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1

벧세메스로 가는 소

LNCK 2012. 6. 12. 09:43

◈벧세메스로 가는 소        삼상6:1~15           출처보기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의 암소 이야기를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의 이야기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사건/사람들 속에 씨눈처럼 담겨져 있어요.

이는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계시적인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요5:39

 

그런 의미에서, 본문도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쉽게 이해가 되어요.


    반면에 예수님과 성도는 한 운명이라고 했으니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두 마리 암소는

곧 예수님과 성도라고 보아도 무방해요.  마11:29참조.


영적 의미에선 같단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니까요.


이걸 잊지 마세요.

한 몸이란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 곧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추적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영적 상황이, 엘리 시대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엘리는 마지막 사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마음이 다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율법 신앙은 외식으로 흐르고!

성전엔 탐심으로 가득찬 제사장들이 이권에 개입하여서

돈을 뜯어내는 강도들로 들끓었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긴 상태와 같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는 일을 하십니다.

백성들이 마음을 제련하기 시작합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고 낮은 자는 높이십니다.


그리곤 자기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죄를 다 담당하십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온 암소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법궤를 빼앗긴 벧세메스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짐승 중에서도 모성애가 가장 강한 짐승이 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 위에 법궤가 실리자, 모성애마저 차압당한 채

울면서 법궤가 지시하는 대로 갑니다.

이건 육신의 정(情)에 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울며 가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땀이 피가 되도록 하셨다 함은 우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육적인 부모 형제들을 다 떠나는 아픔을 감내 하셨습니다.


법궤는, 지금식으로 말하면 언약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성도에게 언약이 주어지면.. 암소처럼 끌려가는 인생살이가 시작이 되어요.

예수님이 성도 안에 오시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게 되어요.


이게 성도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이에요.

십자가의 길이란 세상에 정(情)을 끊는 길입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픔을 당합니다.

정(情)을 끊는단 말은.. 언약이 덮쳐오면 인간의 정(情)에 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친구 간에도, 이웃 간에도

언약과 비 언약이 충돌하게 되면..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는 원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의 정이, 언약보다, 앞 설 순 없다는 뜻입니다.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언약에 속한 자들은

    늘 희생을 감수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묵시는 복음을 아는 것이고.. 역사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우리는 이게 둘 다 있어야 합니다.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이에요.


이 시대 그릇된 복음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신앙만 가지고 있어요.

생활이 없어요.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이 없어요.

입으로만 주절거리고 있어요.


묵시가 역사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신앙이 이원론(二元論)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에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해요.


예수님은 묵시이고, 우리는 역사에요.

예수님은 우리 안에 와 계세요.


하지만 눈에 안 보여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해요.


그러려고 묵시이신 예수님이 역사인 우리 몸 안에 오신 것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의 암소가,

    한 마리는 예수님, 한 마리는 ‘나’로 보는 것과 연결시켜 이해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몸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반드시 예수님처럼 버려지는 삶이..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버림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성도를 보고.. 예수님을 보게 되어요.


그러니 성도의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이, 자꾸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터져 나올 때마다 내가 부인되고 예수님이 드러나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제물로 삼는단 말입니다.

이를 로마서 12장에선 ‘산 제물’이라고 하였고,

이를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이게 없으면 가짜에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신앙생활을,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은, 마치 일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과 같아요.

신앙생활은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말씀을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말씀이.. 삶에서 예수의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의 희생을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부인이 따르며

암소처럼 죽임당하는 아픔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말로만 해요.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손 걷어 부치고 섬기고 베풀고 희생하는 것이에요.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 안다는 것을 핑계대면서

자신은 손 하나 가딱하지 않고 상전이 되어서 판관이 되어서

‘이게 옳네, 저게 그르네’ 판단하고 심판만 하고 있어요.


이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손 하나 가딱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겐 무거운 짐을 지우고 가게 한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리새인들처럼, 그 짓을 하고 있어요.


