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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창조, 거듭남

LNCK 2012. 2. 13. 11:26

◈구원, 창조, 거듭남                 히11:3,  사57:1~2        설교스크랩, 출처

 

아래의 ◑2. 단락은 많이 못 들어본 생소한 내용인데,

성경적 구원 이해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관련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 

 

 

◑1. 나오미의 모습에 나타난 ‘구원’

 

나오미는 예루살렘에서 살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문으로서는 재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남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낯선 이방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무너진 가문(家門)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보아스 라는 고엘을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 누가 투입이 되는가 하면.. 룻입니다.

룻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철저히 나오미를 위해서 희생만 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기업을 잇게 해 주기 위하여 투입이 된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룻기의 중심 인물은 나오미임에도.. 제목을 <룻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가 룻기의 핵심이에요.

나오미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룻은 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룻의 희생이 곧 예수님의 희생과 같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무너진 나오미가

룻의 희생으로 기업을 이어갈 아들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천국이라는 기업을 유업으로 받는

구원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룻기는 곧 예수님의 구속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미의 모습 속에는 성도의 구원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오미는 원래 예루살렘 사람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방나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는 곧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우린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의 행복이나 기쁨이 환경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사업에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출세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 것으로 기쁨을 찾고자 합니다.

 

나오미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오자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나오미는 떡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있는 땅을 버리고 떡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떡을 쫓아갑니다.

떡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이 안겨 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러한 굴레를 돌고 돌아

결국엔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돌아 올 땐 나오미처럼 슬픔에 사람으로 오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이 가는 코스에요.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가 타락과 징계 그리고 회복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가 아담이 범죄로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주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으로 말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잃어버림과 다시 찾음 속에 구원의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다 함은, 원래 소유하던 것을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포커스는 이 예수님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아들을 얻는 것’은 ‘기업을 잇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업을 잃어버린 여인은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인 룻이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는데 희생을 합니다.

나오미는 룻의 희생으로 기업을 잇게 됩니다.

 

신약에 오면 ‘기업을 잇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오미는 아무 일 하지도 않고, 구원을 받은 것이 됩니다.

나오미는 룻이 낳아준 것을..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얻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도의 구원에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것을.. 우린 가만히 앉아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가만히 앉아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

 

 

◑2. 창조, 구원, 거듭남

 

창조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조나 구원이나 같은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창조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음이란..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黙示라는 창세전에 있던 것을, 역사歷史라는 곳에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려낸다는 뜻입니다.

창세전에 언약된 것을 실체화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보세요.

하나님이 “있으라” 명령하잖아요.

 

명령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명하시면, 뭔가 하나씩 툭툭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곧 명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곧 생명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즉 명하시면.. 생명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창조가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마치 묵시라는 생명 주머니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 둘씩 역사 속에서 창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면 없는데서 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롬1장에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무속 신앙은 만물을 숭배하는 신앙이에요.

 

그러니 그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다만 그들이 모를 뿐이에요.

 

성경이 보이면,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충만 함을 읽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단 말입니다.

만물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히11:3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黙示에요.

그리고 보이는 것은 역사歷史에요.

 

‘보이는 이 역사’가 ‘보이지 않는 묵시’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이걸 만물이 주께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창조가 뭐라고 했나요?

불러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묵시 속에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역사로 나가!’

그래서 제가 역사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있던 나를, 하나님이 역사로 내 보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역사 속에 있는 정낙원이는 묵시에서 역사로 잠시 출장 왔어요.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삼층천에 갔는데 거기서 묵시 속에 있던 바울을 만났어요.

 

역사에 있는 바울은 묵시에 있는 바울의 그림자에요.

그러니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바울은 묵시에서 출장을 온 바울이에요.

역사 속에서 출장을 다 마치면 다시 묵시라는 삼층천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보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했어요.

바울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기쁘고 신이 나는 것입니다.

 

빨리 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군인이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5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창세전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아버지여 영광 받으세요!’ 라고 했어요.

이는 “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여 창세전에 우리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다시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아시겠어요?

이걸 알아야 해요.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제대하는 것이에요.

성도에게 죽음이란?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러니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제발 이 비밀을 좀 아시길 바랍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삶이 가벼워져요.

 

예수님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주시려’고 오셨어요.

구원이란..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죽음을 감사해야지..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그건 온전한 믿음이 아니에요.

 

죽음이 두렵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죽음이 감사로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사57:1-2

 

의인의 죽음은 ‘평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의인이란.. 모든 성도를 지칭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죽는 것을 안 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침상에서 편히 쉬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버리고 쉬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 세상은 저주 받은 곳이에요.

그러니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복(福)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날을 소망하게 되어요.

성도는 이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땅을 지향하고 살고, 성도는 하늘을 소망하고 살아요.

종교인은 호적이 흙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성도는 호적이 하늘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종교인들은 교회에 와서도 땅에 일에 관심을 두지만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도 하늘에 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묵시에서 역사로 잠시 출장을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묵시’라는 창세전 세계에서

‘역사’라는 이 세상에 잠시 출장 왔다가

하나님 심부름을 다 하시고 다시 원래 계시던 그곳으로 돌아가셨어요.

 

우리도 그리로 돌아갈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찾아짐을 통해서 돌아갑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런 구원을 구약에서는 창조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신약에선 거듭남으로 말하고 있어요.

죄인이 구원받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창조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원래는 ‘위에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을.. ‘하늘로부터 창조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