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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시는 주님!

LNCK 2012. 6. 19. 19:34

◈내 마음을 아시는 주님!         행1:21-26       11.02.13.설교스크랩

 

◑서론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전세계를 풍미했던 찰리 채플린이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어느 한 때의 일이었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아주 작은 시골에 갔을 때,

워낙 유명했던지라, 그는 거기서도 자기의 이름과 얼굴의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것은 동네 어귀의 게시판에서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니까,

마침 그 마을에서 며칠 후에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대회>를 연다는 거였습니다.

채플린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한 순간 그에게는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만약 자기가 그 대회에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가 신청을 하고, 드디어 그날이 되어서, 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갔는데,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작은 시골이었는데도

인파로 넘쳐서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채플린은 따로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자기 차례가 되자, 평소에 하던 대로, 자기 연기를 보여 주곤 들어왔습니다.


물론 자기 흉내를 내는 다른 참가자들의 연기도 봤는데

정말 재미있고 유쾌한 한 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참석자들의 경연이 다 끝나고 심사결과가 나왔는데, 어떻게 됐을까요?

찰리 채플린은 3등을 했습니다.

당연히 1등을 할 줄 알았는데, 1, 2등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채플린이 이 사실을 떠올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쩌면 나보다 나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얘길까요?

자기 자신보다, 타인이 자기를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못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가족 중의 하나가 더 잘 볼 수 있고,

아니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를 가장 잘 알고,

우리를 가장 잘 보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139:1~4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열과 성을 다해 만드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십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를 섭리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최초의 신약교회가 시작되었던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이 자리에는 열 한 명의 사도들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은 뭘하고 있지요?

제비뽑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룟유다의 사도 자리를 놓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보선(補選)을 하는 중입니다.


적어도 사도가 되려는 사람은, 22절 처음에 밝힌 대로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지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이 지상명령이 얼마나 중요하고 막중한 일입니까?

그 일을 할 대표격인 사도 한 사람을 지금 뽑는데,

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아닌 제비뽑기라는 겁니다.


제가 제비뽑기의 성경적 의미를 알기 전에는,

이것이 참으로 유치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될 대로 되라’ 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거예요.


오늘 같은 경우, 대표격 지도자인 베드로가 한 사람을 지명하는 것이

차라리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일에는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비뽑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처럼 써 왔던 방법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그 땅을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비 뽑아 결정 했습니다.


제사드릴 때 제물을 어떤 제물을 먼저 쓸 것이냐 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하나님의 명령 따라 그렇게 한 것이지요.

제사장의 직분을 배치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제비뽑기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들에겐 세상과 인간 모두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잠언 16:33에서 잠언기자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래서 오늘 모인 120명의 초대교회 교인들도

지금 제비로 한 사람의 사도를 뽑으려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사도가 돼도 좋을 두 사람을 천거하지요.

바로 요셉이라는 사람과 맛디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사람을 놓고 제비뽑기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제비뽑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 드렸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중요한 건가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비뽑기는 오늘의 사건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소상한 안내를 해 드린 것입니다.


◑본론


오늘 제가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고 은혜 받아야 할 말씀은,

지금부터 나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이 두 사람을 놓고

제비뽑기에 앞서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요?


여러분! 지금 이 모임이 어떤 모임입니까?

오늘 이 모임은 인류최초로 결성된 첫 번째 교회입니다.

즉 우리가 그토록 본받고 싶어 하고, 그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초대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한 마디 한마디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한 마디는 역사를 바꿨고, 이들의 한 마디는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처음 모여서 함께 기도한 내용 역시

너무나 중요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행1:24~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 갈 길로 갔나이다 하고”  


이 기도문에서 우리가 현미경을 보듯 자세히 봐야 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최초로 모여서 기도하면서 밝힌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나요?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설교 제목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여기서 뭇 사람이란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말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원어에 가깝게 다시 번역을 하자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이, 하나님 당신이시여!” 입니다.