   복음을 정확히 아느냐 모르느냐 라는 판단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남을 판단하라고.. 복음을 주시지 않았어요.

   가서 섬기고/ 희생하고/ 죽으라고 주셨어요.


예수님이 성도 가운데 와 계신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집구석에 틀어 박혀서

성경구절 외우라고 와 계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은, 예수님의 삶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이걸 ‘예수의 증인’이라고 해요.


증인이란.. 말로도 증거하여야 하지만, 삶으로도 증거하여야 해요.

그러라고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신 겁니다.


성령이 삶으로서 예수님을 증거케 하세요.

성령은,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삶을 몸으로 드러내게 하세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새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그 새 언약이 성도의 삶으로 토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들이.. 자기 삶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오늘 본문에 벧세메스로 가는 소와 같이

어깨에 짊어진 법궤가 이랴~ 하면서 끌고 가요.


어디로 끌고 가는가 하면.. 자기 죽을 자리로 끌고 가요.


소가 스스로 벧세메스로 찾아 간 것이 아니고

법궤가 죽어야 할 자기 자리로 찾아가게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복음을 받으면, 내가 봉사할 자리로 찾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벧세메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땅이에요.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란 뜻)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고 땅을 분배 할 때

벧세메스는 아론의 지파에게 주었어요.

알다시피 아론의 지파는 제사장 지파에요.

그래서 벧세메스는 ‘제사장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암소가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의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지요.

삼상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여호수아의 밭이란..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밭’이란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식 이름인데, 헬라식으로 말하면 예수에요.


예수님의 밭이란 어딘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요.


암소가, 여호수아 밭에 법궤를 내려놓고, 거기서 제물로 바쳐지지요.

이는 예수님이, 교회를 위하여,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제발 신앙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우린 땅콩 까먹으면서 놀면 되겠네!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으로서의 연합’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 팔자가 그대로 우리에게 씌워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서 움직여요.

믿음이 살아서 뭔가 사건을 일으켜요.


그러므로 성도는, 삶으로, 믿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 사건 속에 휘말려서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성도는 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건 속에 휘말려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삶, 죽는 삶’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있어요.

세상은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게도 하시지만

성도 자신을 예수님화 하여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당하셨던 것을 그대로 재현을 시키세요.


이렇게 함으로써,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드러내서 회개/구원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건 성도가 죽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마귀를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이 되셨듯이

성도 또한 마귀를 드러내는 미끼로 사용이 되어요.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예수님의 운명이

전이(轉移)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복음을 받으면 주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로 세우지 않고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게 하는 자로 세워요.


주께 받은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귀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덮쳐 오면.. 나를 부인하게 하고, 나를 죽이게 해요.

제발 복음을 지식 쌓듯 하지 마시고, 염불 외우듯이 하지 마세요.


복음은 수도(修道)정진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스님들처럼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능력이고 살아가는 에너지에요.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이고!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갖게 하는 꿈이 있고!

예수로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고 능력이란 말입니다.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섬기고 봉사하여야 하잖아요.


지금 벧세메스로 법궤를 싣고 간 암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희생 제물로 죽었지요.


원래 법궤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벧세메스에 있어야 하잖아요.


벧세메스를 교회라고 합시다.

그리고 법궤를 예수/ 언약/ 복음이라 합시다.


그럼 교회에 복음이 없지요.

그러니 암소가 법궤를 찾아서 메고 벧세메스로 가는 겁니다.


그리곤 가서 어찌 됩니까?

‘여호수아의 밭’에서 제물로 바쳐지잖아요.

 

벧세메스가 제사장이 사는 땅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이 시대 제사장들이 누구인가요?


신자들이에요.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어요.


그럼 왕 같은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에요.

그러니 벧세메스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법궤를.. 복음이라고 하고!

법궤 실은 암소를.. ‘복음을 아는 성도’라고 하고!

벧세메스를.. 교회라고 한다면!


