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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LNCK 2012. 4. 16. 18:07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고후3:13, 출3:14       11.10.02.설교녹취



◑신화는 시대마다 새로 써야하지, 과거를 연련하면 안 된다.


중세시대 성화들을 보면, 믿음의 인물들을 그릴 때,

그 얼굴 뒤에 노란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것을 본다.

이것은 후광(헤일로 halo)이라고 하는데, 신령한 광채를 뜻한다.

‘신앙의 인물에게는 이와 같이 얼굴에 광채가 났으리라’는 상상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유래되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보내고,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데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눈이 부셔서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는, 그 이면의 스토리를 말한다. 

처음에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에 수건을 가렸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광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광채 때문에 수건을 썼지만,

나중에는 광채가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수건을 썼다는 것이다.


고후3:13.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데...

 

‘모세의 수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그 광채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의 지도자의 입장으로서는, 신자들에게,

자기가 여전히 광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될 책임을 느낀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하여,

어떤 신화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영적 지도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한때 가졌던 신령한 광채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보여줘야 될 무거운 부담감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그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한때 모세처럼 영향력이 컸던 수많은 인물들이

모세와 같은 고민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한 때, 그 얼굴에 광채가 있었다. 교인들이 그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들을 신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광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사라지기 시작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빨리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목회자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교회 중직들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광채는 이미 사라졌는데, 여전히 광채가 있는 것처럼

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목사도 그 사실을 알고, 중직자들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사라진 과거의 영광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과거에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경험한 교회일수록,

과장이나, 아니면 과거의 신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후3:13처럼, 수건으로 가리려고 한다.) 


이 설교문의 주제는, 과거의 영광에 연련하지 말고,

시대가 바뀌면,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는 것보다는,

오늘날 차라리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새롭게 대처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모세의 얼굴에 광채는 왜 사라졌을까?

영원히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왜 그 광채가 사라졌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고 본다. 모세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 광채가 사라진다.


사람은 마치 ‘금이 간 바가지’와 같다. 결국은 ‘새는 바가지’이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어도, 사람은 그 은혜를 영원히 간직하지 못하고,

금이 가고, 깨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은혜가 새 버린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탓도 아니고, 그 지도자의 탓도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사람을 믿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하여, 신화를 만들 필요는 없다. 사람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 연약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님 나라는.. 대대로 이어지는 속성이 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수퍼스타라든가,

한 사람의 능력 있는 지도자라든가,

한 부흥하는 교회라든가,

한 대표적 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뽑으시고, 사도바울을 뽑으셨다.

12제자가 골고루 필요했고, 그것도 모자라 마치 용병 같은 사도바울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다음 세대로 계속 계승되어져 나간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처럼,


다윗의 왕조를 솔로몬이 이어받았던 것처럼,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을 엘리사가 이어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고,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수퍼스타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고,

또한 반드시 이어져야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였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 지도자였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된 사람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울 왕이었다.


사울 왕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되었지만,

그를 이어 왕조를 세운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최고의 선지자였지만,

엘리야는 선지자 사역을 엘리사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병거타고 하늘에 올라갔다.


영원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사람은, 당대에 하나님을 섬길 뿐, 시간이 되면, 땅에 묻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신다.’


성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나라는 무너지나,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는가 하면,

광채는 잠시 머물 뿐이고, 소정의 목적을 이룬 후에는, 사라지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쇠퇴에 대해서 실망하면 안 된다.

한 때 하나님이 그를 쓰셨고, 한 세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셨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바람과 같으셔서

한 곳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고, 계속 움직이시고,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눈은 온 세상을 훑으시며, 당신을 전심으로 찾는 자를, 또 새롭게 찾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쓰실 수 있는 민족과,

당신이 쓰실 수 있는 교회와,

당신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오늘날에도 계속 찾으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같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이 직접 하시면 되지, 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이미 장래 일을 내다보신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히 이 땅에 계실 것이 아니고, 3년 반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떠나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믿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기다리게 하시고.. 떠나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그 일이 중지 되었는가, 그 일이 쇠퇴했는가?

아니다. 더 크고 더 활발하게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투자하시고, 제자들을 키우시고,

이 일이 지속될 수 있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또 제자를 삼게 하셨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수퍼스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고,

누룩처럼 계속 퍼져나가게 하시고, 땅 끝까지 퍼져나가게 하시고,

세대를 이어서 계속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커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성도님들 중에는, 과거에 받은 은혜뿐만 아니라,

과거에 체험했던 부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을 말하는 분들이 많다.

만약 그때 살아계셔서, 그 때를 그리워하는 분이 아니라면,

‘1907년은 1907년이다.’.. 이런 생각도 필요하다고 본다.


