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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 보기

LNCK 2012. 5. 8. 13:27

◈망원경 보기                  대하36:11~23                        출처보기  



◑결론


망원경이 어떤 물건인지 잘 아실 것이다.

멀리 있는 사물을 보게 하는 것이 망원경이다.


그 망원경의 한쪽 렌즈는 사물을 <작게 보는 렌즈>다.

반대로 다른 쪽 렌즈는 사물을 <크게 보는 렌즈>다.


그래서 망원경을 거꾸로 보면.. 사물은 본래 모습보다 훨씬 더 작아지고

반대로 제대로 보게 되면.. 사물은 망원경의 본래 목적대로 크게 보인다.


본문에 나오는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이 망원경과 똑같다.   ←이 설교문의 주제

작은 렌즈 쪽이 심판이라는 렌즈다.

반대로 큰 렌즈 쪽이 구원이라는 렌즈다.


그러면 작은 렌즈는.. 큰 렌즈에 의해서 그 존재 의미가 서게 된다.

큰 렌즈가 없으면.. 작은 렌즈 하나로는 망원경의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심판의 렌즈

뒤이어 나오는 구원의 렌즈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망원경을 볼 때, 작은 렌즈에서 → 큰 렌즈 순서로 본다.)


그럼 그 심판을, 우리의 삶의 환란이나 징계 쪽으로 적용해보자.

여러분들에게 있는 환란이나 징계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망원경처럼, 두 렌즈가 항상 연결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의 상황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결국 그 심판이 있는 이유마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어려움 뒤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파노라마를 읽을 수 있는

큰 렌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신앙의 역사는.. 이렇게 망원경(심판~구원)이 사이클처럼 반복되는 역사이다.


교회역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들을 통해서,

신앙이 어떻게 자리잡아왔는지를 보게 된다.


오늘 본문도 하나의 교회의 역사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 공동체가 범죄해서 하나님께 심판 당하고

또 다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로 회복되는 역사를 같이 그려주고 있다.


바벨론 포로가 자기들이 저질러서 생긴 첫 번째 렌즈라면,

고레스 왕이 명령한 본토 귀환 사건은 하나님이 저지르신 두 번째 렌즈,

바로 구원이라는 렌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이뤄진 망원경을, 이것 하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비슷한 망원경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이름도 가지가지다: "출애굽 망원경, 광야행진 망원경, 가나안 정착 망원경,

사사기 망원경, 사도행전 망원경, 종교개혁 망원경, 청교도 망원경..."

우리는 그 망원경들을 이제 이 자리에서 거꾸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큰 렌즈를 통해서 보면 심판이라는 작은 렌즈가 보인다.

그러면 그 렌즈는 그렇게 작아보이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커 보였을까 싶다.

그 때는 심판이 다인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좁은 시야에서 보았던 착각일 뿐이었다.

그 다음 큰 렌즈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숙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망원경들을 통해서 그 오해를 푸는 것이다.


고레스라는 큰 렌즈를 통해서 바벨론 포로라는 작은 렌즈를 역으로 추적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일하시는 구원의 역사의 신비를 벗겨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여러분 각자에게 임하는 어려움과 고통들도

결국 구원과 회복이라는 큰 렌즈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망원경을 거꾸로 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러분들께 거꾸로 보는 망원경이 필요하다.

오늘은 '고레스의 구원'이라는 큰 렌즈를 통해

'바벨론 포로'라는 작은 렌즈를 역추적 하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


다른 성경 역사를 볼 때도 그렇게 보라.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의 삶을 이해하고 추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거꾸로 보는 망원경들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이 결코 좌절되지 않고

하나님의 넓은 시각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계기를 많이 경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 설명


지구의 중력은 대단한 것이다.

중력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소설도 있지만,

사실 정말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을 수가 없다.


올라가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지만 추락하는 것에는 힘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등산해보면 알 수 있다. 올라갈 때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내려오는 것은 쉽다.


신앙의 개혁도 마치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인간의 본성이 죄라는 중력에 강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신앙의 경향성으로 바꾸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가 않다.

