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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받으라!

LNCK 2012. 4. 18. 14:23

◈나를 본받으라!         빌3:17        빌립보서18강, 설교녹취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빌3:17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청한다.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신의 어떤 점을 본받으라는 것인가?


▲‘나를 본 받으라’는 얘기는, 자기가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저도 여러분께, ‘교우 여러분, 저를 본받으십시오!’라고는 도저히 말 못하겠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목회자들도, 선뜻 ‘여러분, 나를 본 받으십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의도는

‘내가 사명의 길에서, 그 고난의 길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며 계속 걸어갔던 것을.. 본받으세요!’ 라는 뜻이다.


바울이라면, 얼마든지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앙은 자기 몸을 포함해서 전인격을 드리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2가지 신앙적 극단

서신서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교회 안에서 신앙상의 문제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이었다.


율법주의

(설명 생략)

 

영지주의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율법주의 말고도 영지주의가 있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것이 기독교신앙에 접목되어서,

기독교 신앙을 오직 ‘정신, 마음, 사변, 철학’적 측면으로만 받아들인다.


문제는, ‘현실/육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정신과 마음으로만 믿는,

소위 <이원론>적 신앙을 가진다.


마음과 머리로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 자기 자신의 몸으로 헌신하는 데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이에 반해 성경은 이렇게 권면한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보시다시피 기독교 신앙에는 몸이 요구된다.

(마음 뿐만 아니라)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이 말은 ‘너희 삶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것은 만만치 않다.

 

▲오늘날 개신교의 장점이자 단점은.. 약간 ‘신념’쪽으로 쏠려 있다. (영지주의 쪽)


우리 개신교 신앙의 강점은, 한마디로 말하면 교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굉장히 이론적인 면으로 치우쳐 있다.

이것이 강점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약점이 된다.


개신교에서 기독교 신앙이란,

예전에 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가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과 예식을 중시하는 신앙의 표현방식을 반대해서,

그들이 너무 형식에 치우쳤다고 보고, 신앙의 내용과 이해를 강조한 개혁이었다.


그래서 형식적/예전적 신앙을 반대하고,

각 개인이, 신앙을 머리로 이해하고, 그 분명한 신학적 논리를 수용해서,

그 다음에 실천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는 약점을 드러내었는데,

너무 신앙이 사변화(신념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개신교 쪽에서는, 머리로 믿는 것이 강화되면서, 훨씬 비판이 강해졌다.

상대적으로 ‘몸으로 섬기는’ 쪽이.. 약화되었다.

 

우리는 신학을 이해하고, 논리를 분명히 하는 것에 강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따지고, 견해차이가 많고, 태생적으로 비판적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신앙이,

논리와 말로 하는 면에서는.. 매우 강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하면, 어느 교회에 가서나

‘이 교회에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은 대동소이하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라고 한다.


이론(머리)은 환한데.. 실천(몸, 사랑, 헌신)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에 분파가 많아진 것도..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론이 서로 조금 어긋나면, 끼리끼리 헤어지는 것이다.


▲본문에 사도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할 때는,

바로 이 문제,

‘너희 몸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산 제물로 바치라’는 식으로,

내 몸을 산 제물로 바친 나 자신을 본받으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신앙을 어떻게 몸으로 바치는 것인가?’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이론, 신념이 아니라,

 

실제로 기독교 신앙을, 몸으로 살아내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를 자신 있게 본(모델)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본을 제시하는 것인가?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꿋꿋이 걸어간 나를 본받으라!


고전9장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의 내용을 이렇게 제시한다.


고전9장은,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도권의 도전이었다.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 맞느냐?’ 라는 문제에 직면해서,

사도바울은 ‘내가 사도가 맞다’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전9:1~27을 각자 읽어보세요.


고전 9장은 참 재미있다.

처음에 읽으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자기의 사도권을 구차하게 변명하고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사례를 받는 것으로, 너희가 나를 공격하느냐?

우리가 일을 하려면, 어떻게 사례 없이 하겠느냐?’는 식으로 들린다.


또 내가 

약한 자들을 찾아갈 때는 약한 자의 모습으로,

강한 자들을 찾아갈 때는 강한 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다 전략적이었다...

 

처음 읽으면 변명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자세히 읽으면.. 변명이 아니다.


고전9장에서, 사도바울의 본심은 이런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식인데..

‘나는 이 욕을 먹는 자리까지.. 실제로 갔다.

그러나 욕을 먹으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갔다. 그런 나를 본받으라.’ 이다.


바울이 목회자로 그들을 섬길 때,

여러 공격을 받고, 실제로 자기 약점을 지적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은,

‘그렇다면, 목회 안 하면 될 거 아닌가!’

실제로 안 하면 된다. 그러면 욕 먹을 일도 없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오해와, 혹은 억울한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갔다는 것이다.

그런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다. 빌3:17에서.


나는 기독교 신앙을, 이상(영지)주의자처럼,

이론/신념을 너희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요,

나는 그 욕먹는 자리에, 오해(고전9장에 나온다) 받는 자리에.. 기꺼이 갔다는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사도권 변호이다.

