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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성령님께 이끌리는 삶 Paul Washer

LNCK 2012. 3. 1. 11:13

www.youtube.com/watch?v=zXFS979sUDA

◈성령님께 이끌리는 삶                눅6:19           text출처,    동영상 출처 

 

Pray and Be Alone with God 총52분 中

 

P1   P2    P3 (현재페이지)   P4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주님은 성령에 의해 강권적으로 시험 받으시러 광야로 내몰리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에서 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성령이 이끄시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사셨다면,

그렇다면 연약한 인간인 우리도, 당연히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에, 민감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당신은 매일의 삶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페루(Washer 목사님의 주된 사역지)에서, 저는 이런 말을 잘 씁니다.

한 사람이 믿음의 경건한 길을 가지 않으면

“그것은 술 취한 사람이, 아마존(위험이 가득한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술 취한 사람이 눈이 가려진 채로, 가족들과 함께,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채워진 스피드보트에 앉아, 아마존으로 돌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삶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엔 2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에는 너무 무지합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으며, 성경적 지식도 너무 무지합니다.

 

그는 자기가 늘 성령에 이끌린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성령에 이끌려서 하는 말과 행동은.. 말씀에 모순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짜인 것을 압니다.

 

2) 반대쪽 극단은 ‘말씀 말씀’ 하면서, 성령의 인도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경우입니다.

그는 말씀에 관해, 성경 해석에 관해, 지식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에 대해 무지합니다.

 

성령님은, 가끔(늘 그렇지는 않지만), 이상한unusual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습니다.

말씀에 위배되지는 않지만, 성령님은 상식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가운데,

이런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것도 극단적인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말씀에 근거하고, 말씀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해, 살펴보고 있잖아요)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가야지,

‘말씀’과 ‘성령’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는 그런 신앙은.. 극단적입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일수록.. 성령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말씀에도 능통해야 합니다.

 

눅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주님은 성령에 이끌리셔서, 요단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말씀 증거

요단에서, 광야에서, 갈릴리에서.. 계속적으로 성령인도하심을 받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래 구절은, 성령으로 사역하고 계심을 증거 합니다.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에 권능에 의한 사역입니다.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역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모델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같은 것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계명을 지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신약에 나오는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려 합니다.

그 계명들은.. 마치 구약 돌판의 율법처럼.. 안 지켜도 되는 줄 압니다.

 

또 현실적으로, 자기가 지켜보려고 하는데도.. 그 계명들이 지켜지지 않으니까,

아마 더욱 더 계명들을 제쳐놓게 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 육신의 힘으로 그것들에 순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선언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다만 그럴 힘이 없는 것뿐이에요.”

 

맞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성경을 펼쳐서, 그 계명들을 봤을 때

그 계명들을 지킬 방법은, 나를 도우시는 성령의 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성경의 계명들을 읽으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 하나님! 저를 성령으로 채워주세요”

 

그래서 “성령의 인도, 성령의 충만함”은 믿는 자의 지속적인 부르짖음이어야 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폴형제, 우리는 성령을 이미 가졌습니다.”

 

그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스펄전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더 명백히 보게 해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펄전의 말은,

성령이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사람은,

더욱 더 성령을 구하게 되어 있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성령을 구하지도 않고, 성령의 인도에 대해서도 둔감하다면,

어쩌면 그것은 아예 성령이 내주하지 않거나, 성령을 근심시켜서 떠나버린 경우입니다.

또는 지식적 결단주의에 의해 예수 믿은 사람은, 성령이 아예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회심한 후에 제 큰 형, 핏맨이 책을 한 꾸러미 들고,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자서전> <조지 뮬러의 자서전> <허드슨 테일러의 영적인 비밀> 등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그 책들 말고도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 시대와 장소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만,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섬긴 그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들을,

책을 탐독하면서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들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실한 기도생활,

-성령으로 민감하게 인도 받는 삶,

-성령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이런 공통된 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눅5: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저는 이것을 주목해서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습니다.’

                    the power of the Lord was present to heal them

온전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그는 성령에 이끌려, 그가 한 일들을 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침례교회는, 예수님이 행하신 그 성령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더 절박합니까?

 

예수님이 성령의 임재와 함께 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미국 침례교회는 매우 바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미국 침례교회는, 성령운동에 대해 가장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천국에 가신 제리 폴웰 목사님 같은 분은, 공개적으로 오순절 운동을 비난했으며,

제리 폴웰 생전에는, 오순절 교파와는 절대 강단교류가 없었음.

 

우리(미국 침례교회)는 아주 많은 가짜 사역을 보고 있습니다. 95%정도가 가짜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사역이 행해지고 있다는 뜻.

     참고로, 폴 워셔 목사님은, 미국 침례교단 소속 

 

말로는.. 사역들이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성령의 힘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씀에 모순됩니다.

     아마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거나, 사역이 너무 메마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인듯

 

그러나 우리 침례교인들은 가끔 계속 그것들을 행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관하여) 더 반대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채워져야 하는, 지속적이고 절박한 요구가 있습니다.

 

눅6:19절은 말합니다.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virtue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눅8:4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virtue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킹제임스역은 virtue가 빠져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는 ‘두나미스’(능력 power)으로 되어 있는데,

킹제임스역은, 그것을 virtue로 번역했습니다.

 

virtue는 능력이지만, 외적 능력보다는, 내적/도덕적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보통 한국어로는 ‘덕’으로 번역합니다.

 

예수님의 두나미스(능력)는

어떤 신비한 외적 능력power도 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내적/도덕적 능력virtue에 의해서.. 그 병고치는 능력이 나왔다는 의미로

킹제임스 성경이 virtue 라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power대신에)

 

그런데 한글개역은 능력이라고, 즉 power란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 편.

 

예수님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으로 휩싸인,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사역이 되어 질 때, 성령이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그게 내적 능력virtue이든지, 외적 능력 power이든지,

성령으로 사역하는 사람은.. 뭔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가고 나면.. 지쳐서 털썩 주저앉습니다.

능력이 자기에게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냥 오랜 시간의 사역 끝에, 육신이 피곤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은.. 뭔가 내게서 빠져 나가서.. 사람을 고치기도 하고,

그 외 여러 가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 할 때는,

그 설교가 끝나고 그들은 완전히 탈진합니다.

힘(virtue)이 그들에게서 빠져나간 것입니다...

 

당신은.. 사역 후에.. 탈진하십니까?

탈진이 없이, 그저 맹숭맹숭 하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