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로 초대받은 자들의 운명 요15:12~17 출처보기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2~14
◑참된 친구란.. 친구를 위해 죽는 자
▶위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를 “친구”라고 할까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유유상종 할 수가 없어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친구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정의하신 ‘친구’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13~14↑
그럼 나의 친구는 누구인가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친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우리의 친구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친구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서, 맺은 과실은 우리들입니다.
과실果實이란.. 나무가 맺어낸 결과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맺은 결과물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성도를 살려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초대합니다.
이젠 역逆으로 우리더러.. 예수님처럼 ‘친구를 위하여 죽으라’고 합니다.
이걸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2
이 서로 사랑이라는 과실을 맺게 하려고 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친구’라고 한다면, 내가 명한대로 이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더러 과실을 맺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과실을 맺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과실을 맺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님이 맺으셨던 그 ‘친구를 위한 죽음’이라는 과실을
우리를 통해서 맺으시게 하실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
▶요14, 15, 16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면
성령이 오셔서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럼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거처로 삼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오시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서 성령으로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로 오시면, 우리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 살펴봅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택하여서 친구로 삼은 목적은.. 과실을 맺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과실이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맺는 과실이란, 사랑이라는 과실인데
그 과실이란 바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15:12~14
▶이 일을, 먼저 예수님이 본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살아났습니다.
‘야! OOO이!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그래서 넌 죄사함 받고 살아난 것이다!
너 이 사랑을 아니?
이 사랑을 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너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하십니다.
너도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죽은 그 자리에서, 다른 친구를 생산해 내신다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친구 된 자의 운명>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성도를
‘예수처럼 세상에게 죽임 당하게 하려고’
예수님의 친구로 선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주 고약한 친구로서의 선택 당함 입니다.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여 살다가 죽임(핍박 포함) 당함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에게 빨리 원수를 갚아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직 이 세상에 너희들처럼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숫자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운명’입니다.
그 동무들로서,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선택 한 것입니다.
‘너희들 내 동무로서 좀 죽어 다오’ 하십니다.
나도 너희를 위하여 죽었으니, 너희도 나를 위해서 죽으란 말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자 어떻게 친구가 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스데반을 친구로 삼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예수님 때문에.. 바울에게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의 죽음으로.. 바울을 구원합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 때문에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결국 예수님처럼 죽임 당합니다.
바울이 죽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예수의 친구들이 생겨납니다.
스데반이 ‘친구로서’ 죽지 않았다면
바울이 구원 받지 못했을 것이며,
바울이 ‘친구로서’ 죽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구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씨가 죽어서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또 다시 씨를 내고,
그 씨는 또 다시 죽어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듯이,
예수가 죽은 그 자리에.. 또 다른 예수가 나옵니다.
언제까지냐 하면 하나님이 정한 수數가 차기까지 입니다. 계6:12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친구로’ 초대 받았습니다.
그리곤 자기가 부인되는 자리로 밀려가게 됩니다.
자기가 부인 된/죽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과실들이 맺힙니다.
결국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예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속에는 예수님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도 있지만,
(이건 십자가를 지러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고요)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는/죽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건 부활해서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믿는데,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잘 믿지 않습니다.
그 ‘성령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더러
‘너도 친구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십니다.
기꺼이 핍박을 받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니까요!
▶예수님이 벽을 뚫고 들어오셔서 평강을 주십니다.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 마치 인공호흡을 하듯이
그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서 줍니다.
훅~ 하고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 속으로 성령이 숨처럼 쑤욱~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은 며칠 후 오순절 날에 이루어집니다.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주시고선 하시는 말씀이 압권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이(轉移)시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은 보내신 것은 죽으라고 보낸 거잖아요.
그러니 너희들도 나처럼 가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러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예수님의 일생을 그대로 답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왜 보내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으라고 보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예수님은,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 백성들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한 그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성령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어서.. 그들을 세상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사실은 예수님이 (성령님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통해서
직접 세상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지금 제자들에게 시킵니다.
성령을 주시고는.. 너희들도 가서 친구들을 위하여 죽으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었듯이.. 너희도 가서 죽으라고 합니다.
이건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 안에 들어가서 하겠다고 합니다.
▶중요하니 다시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누구 이름으로 오십니까?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지요.
아버지 이름으로 오셔서 죽으셨지요.
그럼 누가 죽은 겁니까?
아버지가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어서 우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를 예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이건 마치 요셉이 아들을 낳았는데 야곱이 내 아들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는데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쉬운 말로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 흉내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그대로 반복하십니다.
아버지가 하신 일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복습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리곤 세상에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누구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는가 하면.. 예수님 이름으로 나갑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나가서 죽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서 죽는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죽는가 하면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이 된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습니다.
▶친구란.. 친구를 위하여 죽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친구를 삼은 것은
결국 예수님이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하려고 삼으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직 구원을 받아야 할 예수님의 백성들을 찾아내는데
우리를 ‘미끼’(십자가)로 사용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또 다른 친구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를 예수님처럼 죽게 하시려고.. 친구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존재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 와 계신 것은.. 성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스데반을 친구로 삼고선
스데반을 다시 예수님의 친구들을 위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을 예수님의 친구로 삼고선
바울을 다시 예수님의 친구들을 위하여 죽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꾸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의 친구란..
예수를 위하여 죽임 당하기로 선택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고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어줌으로서 사랑을 보여 주었듯이
너희들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잘 믿는 성도/교회는
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는 성도/교회입니다.
예수 잘 믿었더니.. 잘 풀렸더라.. 많이 모이더라.. 재정이 풍부하더라.. 가 아니라,
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는 성도/교회가..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그럼 손해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권세와 능력’이 뒤따릅니다.
또한 주님이 주시는 ‘안식, 평안, 만족,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스스로 이 길을 못 갑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나를 drive해 (몰고) 가십니다. 보통 divine driven 이란 말을 쓰죠!
그러므로 억지로 끌려가면서도, 감사 찬송하며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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