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상품 포도나무의 들포도열매, 그 처방 사5:1~8, 렘2:21 스크랩, 출처
※너무 칼빈주의 한 쪽 측면으로 치우친 설교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측면도 필요하므로 스크랩 해 둡니다.
렘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극상품 포도나무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가나안에 심어 놓았습니다.
가나안 땅이란 애굽과 반대되는 땅입니다. 속성이 다른 땅입니다.
애굽은 <인간의 힘으로> 사는 땅이라고 한다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땅입니다.
애굽에서는 내 힘이 통용이 되었지만
가나안에선 인간의 힘은 일절 통용되지 않아요.
쓸모가 없어요.
왜냐하면, 가나안은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농사를 지어주는 땅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이 살게 해 주시겠지..’ 라는 믿음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마치 부자 부모님 아래 사는 어린 아이가,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가나안에 심겨진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심겨진 나무입니다.
성경에는 이 이스라엘을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극상품 포도나무의 들 포도열매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가 맺혔도다.”
극상품이란.. 최상품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이라는 밭에, 가나안 7족속이라는 거친 돌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씨를 파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 속에서 애굽 나라에선 볼 수가 없는
‘은혜, 공평, 정의’이라는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셨습니다.
힘에 논리가 아닌, 은혜와 사랑의 법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 참아주고 돌아보며,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애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강포와 악독이라는 들 포도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들 포도란.. 애굽 백성들의 삶을 말합니다.
애굽에 삶은 한마디로 탐욕의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들 포도’를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산해내지 않고, 마귀적인 탐욕을 토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배만 불리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봅시다.
사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셨던 것이 있습니다.
공평(公平)과 정의(正義)였습니다.
그런데 맺은 것은 포학과 탐욕이었습니다.
남에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악당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꼭 이 시대의 우리들 같아요.
▲가나안 땅은 공평한 땅입니다.
모두가 동일한 분량으로 분배를 받고 나누어 가진 땅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은혜로, 공짜로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토지를 사고 파는 것을 금지했어요.
설령 사고 팔았다 할지라도.. 희년(禧年)이 되면 다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희년 제도를 준 것은 욕심 부리지 말고
서로 돌아보고 사랑하면서 하나 되어 살라는 겁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때의 정신으로 산다면 탐욕을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공평하게 살면 됩니다.
어차피 공짜로/은혜로 사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애굽과 다른 모습(은혜, 공평, 정의)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고 있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포하고 악독이 가득한 애굽 땅에서 빼내서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심은 겁니다.
가나안에선 이스라엘이 자기들 노력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비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선 자기 노력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가나안에선 파종을 하면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비를 주셔서..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탐욕을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사는 땅에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욕심으로 땅을 차지하는
애굽에서 살던 일들이 똑같이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이 이 이야기입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열매는 ‘들 포도열매’를 맺고 만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의 열매를 맺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은혜로 심었는데
맺힌 것은 압제와 강포라는 ‘애굽의 들 포도’인 겁니다.
▲예레미야의 책망을 봅시다.
렘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극상품 포도나무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셔서 약속의 땅에 심으신 것은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열매가 무엇으로 나온 것입니까?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삶이 나온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면서
욕심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생존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非언약의 땅인 애굽에서 빼내서, 약속의 땅에 심어 놓은 겁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언약)을 믿고 사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선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한 겁니다.
너희 힘으로 목숨을 지키려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목숨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애굽처럼, 자기가 생명을 지키는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게 탐심을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에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모으고, 또 모으고 한 겁니다.
이게 바로 ‘들 포도’ 입니다.
그래서 찍어 버렸다고 합니다.
◑왜 극상품 포도나무가 들 포도를 맺었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왜 이스라엘은 들 포도를 맺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 포도를 맺었어요.
왜 그럴까요?
이걸 예수님의 말씀으로 답을 찾아봅시다.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포도 열매를 맺으면 포도나무이고.. 무화과 열매를 맺으면 무화과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고.. 무화과가 포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원리와 순리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들 포도를 맺은 것은.. 그들이 (본질상) 들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극상품 포도나무로 불러 주셨지만,
그들의 속 내면은.. 여전히 '들 포도나무'였습니다.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그 본질이, 애굽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의 삶을 산 것입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죄인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죄인에게 아무리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훈련을 시키고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하여도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선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중간정리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직권적으로
이스라엘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인정해 주시고(선민으로 택해주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 극상품 열매(은혜, 공평, 정의 등)를 맺으라고 하셨지만
그게 도저히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그들의 바탕이.. 원래 죄인이라서..
극상품 열매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애굽인과 똑같은 들포도열매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새언약, 신약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새언약의 한 측면으로서) ‘새포도나무’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새포도나무에 접붙혀져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드디어 그 극상품포도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렘13:23을 봅시다.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 진데,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죄인이, 죄 안 짓고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흑인이 검은 피부는 그 어떤 것으로도 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 죄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는 태생적으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악한 종자라는 것입니다.
악한 종자이면 마땅히 죽어야지요.
저주 받아야지요.
그런데 저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은 다 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난 자들을 가나안에 심었습니다.
애굽에서 난 자를 가나안에 심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애굽 사람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삶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와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순종이 될 것 같으면 용서가 필요 없어요.
순종이 안 되기 때문에 용서와 자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은 것은
다른 의미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로 부르셨지만,
사실 근본 태생은 여전히 들 포도나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은혜와 상충하는 율법이라는 법을 주었습니다.