오늘 이렇게 고백한 그들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인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고백의 대전제는 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까지도 아시는 분이시고,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자신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정확하게, 가장 세밀하게,

가장 구체적으로 아신다는 것을 믿기 전까지

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으로 우리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에만 앞서 말씀 드린 예레미야나 다윗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한 그리스도인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이기에,

그것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하고 필요한 과정임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는 고백과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천거해서 사도로 뽑은 것 사이에는

무슨 연관성이 있나를 살펴 봅시다. 


지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두 120명입니다.

그들 중에 두 사람을 천거하고, 그 중에서 한 사람이 사도로 선택되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교인들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추천 받은 둘 중에 누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더 확정되어 있는지를

하나님만 아시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고,

그 하나님께서 둘 중에 맛디아가 더 충성할 것을 알고

그를 선택했다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오늘 제비뽑기에서 탈락한 요셉은

제 갈 길로 가 버린 가룟유다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경에 맛디아는.. ‘맛디아’로만 소개되어 있지만,

요셉은.. ‘유스도’라고도 하고 ‘바사바’라고도 하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행1:23


성경 전체에 소개되는 방식에 의하면,

‘맛디아’는 별로 내세울게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설명이 아주 짧습니다. ‘맛디아!’

‘요셉’은 내세울 게 많고.. 알려졌고.. 그래서 설명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사바, 유스도’


요셉 역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을 따라 다녔고,

그래서 사도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과 또 모든 조건이 다른 11명의 제자들과,

특히 자기와 함께 추천되었던 맛디아와도 별 차이가 없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나,

변화산에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이실 때나,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실 때

같은 아주 중요한 현장에는 언제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대동하셨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세 제자를 일컬어 ‘Big 3’ 라고 부릅니다.

우리 역시 이 사실을 두고,

이 세 사람이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자 켐벨 몰간은 전혀 다른 의견을 내 놓고 있습니다.

켐벨 몰간은 영국 목사로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아주 독특한 해석을 했던 강해설교의 제왕이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이 너에게 말씀하신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예수님의 처방은 사람마다 다 달랐다’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지금 말씀 드린 세 제자에 관해서도

독특한 견해를 내 놓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던 것은,

그들이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제자들보다 연약한 자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들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제자로서 바로 설 수 조차도 없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켐벨 몰간의 이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 세 제자의 평소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해서 매사에 실수투성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시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어땠습니까?

자기들의 반대자들이 나타나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확 태워버리자 그러지요?

엄청나게 과격하고 엉뚱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세상 권력을 장악하시는 줄 알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들을 중용해 줄 것을 청탁했습니다.

그만큼 세속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세 제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를 드리시는 동안,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잠에 골아 떨어졌을 만큼 한심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바대로

그 세 제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 세 사람은 결코 우리가 아는 바 대로의 사도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들여다보면,

초대교회를 이룬 초대교회 교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라고 호칭했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추천했던 요셉과 맛디아는 둘 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사도란 칭함을 받게 되고

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탈락하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 교인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맛디아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켐벨 몰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선택된 맛디아 보다

탈락한 요셉이 더 굳건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탈락한 요셉보다, 선택된 맛디아가 더 연약했다는 겁니다.


요셉은 제비에서 탈락해서 사도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해도

일평생 평신도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맛디아는 제비에서 탈락되는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심성이 너무나 연약한 것을 아셨기에..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그릇은, 성경에도 나오듯이

이 세상에서 비천하고, 낮고, 무가치한.. 그런 그릇들입니다.  고전1:26~29↓


한 마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맛디아보다,

요셉이 더 신뢰할만한 그릇이었던 겁니다. 


이후로 두 사람 다, 성경에서, 그들의 이름은 다시는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다 사도로서, 또는 평신도로서

그들의 삶을 훌륭하게 살아갔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위의 해석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현직 목회자들 중에, 그렇게 고백하시는 분이 실제로 상당수 있고

     (즉 ‘나는 목사 안 되었으면, 예수도 제대로 안 믿을뻔 했던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

     또한 ‘항상 겸손하면 좋다’는 의미에서, 위의 해석을 스크랩, 소개해 드립니다.