평양대부흥은, 그때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방식, 그대로..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현재적으로 행하시는 것이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향수를 가지고,

그것을 말하고, 과거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과거의 대부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향수에만 연련하지 말고,

오늘날 현재적 은혜, 현재적 역사에 치중해야 한다는 뜻)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당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라고 모세가 묻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출3:14

영어로는 더 쉽다. ‘I AM’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이시고  영원을 사시는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에서 과거, 미래가 없고, 항상 현재이시다.

‘I AM’ 현재적으로 계시고 (현재 시제)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과거의 영광, 과거에 먹었던 만나,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만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현재 계시고,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다.

예루살렘은 한때 성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루살렘에 갈 때는,

성지순례를 간다기 보다는..

성지여행을 간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순례’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우리가 '순례'를, ‘여행’이란 의미로 쓰고 있지만..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다른 곳에 옮겨가셨고,

이미 다른 곳에 더 큰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꼭 ‘순례’를 간다면,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시는 곳을 찾아가야 되고,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믿음을 갖고 있는 이 현실이 ‘성지’요, ‘순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의식을 갖자는 것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꿈에서 깬 다음에 말하기를,

    ‘과연 이곳이 하나님이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했다.  창28:17

 

    돌을 베개로 하는 척박한 외진 땅이,

    그곳이 하늘의 문이요, 성전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왜 사람들이 성지를 가려고 하고, 왜 사람들이 과거의 부흥을 그리워하는가?

지금 현재 이곳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흔적이라도 보기 위하여,

온갖 과거의 유적이라도 보면, 하나님의 흔적을 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과거의 유적을 보면, 과거의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이곳(지금, 현재)에 계신 하나님,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놓치게 만들 수 있다.


일부 성도님들 중에는, ‘우리 남편이 유학중일 때는,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교회에서 교사도 하고..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는, 주일 예배도 나갈까 말까 해요’ 하신다.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유학 때는 유학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셨겠지만,

지금은, 옛날에 하던 식으로, 다시 성가대를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지금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이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봉사의 일이, 또 새롭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늘의 하나님이시다.

지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남이 받은 은혜’ .. ‘나도 받을 수 있다’


저도 과거에 일어난 부흥 이야기를 종종 들어봤다.

한국에는 1970년대 중반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여의도 광장에서 대형집회가 자주 열렸고,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현재 대형교회의 대부분이 1970년대에 시작한 것들이다.


미국에서도 1960~70년대에 Jesus People 운동이 일어나서, 큰 부흥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어디에 가든지,

‘과거에 우리 도시에,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끝났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참 이상한 것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대부분 옛날이야기를 한다.

‘이 지역(또는 교회)에, 옛날에는 큰 부흥이 있었는데, 지금은 지지부진하다.’는 식의 이야기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아, 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찾아야 되겠구나’ 이다.


과거에 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구경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현재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을 기다려야 되겠고, 준비해야 되겠구나’


이것은 더 어렵다.

남을 통해서 하신 일은, 구경하면 된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제 친구 한 명은, 토론토에서 부흥이 일어난다고 하면,

토론토까지 비행기타고 가서 구경하고,

또 플로리다(펜사콜라)에서 부흥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으면, 거기로 달려갔다.


이런 식으로 늘 좇아 다니느라고 바빴는데,

왜 자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유명한 학키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공(팩)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공이 날아올 지점을 예측해서 달려간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만한 곳으로 우리가 달려가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미래지향적인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야 된다.


언제까지 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만 부러워하고, 그것을 구경하고만 있겠는가!

또는 과거에 일어났던 부흥만 그리워하겠는가!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면, 나도 믿음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면,

나를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만 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도 똑같이 족하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도 족했고, 지금 현재도 족하다는 것이다.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하나님은 매시대마다 똑같이 살아계시고, 똑같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과거만 연련하지 마시고,

또한 남이 받은 은혜만 부러워하지 마시고,

자기 은혜를 발견하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지금은 과거보다 예수 믿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매 시대마다, 예수 믿기는, 똑같이 힘들었다.


베드로 시대에는, 예수님 믿기가 더 쉬웠을 것 같은가? 아니다.

오히려 핍박이 더 심했다.


마르틴 루터의 시대에는, 예수님 믿기가 더 쉬웠을 것 같은가? 아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가를 지어 부른 것을 보면,

그 시대도 무척 어려웠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면,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어렵다.

(반대로) 예수 믿는 것이 쉽다면, 모두에게도 쉽고, 나에게도 쉽다.


성경말씀에, ‘세상에 있는 네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했다. 벧전5:9


예외가 없다.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다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 사람도 예외가 아니고,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어렵다’는 말은,

이것이 진정으로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