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다림줄이 가려져서, 뭐가 뭔지 모르는 신자들

LNCK 2012. 3. 30. 17:38

https://www.youtube.com/watch?v=w8gG9t51Hig 

◈다림줄 기준이 가려져서, 뭐가 뭔지 모르는 신자들       신6:4~5        설교 녹취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한 삶 에 이어지는 설교문


▲서론

성경에 ‘거짓 신앙체계’라는 용어는 없지만,

구약시대, 신약시대, 그리고 2천년 교회역사 시대에

‘거짓 신앙체계’는 매 시대마다 엄연히 존재해 왔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거짓 신앙체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도, ‘거짓 신앙체계’(쉽게 말하면 외식, 위선 hypocrisy)에

빠져 있는데도, ‘나는 아니겠지..’하며 안심할 수 있다.

 

‘거짓 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이다.

겉모양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생겼지만, 가짜이므로 생명력이 없다.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나무나 꽃과 같다.

종교적인 겉모양은 뛰어날지 몰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다.

그런데 그 ‘거짓 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변종해서 나타날 수 있다. 그 뿌리는 하나로 똑같다. ‘거짓 신앙체계’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려면, 그래서 내가 무사히 천국까지 가려면,

‘신앙생활의 기준(다림줄)’이 분명히 내 눈 앞에 보여야 한다.

그걸 준수하고/안 하고는 차제의 문제이고, 일단 기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매 시대마다 마찬가지인데.. 신자들이 ‘기준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역사는 ‘미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기 나름 기준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긴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너희 외식하는 자여!’ 하며 내치신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기준의 문제>였다.

내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가장 큰 특징은 '상대주의 (레러티비즘)'

즉, 기준이 없어지는 것이다. 제 각각 기준이 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기독교의 싸움은, <기준을 지키는> 싸움이다.

 

 

 

 

 

<기준이 가려져 버린 것>

이것이 이사야서의 주제 (그 당시 팽배한 문제)였고,

예레미야서의 주제였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문제이었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문제의 핵심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도 그럴듯하게 하고,

남들이 보기에 평판도 좋은데..

그래서 다들 ‘살아있다’고 인정해 줄지 모르나,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니까 ‘죽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대표로 바리새인들은,

그들은 가장 큰 계명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눅10:28

왜냐하면 구약에 정통한 그들은, 신6:4~5절을, 어려서부터 외우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시험할 때, 그 질문을 했고,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보고 ‘잘 대답하셨다’고 했을 정도로,  (막12:32)

‘머리로, 지식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6:4절을, 종이에 적어서, 접어서,

이마 한 가운데 붙이고 다닐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열심이었다.

     *이게 바로 ‘경문’이다. 마23:5,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주1)

    

그런데 문제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 몇 가지만 잘 수행하면,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명기 6:4~5절을, 그대로 잘 준수하는 것이..

외적인 형식을 잘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확신(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제사, 십일조, 구제, 금식 등

종교적인 의식을 누구보다 더 잘 준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일 잘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너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찬물을 끼얹어 버리셨다.

      요5:42,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 당시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안식일과 각종 제사의식에 잘 참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과 정결법 규례를 철저히 지키는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을 들이대셨다.

 

그런데 본인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이 설교문 제목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의식은 신앙적이었지만, 본질은 비신앙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질과 의식의 관계>를,

부부사이의 예를 들어서,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부사이의 예를 들어서 보는 본질과 의식의 관계

 

부부사이에, 아내가, 남편을 위해,

밥 잘해주고 빨래 잘 해 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가?

그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본질은 있는데, 형식이 안 갖춰진 경우 .. 참 사랑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밥도 안 해주고, 빨래도 안 해 주는 것은.. 거짓 사랑이다.

 

‘여보, 오늘 아침은 요리책 34페이지에 있고, 재료도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직접 끓여 드세요!’

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니다.

 

저녁에도, 아내가 친구 만난다고 외출해서, 귀가가 늦어진다.

‘여보, 오늘 저녁에 늦게 귀가할 것 같으니까, 저녁은 피자 배달시켜 드세요!’

-이렇게 본질이 있다고 말은 해도, 형식이 안 갖춰져 있으면.. 이건 참 사랑이 아니다.

 

오늘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예배도 안 드리고, 헌금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속고 있는 것이다.

  본질은 있다는데, 형식이 없으면.. 그것은 본질도 없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형식은 있는데, 본질이 안 갖춰진 경우도 .. 참 사랑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도 마찬가지)

밥도 잘 해 주고, 빨래도 잘 해 주면서도..

자기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수 있다. 마음으로 딴 생각을 품는다는 뜻

 

얼마든지 마음은 다른 상대에게 가 있으면서,

겉으로, 형식으로는, 집안일을 깔끔하게 할 수도 있다.

 

남편인 경우는, 아내에게 비싼 선물을 사 줄 때는,

그런 이유로(죄책감으로) 오히려 더 좋은 선물을 사주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한다.

 

이사야 시대에, 정말 많은 제사(예배) 의식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보다 훨씬 예배를 잘 드렸고,

안식일, 월삭(매월 초), 매 절기 제사..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성도들보다 더 칼같이 종교 의식을 잘 지켰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정말 무수한 희생제물(오늘날의 헌금)을 들고 나아왔다.