아래에 3구절만 인용했지만, 고전9장 전체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특히 18절이 가장 하이라이트이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이렇게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론이 아니라) 내 몸으로 수고하고,

내가 쓸 수 있는 권리도 다 포기한 것..

그것을 ‘너희가 나를 본 받으라’는 것이다.


고후11장에는, <바울의 사도권 변호>가 좀 더 확실하게 나온다.


고후11:23~29을 보시라.

바울은 자기가 진정한 사도임을 이렇게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내가 얼마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참고 인내했는지 아느냐?’

이런 얘기처럼 들리지만.. 더 자세히 읽어보면..


‘나는 부르심을 따라 실제로/내 몸으로 걸어갔다..’ 이런 얘기다.

‘나는 매 맞는 자리도 걸어 들어갔고, 옥에도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나의 사도됨의 표징이며,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후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도 십자가와, 죽음의 길까지 의연하게, 도망가지 않으시고, 계속 걸어가셨다.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가면 뻔히 죽을 그 자리까지, 실제로 걸어 들어가서,

붙잡혀서 처형되셨다.


갖은 수모와 고통 속에서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시고,

또는 입으로 가르치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몸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 자신의 인생과 사명을 다 바치셨다.


가라는 곳으로 가셔서, 하라는 일을 하셨다.

그 길을 계속 걸으셨다.

그 과정에서 당하는 손해, 오해받음, 고통당하는 것을

다 지나가셨다.

다 당신의 몸으로 살아가셨다.


‘이게 내가 사도인 증거이며,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라고 말한다.


◑적용 / 신앙인의 현실은 화려하지 않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는

율법주의 와 이상(영지)주의의 공격에 의한 두려움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너는 율법을 어겼다’고 공격하고,

이상주의자들은.. ‘네 신앙은 올바른 신학에서 어긋났다’고 공격해 온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에게도 욕먹지 않고,

모두에게 인정/칭찬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여러분이 그렇게 하도록 (완벽주의자로) 부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불만스러워하는 여러분의 현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 일하시는데..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인생이, 고달픔과 유혹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현실적 보상도 없고,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고,

그러나 어떤 은혜에 의하여, 우리는 신앙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산다.


자랑스러울 것도, 꺼내놓을 것도, 큰 소리 칠 것도 없는 부끄러운 인생이지만,

또한 반대 측면으로서, 자기 인생에 주님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존심을 꺾고, 오해를 감수하고,

억울함을 삼키고 살 수밖에 없다.

그걸 견딜 수밖에 없다.


여러분 중에 누가, 실력이 넘쳐서, 이 교회에 의기양양하게 나온 자가 있는가?

다 지지리 궁상이지만

그러나 그걸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이야 말로,

 

사도바울의 고백같이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이 몸으로 바치는 산제사이다. 롬12:1


스스로 부족하고, 흠이 많고, 비난을 받고,

자기 한계를 확인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현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말로 살지 않고, 몸으로 신앙을 살아야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현실이 있다.

우리 중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현실이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기뻐했던 어떤 성취들도, 인생을 사는 동안, 영원한 힘이 되는 것은 없다. 일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포기할 수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타협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며, 자책(회개)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의 현실이다.


그것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가는’ 싸움이다.

비틀거리지만.. 포기하지 않는 신앙인이다.


     어느 올림픽에서 봤는데,

    마라톤 경기는 다 끝났는데, 한 명이 쥐가 나서, 비틀거리면서 뛰다가,

    3시간이 지나서 뒤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모든 사람이 기다려서 박수갈채를 보낸 것과 같이,

    신자의 신앙현실도 그런 것이다.

 

일등을 해서 면류관을 받고, 단상에 올라 상을 받는 인생이 최고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길, 못나고 할 말 없는 길을,

하나님의 사람을 실제로 (몸으로) 사는 것,


교회에 나와 ‘내가 누굽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을

꾸준히 사는 것,


그게 보잘 것 없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한다.

바울이 그런 차원에서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했다.


바울의 어떤 훌륭함 보다도,

(예수께서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을 취하셔서,

순종하기를 십자가에 죽는 자리까지 가신 것처럼,)

바울의 인내와 꿋꿋함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은 다만 신학적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진심과 감격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자기가 만족스럽고 멋있기를 바라는 바람에,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길에 스스로 위축된다. (성공주의 사조 때문이다.)


그러지 마시라.

여러분도 사도바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내 이름을 지켰으니,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이 약속을 붙들 수 있다.


이 믿음 갖고서 여러분의 현실을 신앙으로 견디시라.

멋지게 극복하려고 하니까 (너무 기대치가 높으니까) 안 되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실제는.. 백마 탄 왕자/백설 공주가 아니라

인내하는 싸움, 포기하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성도가 서로 만나면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할 말이 없고,

그런 것이 현실이요, 신앙의 본질이지..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고, 눈을 부릅 뜨고 서로를 쳐다볼 사람은.. 사실 없다.

 

사도바울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여,

여러분 자신의 현실과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에,

신앙에 힘을 얻는, 오늘의 말씀이기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우리가 못 마땅하고 보잘 것 없는데

 

바울이 말씀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에 우리 모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귀한 인생 사는 것을 기억하여,

인내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