그래서 신앙의 개혁가들이 위대한 것이다.


혼자도 아니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국가, 교회, 사회)가

죄의 중력에 이끌려 한없는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힘을 하나님 쪽으로 돌려놓았다는 게 굉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가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면, 그 다음은 금방 달라진다.

다시 죄라는 중력이 끌어내리는 힘에 쏠려, 다시 쉽게 추락하고 만다.


유다 왕국 말년에 그나마 요시야라는 위대한 개혁가가 있었다.

그 때 유다는 간신히 회생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였다.


그 걸출한 스타가 죽고 나자, 유다는 급속도로 다시 하강하기 시작했다.

죄의 중력의 힘에 강한 이끌림을 받고, 개혁의 이미지는 이제 온데간데 없어져버렸다.

36장 1절부터 보면, 20여년 동안에 무려 왕이 네 번 바뀐다.

<여호아하스 - 여호야김 - 여호야긴 - 시드기야>


그 중에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와 손자 여호야긴은, 세 달 짜리 왕이다.

그것도 자기가 그렇게 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고,

애굽과 바벨론이라는 외치 때문에 그랬다.


식민지 때문에 힘들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유다 말년 20년은

선왕 요시야가 이뤄 놓은 신앙 개혁의 공든 탑을 가만히 앉아서 까먹는 기간이었다.


미국 막 와서 영어 배울 때 'totally gone'이라는 말을 배우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20년 동안 몰았던 차가 드디어 서버렸다.

고치려고 해봤는데 더 이상 고칠 수가 없었다.


견인 비용이 아까울 정도가 되었다. 바로 그 때 totally gone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봤다.

질병도 그렇다. 암 말기 환자는 회생이 불가능하다. 수술해봤자 필요 없다.

오히려 수술 받는 고생이 아깝다. 모든 종류의 노력을 기울여 봐도 회생이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도 totally gone 상태다.


이스라엘도 그 동안 아슬아슬했다.

북 이스라엘은 아예 첫판부터 문제가 있어서 더 빨리 망해버렸지만 BC722 앗수르에 의해

남 유다는 그래도 경건한 개혁적인 지도자들 <아사, 여호사밧, 웃시야, 히스기야, 요시야> 때문에

겨우 겨우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그 동안 마치 곡예사가 줄타기를 해온 것 같았다.

줄에서 떨어지려고 하면 개혁적인 왕들이 줄 위로 다시 잘 올라서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 totally gone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면 그 totally gone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대하36:11절부터 보시라.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이다. 본문에 나오는 대로,

이 왕을 마지막으로 유다는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의해 완전히 침략 당하고 만다.


유다의 왕권은 역사 속에서 종식되고

성전은 부서지고 성전의 거룩한 기물들이 바벨론으로 다 운송된다.


성전 사역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귀족과 정치지도자들을 비롯해서 백성들이 모두 다 노예로 잡혀갔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심판의 상황이 왜 왔었는가를 잘 봐야 한다.

이미 읽은 말씀 중에서 12절과 15절을 주목해야 한다. [12절, 15절 낭독].


우리가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운의 선지자,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이른 회개를 요청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시대에 가장 인기 없는 발언을 계속해서 해대야 되기 때문이다.


시의적절하지 않는 말을 아시는가? 요새 말로 그런 경우를 '썰렁하다'고 한다.

시의적절하지 않는 인기 없는 발언을 말한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calling을 받을 때

아예 그런 목적으로 부름 받은 선지자였던 것이다.


이런 걸 놓고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말한다.

멸망과 심판을 비관적으로 자꾸 말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또 지금은 어떻게 하라고 말해야 하는가?

"지금은 회개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비관적 상황을 뻔히 알면서

지금은 회개하라는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하는 어려운 입장을 말한다.

이게 바로 예레미야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당연히 썰렁한 분위기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외치는 선지자의 말발이 그들한테 먹힐 리가 없었다.