은혜는 살리는 것이고,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어지요.
이 모순이 복음이에요.
복음은 모순으로 주어져요.
그러나 모순이 아니고 하나에요.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중략 주1)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도 인간은 변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걸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나와 곁에서 도와주었지만
끝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인간의 실상을 폭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보아라!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어도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죄인에게 은혜를 주어도
죄인은 악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정답을 알려 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시험한 겁니다.
이걸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온 인류를 테스트 한 겁니다.
인간이 이런 자라는 것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 하였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럼 인간에겐 하나님이 바라신, 참 포도가 맺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전 살 수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스라엘은 이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입니다.
너희가 포도나무가 아니라 내가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를 의인화(擬人化) 하면
너희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농부라고 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가지고
농사를 짓겠다고 합니다.
어떤 농사를 짓는가 하면, 들 포도나무를 참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일을 하십니다.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으로 창조하십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게
접을 붙이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인자에 거하고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자는 은혜이고 엄위는 법이에요.
이는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까불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적용
▲가지를 지탱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나무가 가지를 보호합니다.
나무가 가지에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가지에게 맺혀지는 것마다 나무의 것입니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고 떨어져 있으면
아무리 맺고 싶어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붙어 있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히고.. 떨어져 있으면 애써도 안 되어요.
▲믿음을 받은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쉬어요.
반대로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자기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봉사하고 헌신하고 연보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쉬워요.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봉사 하면서 감사하고, 연보하면서 감사하고, 충성하면서 감사해요.
자랑도 하지 않아요. 그냥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해요.
그러니 하라/ 말라 할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 알아서 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스스로 해요.
하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머리로는 청산유수인데
손발이 움직이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열매로, 그 가지의 본질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지 아니면 떨어져 있는지.. 그 삶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붙어 있으면..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속성이 나올 것이고
떨어져 있으면.. 마귀의 속성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은혜와 긍휼이 나올 것이고
떨어져 있으면.. 법과 심판이 나올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곧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붙어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삶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 줍니다.
이건 윤리 도덕적으로 온전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정신으로, 어떤 자세로 사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에 속하였는지, 은혜에 속하였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고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행하면, 그 행함이 자기 의가 되어서 사람들을 죽여요.
자기 의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해요.
자기 힘으로 하니, 그것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기준이에요.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어요.
항상 으뜸이 되고자 해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욕을 합니다.
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자기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교만입니다.
원리적으로 본다면, 매사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자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예수의 마음이 나오지 않고, 마귀의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생명이 나오지 않고, 죽음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힘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내 쪽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가로 판단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알면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성도란.. 자기에게는 선(善)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선(善)이 나왔다고 하여도
그 선(善)은 자기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인 예수그리스도 것입니다.
성도가 내어놓아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사는 것이.. 참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기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지는 뿌리에서 공급되는 진액으로 사는 자이지, 가지가 진액을 만들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그 안에서 예수님의 것을 토하여 내게 하십니다.
이걸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은혜의 복음, 다시 정리
▲옛 언약은 우리더러 열매를 맺으라고 율법을 주셨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이 맺으십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열매를 맺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런데도 옛 언약에 속한 구약 이스라엘은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가짜 포도나무에게 아무리 좋은 것으로 주어도.. 들 포도를 맺더라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인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인간은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 이스라엘은.. '예수가 왜 와야만 하는지' .. 길을 닦아 준 것입니다.
왜 참 포도나무가 오셔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가 오시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은 오직 하나.. 참 포도나무가 오시는 것입니다.
이제 정한 때가 되어서 농부 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보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농부가 되셔서
예수님에게 접을 붙여서.. 나무를 바꿔주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서.. 참 포도나무에 접을 붙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바라는 열매를 맺고야 맙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접붙임을 당하면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이란.. 같은 운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기차 레일과 같습니다.
그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사도이고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그 레일에 올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린 그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이 레일을 따라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쓰나미처럼 우리의 삶 속으로 덮쳐오는 것입니다.
이걸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겁니다.
이젠 인간들에게 맡기지 않고 주님이 직접 끌고 가시겠다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이젠 실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직접 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실패 할 수가 없습니다.
...................
길어서 중략된 부분 주1)
▲하나님은 왜, 은혜로 선택을 입은 자들에게 법을 주셨을까요?
이는 법으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법이 동원된 것입니다.
법을 통하여서, 은혜를 알게 되고.. 은혜를 통해서, 법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택된 민족에게 법을 주신 것은
은혜를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가지고, 너희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 알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너희들은 법대로 하면 다 죽어야 할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법이 은혜를 드러내 주고 있으니, 법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알고 ‘율법도 거룩하며 신령한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과 복음은 모순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이방인들에겐 없는 율법을 주셨어요.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에요.
율법을 주어서 그들이 애굽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럼에도 애굽인들처럼 저주 받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이 추상같을수록 은혜는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걸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법을 통하여서 은혜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 은혜가 삶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바라신 <좋은 포도열매>란..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이..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을 고백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이 나타나지 않고
자기 탐욕으로 이웃을 압제하고 해치는 포악을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율법을 지켰다는 법만 난무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율법의 판단만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못한 자 간에 차별과 우열과 서열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들 포도열매'인 겁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리야의 순종의 발걸음 (0) | 2012.03.14 |
---|---|
바울의 복음전파의 동기 의식 (0) | 2012.03.10 |
내가 참 포도나무요.. (0) | 2012.03.06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0) | 2012.03.04 |
하나님의 인내 3480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