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종교와 포퓰리스트 출32:1~4 11.12.11.설교녹취
◑유사 종교의 유행 시대
▲오늘날 우리는 유사종교의 난립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 종교는 쇠퇴하는 듯하지만,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종교의 기능을 대신하는 유사종교가 점점 더 유행하고 있다.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같은 것이 대표적 예다.
그는 非성직자이다.
하지만 그의 프로에는 심리적, 내면적 위로가 될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그래서 비록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어떤 효과를 주거나/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팬을 확보하고, 많은 정신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또 <긍정의 힘>같은 책도, 비록 목사가 쓴 책이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 행복한 삶,
행복을 위한 지혜.. 등을 말한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인터넷, 소셜 미디어, 연예인, 트위트, 가요 등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카타르시스(정화, 혼의 만족)를 얻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거기서 인생의 방향까지 배운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메튜 아놀드는
‘종교가 사라지게 되면, 시가 종교를 대신할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아직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역할을 대신할 만한 것은 많이 등장했다.
이런 것들은, 종교보다도 더 가까이에 있다.
기존 종교보다 더 자극적이고,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만족스럽다.
사람에게 어떤 삶의 질문이 있을 때,
기존 종교는, 좀처럼 그 해답을 쉽게 주지 않는데..
이런 유사 종교는, 그 해답을 인스턴트로, 빠르고 쉽게 준다.
예를 들면, 사람이 점쟁이를 찾아가면,
당장 궁금한 것에 대해 물어보고, 답을 얻는다.
‘우리 아이가 합격할까요? 이 사업이 잘 될까요? 그 사람과 제가 잘 맞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변이 옳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사람의 가려운 귀를 즉시로 긁어 줄 수는 있다.
이렇게 교회에서 당장 말해주지 않는.. 어떤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 유사종교들은.. 그 답을 즉시로 제시해 준다. 물론 그 답이 일리는 있어도, 맞지는 않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오늘날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대신에,
여러 유사 종교를, 그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사종교 현상’과 비슷한 현실 정치
※원래 이 글은 <설교문>이며,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글이 아니지만,
설교자는, 현실 정치가 지나치게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을 지향하고 있으면,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유사종교 현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 다 진리를 떠나, 사람들의 필요에 즉시 응답하려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우려를 낳는 현상은,
많은 사람들, 특별히 젊은 세대가, 기존의 질서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 분야에서 시작해서, 기존의 정당, 기존의 후보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제3의 정당’이 다 그런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정치 뿐 아니라, 인생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젊은이들은, 기존의 지도자들에게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세대로부터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을 불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득권이라는 것이다.
세대 간의 간격이 지금처럼 커진 적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부모님의 세대를 헝그리 세대라고 불렀다면,
자녀의 세대를 앵그리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부모 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자녀 세대는, 열심히 일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는, ‘하면 된다’ 라고 믿었는데,
자녀 세대는,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 이렇게 생각한다.
부모 세대는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할 수 있었는데,
지금 세대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장담할 수 없다.
거기에서 분노가 발생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제일 먼저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이다.
그래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불문하고, 포퓰리즘적 공약을 내 걸 수밖에 없다.
정치적 폭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나든지 말든지,
우리나라가 그리스처럼 되든 말든, 일단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보자는 것이다.
도리가 없다. 이 같은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일어나지 않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번 미국 대선에서 맥케인 후보가 ‘미국인들은 불평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 한 번 했다가,
엄청나게 뭇매를 맞았다.
오바마 대통령도, 흑인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자리에서
‘(흑인들은) 불평하기 보다는, 노력해야 된다’ 라고 말했다가, 욕을 먹었다.
사실 이 사람들은, 바른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이 바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리더십의 위기까지 닥쳐오고 있다.
정말로 국민이 들어야 될 말을 하는 사람도 없고, (뭇매를 맞으니까)
정말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들 표퓰리스트로 기우니까)
정말 국민이 들어야 될 말은, 희생, 노력, 헌신에 대한 말인데,
누가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그러니까 하는 사람도 없다.
만일 케네디 대통령이 취힘식 때 한 말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까를 물어보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라’
만일 그 말을 지금 이 시대에 했다면,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저/설교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기업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벌어봤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되는 것(정책)과, 안 되는 것을 안다.
무작정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는다.
예술인들처럼 감상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처럼 인기에도 연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책임 있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일궈본 적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기업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본적인 인생의 규칙은 바뀌지 않았다.