코앞에 죽느냐 사느냐, 생존하느냐 마느냐 문제가 있는데,

불편한 말만 하는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 외에도 다른 선지자를 열심히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박국 같은 선지자가 바로 그 케이스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을 여전히 비웃고 욕한다.

오히려 죄만 더 많이 짓는다.


여기에서 선지자들을 비웃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렇게 된 이 상태를 놓고 역대기 기자는 뭐라고 마지막에 표현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영어성경에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가 there was no remedy라고 번역되어 있다.

한 마디로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아까 말한 totally gone 상태다.


그러면 totally gone 상태에 이어지는 결과는 대개 어떤 것인가?

차가 완전히 서면 폐차장에 갖다 줘야 한다.

괜히 더 녹슬기 전에 빨리 폐차장에 갖다줘서 타이어 값, 고철 값이라도 받아서

견인towing 비용 본전이라도 찾아야 한다.


수술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암세포가 번져버렸다면

이제 임종이라는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totally gone 상태에 이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면 유다 왕국에게 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게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바벨론 포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대가로 주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남 탓을 잘한다.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 탓이다.

그래서 뭐가 잘 안 되면 우리 안에 자기방어본능 같은 것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 같다.


아이들 키우면서 많이 경험하지 않는가?

분명히 뭔가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90% 이상이 자기가 안 그랬다고 한다.


분명히 자기 방이 어질러졌는데도, 자기가 안 그랬고 동생이 그랬다, 누나가 그랬다 한다.

그게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 나도 바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면서 환경 탓을 한다.


하나님의 심판도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심판이 오게 된 모든 이유를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아셔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의 최후의 선택임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목표로 놓고 과정을 진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심판은 과정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는 목표다.

어느 부모가 자기 아이를 즐겨 때리겠는가?

때리기 위해서 자식 키우는가, 키우기 위해서 때리는가?


만약 때리기 위해서 자식 키우는 부모가 있다면 정말 1천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부모(신문에 나는 정도)의 부모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자구책 중에 하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에 하나님의 심판 같은 불길한 일이 조금만 일어나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려버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다.

나의 방어본능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심판을 즐겨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totally gone 상태를 자초해서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결과가 심판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 심판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Totally gone 상태의 차는 폐차장 가면 끝나고,

말기암 환자는 이 세상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totally gone 상태 때문에

주어진 심판이 그들의 마지막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대하36:20~23절을 보시라.

이 구절을 봤을 때, 역대기라는 책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지막 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책을 쓴 사람은 바벨론 포로가 다 끝난 후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기간 동안에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에 의해서 망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식민 정권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악독한 바벨론 정권에 비해 페르시아 정권은 달랐다.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용정책을 베푼 것이다.

이것은 보통 관용이 아니었다. 22절과 23절을 다시 보라.


한번 잘 생각해보시라.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면

그 어느 누가 이 이방나라의 한 왕이 갑자기 회심해서 자기들한테

이런 식으로까지 관용을 베풀리라고 생각했겠는가?

 

느닷없는 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 세계의 영적인 판도를 한꺼번에 뒤바꿔버린 것이다.

정말 느닷없는 일이고, 영문 모를 일이다.


왜 그런가?

이 느닷없음, 이 모를 영문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이다.

정말 획기적이고 이상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만의 방식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일을 이렇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당시 고대 근동의 지도를 바꿔버릴 만큼

탁월한 한 왕의 마음을 감동시킬 자가 없었다.


이걸 보면서, 저는, 신앙이 어떤 시야의 문제라고 믿는다.

시야가 어떻게 서 있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판도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 기준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그 제한된 시야 때문에 될 일부터도 안 되고 만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그 언제 느부갓네살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그들 시각에서는 느부갓네살 정권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커보였을 것이다.


하나님도 어떻게 핸들하기 힘든 사람으로 커보였을 것이다.

또 그들 시각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한 이방 왕이 은혜 받아서

자기들을 본토로 귀환시킬지 알기라도 했겠는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하면 자기들을 더 힘들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더 당연한 논리였을지도 모른다...


◑결론


(맨 위 서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