그럼 복음 받은 성도가 어디로 가야합니까?

교회이지요.


자 보세요.

벧세메스에 법궤가 있습니까?

빼앗겨서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암소)는

복음 없는 곳에 가서 죽는 것이.. 그 사명이에요.


사도행전 1:8절에,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지요.


예루살렘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이고

사마리아는 내 주변이고

땅 끝은 세상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라는 말은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율법신앙으로 외식하고 있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을 모른단 말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받고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구제한다고 서로 다투기나 하고, 땅 끝으로 안 가니까,

하나님이 큰 환란을 일으켜서, 산지사방으로 흩어버렸잖아요.


그런데 우린 안 가 그러고 있어요.

복음을 알아서 뭘 하고자 합니까?


이젠 해방이다 하고서 집구석에서 놀고자 합니까?

그런 복음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놀라고 복음 주시지 않았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온 성도들이 메뚜기처럼 뛰었어요.

다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들처럼, 다 자기가 죽을 자리로 찾아 갔단 말입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다 순교했어요.

이게 복음을 주신 목적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건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이 이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 사람은,

그 복음은 지식이고, 관념이지.. 실제 생명이 아니에요.


복음을 받은 자들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적인 교회 안에 있잖아요.

이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하여야 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신 것도 동일해요.

예수님이 빛이신데, 그 빛의 나라에 계시지 않고

어둠에 나라로 파송 받아 오셨어요.


이는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너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죽음으로써 살려내는 일을 하셨어요.


이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고 하셨어요.

가서 이리를 다 잡아 먹고, 쳐부수라는 것이 아니고!

가서 죽으라는 거에요.


너희 속에 있는 생명을, 이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리들이, 너희를 뜯어 먹고 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뜯어 먹고 산 것처럼 말이에요.

바울이 스데반을 뜯어 먹고 살았듯이 말이에요.


바울은 다시 이리에게 가서 잡혀 먹히고

바울을 잡아먹은 자들이 또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피의 역사에요.

피를 먹고 살아나는 역사란 말입니다.


그래서 옳은 복음을 받은 성도는

집안에 틀어 박혀 있는 염세주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컴퓨터에 앉아서 설교 듣는 것이 전부라고 하지 말고 들었으면 가세요.

가서 부딪쳐 보세요.


그러면서 ‘우리 주님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그 아픔이 장난이 아니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엄청난 은혜로 다가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알라고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지 않아요.


   이게 법궤를 싣고 가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암소들의 운명입니다.

   이 길을 예수님이 가셨어요.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어요.

   성도라면 반드시 이 길을 가도록 주께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법궤 실은 소처럼, 성도의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자꾸만 내가 부인되어지고 죽는 길로,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젖 나는 암소처럼

   징징거리면서 울면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이 그러했어요.

법궤가 앞서 가면 그 뒤로 졸졸 따라 갔어요.

울면서 말입니다.


말이 울면서이지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을 던지면서 갔어요.

그냥 룰루랄라~ 하면서 가지 않았어요.


성도가 가는 길은 광야 길이에요.

광야 길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시험 당하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악함들이 토설되어지는 길이에요.


우린 따라 가면서도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고!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고!

누가 욕하고 이단이라고 한다고 불평하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원망하면서도.. 따라가는 길이에요.


한숨과 원망과 울음이 끊이지 않아요.

성도가 가는 길은 하루하루 도살할 양처럼 죽임당하는 길이에요.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쫓겨남을 당하고!


그럼에도 돌아보면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고 있어요.


우리의 사명이 다하기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그 일을 다 이루기까지.. 주께서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분류 없음 > 201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렘26장 한 마디도 감하지 말고 모두 전하라  (0) 2012.06.18
렘43장 말씀 정지 3650  (0) 2012.06.14
우리가 가는 이 길은  (0) 2012.06.11
성숙한 성도의 5특징  (0) 2012.06.11
엔게디 광야의 하나님  (0) 2012.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