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 자살과 베드로의 통곡 마27:1~10 출처
▲서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한 베드로가
도대체 가롯 유다 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일까요?
이들 두 사람의 자살과 통곡의 비교를 통해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신앙은, 그 윤곽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멸망을 결정짓는 행위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이겁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가룟 유다의 멸망을 확정짓는 ‘죄악’이 됩니다.
또한 베드로가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각.. 그것이 중대한 인생의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의,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
본문에 가룟 유다가 이렇게 얘기해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면서 자기의 죄를 뉘우칩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와 다른 단어를 쓰고 있으므로
그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가룟 유다를
아예 철저하게 악한 자로만 몰고 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죄를 범하였다는 이 감정은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통곡하는 베드로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죄를 범하였다’고 보는 이 가룟 유다의 심리 상태는,
나름대로 멋진 남자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평상심을 되찾고
그에게 마귀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발작이 그칠 때가 있지요. 그때는 거의 정상입니다.
예수님이 재판 받는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저분이 저렇게까지 정죄를 당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calm down 한 상태에서, 냉정을 되찾은 상태에서 확인하면서
자기가 잘못 했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 죄를 뉘우치는 상태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은 삼십을 돌려주면서, 목매달아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베드로와 비교해 봅니다.
베드로는, 유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통곡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보는 눈이 달랐던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합니다. :75
이 말씀이 굉장히 소중한 말이에요.
‘나는 죽을지언정 주와 함께 하겠다’고 확언, 장담하고 있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75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부인하고 저주할 베드로를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고 확언 장담하고 있는 그 순간에,
'이 제자는 나를 배반하는 자요, 나를 저주할 자요, 나를 부인할 자'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고도 그 베드로를.. 예수님은 당신의 곁에 끝까지 두시면서 사랑하십니다.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베드로가 자기를 발견한 게 아니라,
그렇게 저주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예수님 속에서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거예요.
자기 행위를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치졸하고 약하고 악한 자기를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끝까지 곁에 두시고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자기를 발견한 겁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죄 없는 예수님을 팔고 있는 그 행위 속에서.. 자기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망해서.. 자살해 버립니다.
이게 얼마나 멋져 보이고, 정직해 보이고 정당해 보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뭔지 아십니까?
가룟 유다를 바라보고 계시고 삼년 동안
그 제자(가룟 유다)가 나를 팔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데리고 다니시고 사랑하셨던,
다른 열 한 제자와 똑같이 대해 주시고 사랑하셨던 그 예수님의 마음속에서
가룟 유다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살까지 치달은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기 이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서 믿지 않은 겁니다,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모든 자살은
마음속에서 내 의식의 영역안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용납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온갖 악행을 다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생명을 살려두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려 두고 계시는.. 그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속에서 나를 발견하면
결코 내가 나를 죽일 수 없어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살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행인 것은,
그들의 자살행위 이전에 반드시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허락하시고,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피조물로서 용납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을 먼저 부인하고 나서야.. 자살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살도 어떤 강한 악플러의 악플 때문에 유발된 자살이라도 정당화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살은.. 반드시 자기를 지으신,
자기를 용납하고 계시고,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고
자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인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먼저 부인하고서야.. 비로소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집에 돌아갔을 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는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저주하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부인까지 했다고 얘기하면,
그 아내가 ‘나가 죽지, 왜 집에 들어오느냐!’ 아마 이랬을 거 같아요. 주1)
베드로는, 아내에게조차 그렇게 취급당해 마땅한 행동을 한 거예요.
비겁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고
그가 호언장담한 걸 생각하면, 더 치사하고 더 악한 거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살하지 않고 통곡합니다.
왜 통곡합니까?
아내까지 장모님까지도 사람취급 안 할 수밖에 없는,
아내가 정당하게 자기를 무시할 수 있고,
장모님이 정당하게 자기를 비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기를,
예수님이 받아들여 주셨고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저주할 것이고, 자기를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같이 그런 괴로운 순간에까지, 끝까지 데리고 다니시면서 사랑해 주셨던
예수님에게서 받아들여진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유명 인사들이 악플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만,
인류 역사이래 최고의 악플러가 누구 같습니까?
정말 외람되고 죄송하지만.. 하나님이세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어떤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악플과 같은 악플을 달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악플의 내용이 뭡니까? *악플 : 악한 + reply (댓글)
인류 역사이래 만들어진 형벌 중에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의 저주
그것이 나에게 합당한 자라고.. 내게 악플을 다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굳이 그거를 악플이라고 얘기하자면,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서, 누가 나에게, 그 정도 강한 악플을 달 수 있겠습니까?
'너는 십자가의 저주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악플을
누가 나에게 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거기서 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가장 악한 자’라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주님이 저주 받고 죽은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렇게 저주 받아야 될 나 대신에, 주님이 죽은 걸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강한 사랑을 가지고 나를,
그 악한 저주가 합당한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발견하는 거예요.
▶회사에서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 우울하십니까?
자녀들이 나를 비난하고 있습니까?
아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남편이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까?
또 내가 한 행동을 내가 볼 때에
가룟 유다처럼 너무나 내가 밉고 내가 죽이고 싶습니까?
그러지 마세요!
그런 나를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에게서 하늘아버지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도 넘어지고 깨어지고
내가 나를 봐도 형편없는 나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 속에서
나를 보면서 힘내서 하루를 살아가는 거예요.
내 속의 죄를 보면 확 죽어버리고 싶지요,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나 거기서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다.
다~ 예견하시고 다 알고 계시면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고 받아들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거예요.
▶마치는 말
가룟 유다 멋진 남자입니다, 세상적으로만 보면.
용기 있는 남자입니다, 민족을 사랑한 남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동 속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가 나타난 걸 보고
자살을 할 줄 아는, 명예를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게 악입니다.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내가 발견한 나보다 더 악한 나로 보시면서도
독생자를 죽이면서 나를 수용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자들이.. 신앙인이고 선민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 자들이 많지 않고,
이제는 그저 아내까지도 남편까지도 자식들까지도 나를 무시하고,
직장에 나가서도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봐도 잘난 구석도 없고 내 세울 구석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부족함과 악행을 다 아시고 받아들여주고 계시는 사실을 알고,
오늘도 우리의 무릎에 그 사실로부터 힘이 주어지게 하셔서 하루를 살아가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여 주고 계신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세상의 무게를 버티며 기어코 승리해 낼 수 있는
하늘의 아들들, 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
주1)
그 아내가, 만약 신숙주의 아내와 같았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나가 죽어라 예수님이 당신에게 3년 동안 사랑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느냐!
차라리 죽지 않고 몰매 맞고 초죽음이 돼서 놓임을 받더라도
당신이 그럴 수가 있느냐?’ 신숙주의 아내가 그랬잖아요.
사육신과 다른 길을 걷고 단종 임금에 대한 충절을 저버리고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기가 왕에 오른 세조 편에 섰던 그 신숙주를 향해서
아내가 침을 뱉고 자살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전해지는 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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