 

성경이 규정한 제물들을, 가장 살진 것으로, 그것도 무수히 많이 가져왔다.

(오늘날 성도들보다 외적 형식으로는, 백 배로 더 잘 드렸다.)

무수한 소나 양을 잡아서 바쳤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싫어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신다고

이사야서 서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신앙의 형식은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형식은 완벽 했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대다수는,

신앙의 형식도 없고, 본질도 없다. 둘 다 아예 없다.

 

그런데도 자기는 ‘하나님을 믿으니, 천국 갈 것으로’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 신앙생활은, 위험한 도박과 같다.

 

하나님 은혜로 천국에 턱걸이 할 수 있을 런지 모르나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것보다는 안전한 길(철저히 믿는 길)을 택하는 편이 훨씬 지혜롭다.

 

물론 지옥가지 무서워서, 안전한 길을 택한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원해서 즐겁게 주님을 섬길 것이다.

 

 

◑이사야 시대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잘못된 것은 몰랐던

   예수님 당시 사람들

 

오늘날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기준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준은 <마음을 다해 사랑>인데, 자기들의 기준은 <외적 형식적 사랑>이었다.

 

신약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율법의 외적 의식(형식)은 많았는데,

평소 자기 삶에서, 하나님은,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세상의 출세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했고,

자기 목적의 성취가 하나님의 길보다 더 중요했고,

 

자기 부자되는 것과, 사업의 성공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실제 삶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의식(율법 규례 준수)이 많았는가 하면,

그 의식을 열심히 하면, 마치 하나님이 자기 소원성취를 들어주실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목적(자기 소원성취)으로

우리가 특별새벽기도회를 드리고, 그것이 한 때 전국적으로 유행하기도 했었다.

 

신앙은 그 본질상 ‘자기 소원성취’가 빠질 수 없으나,

기독교 신앙은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우선이고,

‘자기 소원성취’는 사은품으로 따라올 수는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소원성취’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 것은, 다 알아서 해 줄게!’ 하신다.

 

그런데 그 나머지 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 흡족하게 받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너무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신자들은, 

뭐가 참다운 신앙인지, 그 기준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림줄을 보는 눈이 가리워진 것’이다.  ←설교문 제목

 

그들의 예배에, 그렇게 철저하게 성경대로 무수히 제물을 풍성하게 드리니까

누구보다 하나님이 자기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 예배를 싫어한다. 무거운 짐이라. 마당만 밟는 구나,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라’고 하신다..  사1장

왜냐하면 이들은 참된 예배의 기준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적 예배는.. 

정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 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그것을 담는 의식이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대신에, 외적 종교적 의식만 잘 준행하면, 종교적 의무를 다 한 것이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복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했던 것이다.

 

자기의 사랑하는 마음이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전혀 뒤따르지 않으면서!

자기는, 하나님을 그저, 자기를 복 주시는 수단 정도로만 여기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실제 삶에서는 돈이, 하나님보다 훨씬 소중하면서

자기의 성공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중요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다림줄, Bible standard)이 가리워지니까,

자기가 타락한 것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뭐가 참다운 예배인지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사야서를 읽을 때,

자기 조상들의 제사(예배)가

진짜 타락한 제사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사야서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눈이 가리워지니까,

자기들의 예배가, 저들(이사야 시대)의 예배처럼

똑같이 타락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말하였도다’고 하시면서

<이사야 시대의 예배나, 그 당시의 예배나.. 정확하게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마치는 말

다림줄/성경적 기준이 가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심에서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기를 중단하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게 되고,

우리에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느 시대건,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보화와 목적이 되는 삶에서, 내가 떠나기 시작하면,

어느 시대건 눈이 가려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 모두

그 당시 백성들에게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즉 <너희 눈이 가리워졌다>고 말씀한다.

 

이렇게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림줄(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예배, 사역, 삶을 위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려져서,

뭐가 옳은 것인지 모르니까, 자기가 잘못하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모르고 있다.

 

기준이 뭔지 모르니까, 참다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이다.

천국을 너무 쉽게 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 생기, 은혜에서 떠나

     평생 종교생활만 하다가는,

     장차 천국에 못갈 수도 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오늘 현재천국에서

     하나님의 생명, 생기, 은혜에 젖어 살기 때문이다.

 

     (결론은.. 서두에 있으니, 서두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주1)

※오늘날 어떤 한국 목회자가,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호텔에 투숙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깜짝 놀랐는데,

 

그 호텔에 투숙했던 유대인 어머니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럿이,

아침에 일어나서, 모두 다 호텔 객실 복도에 나와서,

자기 객실 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구절을 외우면서, 자기 자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6:9절에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그랬으니

(평소에 자기 집에서 늘 그렇게 하듯이) 호텔에 투숙한 날이라도,

그렇게 문설주와 바깥 문 앞에서, 이 신명기 말씀을 외면서,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명에는 핑계가 없습니다  (0) 2012.04.02
사랑의 주님이 중보해주신다  (0) 2012.04.02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한 삶  (0) 2012.03.30
가난, 부요 3520  (0) 2012.03.28
엄마의 묵상 노트 두 편  (0) 2012.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