룰은 과거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사회가 잘 되고, 개인이 잘 되려면) 기본적인 열정, 노력, 실력, 근면, 경험, 동기,
이런 것들이 뻔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룰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룰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꾸만 다른 데(제3의 길 등)서 길을 찾으려고 하니까,
자꾸 엉뚱한 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유사종교’의 매력에 빠져서, 참된 신앙의 길을 버리듯이,
오늘날 사람들이,
괜한 ‘포퓰리즘’이나 ‘제3의 길’ 등의 미혹에 빠지면,
당장은 그게 진리인 것 같으나 결국 모두가 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설교의 주제로 돌아와서, 유사종교가 유행하는 이유
▲저는 이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함이 아니고,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는 만큼,
누가 신속하게 흡족한 대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곳, 이상한 곳에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기존의 교회가, 기존의 성경이,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들이 흡족하게 생각하는 해답을
신속하게 제공하지 못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엉뚱한 데(유사종교)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신앙 전반에 대해서 유념해야 될 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는, 인간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주제를 정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역할은 그것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1.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을 거부하실 때도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하는 현실적 문제이었고,
그것은 안 믿는 이방인들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듣고 싶어하는 말씀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이런 먹고 사는 현실적 것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께 요구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 안 믿는 이방인과 다름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해답을 요구하는데
이런 요구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주 매정하게 손사래를 치시며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요구한다면, 너희에게 해줄 말이 없다.
이런 것은 나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이런 식으로 항상 말씀하셨다. 아주 매정하실 정도다.
그러나 그게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작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다른 것(영생)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그 영생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된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노라면,
우리가 대답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간접적으로 얻게 된다.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노라면,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모든 형편에 대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등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님께 요구하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그래서 자칫하면 우리들, 사람이 시험에 든다.
우리의 너무나 절실한 요구에 대해.. 하나님은 대체로 침묵하시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런 먹고 사는 일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신다.
▲2. 또한 우리는 인스턴트에 너무 익숙하다.
수돗물을 틀면 당장 물이 콸콸 쏟아지는, 그것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데 익숙하다.
식료품이 필요할 때, 쌀이든, 과일이든, 마트에 가서 즉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쌀과 과일이 즉시 자라서, 인스턴트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이렇게 우리는 ‘인스턴트’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앙적인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원하는 때에 얻지 못하면, 다른 데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사울 왕이 하나님이 침묵하시니까, 당장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침묵하시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당장 거짓예언자를 찾아간다. 그런 습성이 있다.
▲오늘날 포퓰리즘, 선동정치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도 똑같은 원리다;
자기가 원하는 해답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데서 해답을 듣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수는 없지만,
당장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말은 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 신앙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인스턴트로 응답을 얻지 못하고,
또한 그 응답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그래서 유사종교로 기웃거리게 되고, 그래서 유사종교가 유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디시지만, 유사종교는 인스턴트다. 빠르다.
▲본문 1절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라는 말씀이 나온다.
때로는 백성들이 요구하는 속도를 모세가 맞춰주지 못해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었다.
백성들이 그것을 기다리질 못했다.
백성들은 더 신속하고, 더 확실한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포퓰리스트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4절에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너희의 신이로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앞에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앉자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다.
성경 최초의 포률리스트가 바로 아론이다.
사람들이 모세 기다리기를 거부하니까,
대신 그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다... 이게 유사종교이다.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해 주고, 그것도 즉각 부응해 주는 것
▲여러분,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뎠다는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더뎠기 때문이다.
모세가 지체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지체하셨기 때문이다.
백성이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말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당장 듣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을 요구했다.
아론은 그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일어나 뛰놀았다고 했다.
그게 당장은 만족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송아지는, 거짓 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거짓 신 앞에서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
군중은 예나 지금이나 인스턴트한 (당장의) 대답을 요구하고,
가려운 기를 즉시 긁어줄 것을 요구한다.
군중의 심리와 여론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대다수이지만.. 대다수가 결코 진리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러한 군중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본문에서는 아론과 같은 사람이다. 포퓰리스트이다.
아론이 뭘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일까?
차라리 백성은 뭘 몰라서 그렇게 했다고 치고,
아론은 알지만, 알면서도 거짓 신을 만들어주었다.
무지한 군중보다 더 나쁜 것은,
알면서도 거짓을 진리로 포장해서 군중에게 파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이요, 현혹하고, 충동하는 사람이다.
거짓을 진리로 포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받을 심판이 더 클 것이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군중이 재촉한다고, 진리가 서두르지 않는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 것이 지체된 것처럼, 진리는 한 스텝 늦게 나아온다.
먼저, 즉시로 뛰어나오는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진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진리가 더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면 안 된다.
유사신앙과 참 신앙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유사신앙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하여, 누가 만든 것이고,
참 신앙은, 사람이 기다리든 못 기다리든
사람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당신의 방법으로 계시하신 진리이다.
그것이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점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사람 눈치 보시지 않았다.
진리가, 선지자가, 사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거짓선지자가 된다.
선지자가 사람이 돈이 많으냐, 적으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이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사람이 듣기 싫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진짜 선지자이다.
사람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진리이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진짜 선지자이다.
그리고 진짜 선지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핍박을 받는다.
‘만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너무 인기가 있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너무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항상 사람들의 필요, 그들이 당장 원하는 현실적 필요에
부응해 주고,
그것도 인스턴트로 즉각 부응해 주다보면..
포퓰리스트가 되고, 거짓선지자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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