그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새 모이를 먹기 위해서.. 그 사람 곁으로 가는 것이었지요.


그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빈손으로는 비둘기를 제 곁으로 데려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손만 내밀면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오는 것인 양, 착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불평을 던지지요.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냐고, 왜 나는 이렇게 운이 없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시면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막1:17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의 응답 방법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 “저를 제자로 쓰시겠다면,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되죠? 제가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요?”

등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물과 배와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곧바로 따라나섭니다. 막1:18


만약 조건을 내세웠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주인공으로서 장식하지도 못했겠지요.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내어놓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덧붙여서.. give and take 식으로, 내가 뭘 투자해서 뻥튀기로 얻겠다는 생각도 잘못이지만,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또 무슨 은총을 받기만 기대하는 것도.. 내 욕심입니다.

주님은 뭘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헌신과 사랑을 받고 기뻐하시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