     위의 해석은, ‘그럴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래 전통적 해석도 당연히 맞고, (즉 맛디아가 더 합당해서, 사도에 뽑혔다는 해석)

     그런데 위의 해석도 맞을 수 있다고 봅니다.


     맛디아가 사도직에 뽑힌 것은, 그의 신실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그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 모든 지도자가 다 그럴 것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지도자는.. 훌륭한 점과 동시에, 연약함 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켐벨 몰간의 이런 주장은, 어쩌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우리가 기억한다면,

캠벨 몰간의 이런 주장은 예수님의 마음과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분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가셨습니다.

약자와 병자와 억눌린 자를 향해 가셨습니다.

죄인, 창녀, 과부, 고아처럼 부스러기 같은 인생들을 향해 가셨습니다.


연약한 자를 더 사랑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렇게 낮은 데로 흐르신 겁니다.  


제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에서 에서를 볼 때 마다,

‘그 옛날에도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 귀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처럼,

저 역시도 아주 사소한 것에 철 없는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초 중 고 12년 동안 개근은 했지만

공부는 잘 못해서 반장, 부반장은 고사하고 분단장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던 제가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고,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고등부 회장 물망에까지 오르게 됐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교회 고등부 회장이 뭐 대단한 거라고,

선거 직전에 기도실에 들어가서 “하나님 저 회장 되게 해 주세요. 그럼 목사 될께요!”

그렇게 서원기도를 해 버렸습니다.


너무나 철없는 약속이었지요?   

그런데 그때 정말 고등부 회장이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주님과 한 약속을 잊어버리고, 저 좋은 데로 떠났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으셨나 봅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그 약속이 나를 괴롭혔고, 내 발목을 잡았습니다.


비록 저는 장난처럼 약속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무겁게 받아들이셨나 봅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할 때는 이미 1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고,

그때의   제 모습은 주의 종이 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34살 되던 해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했더니,

그 길은 ‘야간 신학교’에 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겐 고등학교 졸업장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초에, 다니던 대학에서, 퇴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늦깎이로 정규 신학대학을 들어가자면

어린 친구들과 다시 학력고사 (수능)를 봐야 하고,

그렇게 해서 제 코스를 밟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평신도 시절에 늘 경멸하던 무인가 군소 신학교에 들어가서,

그 교단에서만 인정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던 겁니다.


해서 그런 학교엘 들어가서,

모두들 나이 먹어 주경야독하던 동료들과 그렇게

4년 중 2년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동료들 역시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목사가 되면 뭐하나?

어찌 어찌 해서 개척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됐다고 치자.

교인들이 우리의 학력을 알게 될 텐데

우리의 최종 학력은 ‘서울 장로회 신학교 졸업’ 이게 다가 아닌가?


정규 신학대학도 아니고, 신학교 졸업해서 안수 받고 목사가 된들

너나 할 것 없이 다 대학을 나오는 마당에, 어느 교인이 우리를 존경하겠는가? “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제가 동료들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실력인 거야. 학벌 탓하지 말고 실력을 기르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우리 같은 신학교 출신이시잖아.

우리가 각자 하기 나름이야”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가 1993년도였는데,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1980년대 초에 제적당했던 대학생들을 일괄 복적시켜 준 겁니다.


이미 10년 전에 잘린 대학에, 다시 복학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같이 공부하고 있는 야간신학교 동료들을 생각하니,

제가 한 말 때문에 큰 부담이 됐습니다.

그래서 저랑 친하게 지내던 12명의 동료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얘기를 했지요.


“내가 전에 대학엘 다니다가 그만 둔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대학에서 다시 오라고 하니 어쩌면 좋겠느냐.

기회가 좋긴 하지만, 나는 기회 따라 움직이는 위선자가 아닌가?”


그랬더니 12명의 친구 전원이

“무슨 소리냐. 당장 복학해라. 네가 복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보짓이다”

그러는 겁니다.


단 한 사람도 복학에 반대하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따뜻하게 저를 보내주고, 저는 울면서 그 야간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저는 이게 무슨 뜻인가 며칠 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그러다가 진정한 주님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본 것처럼, 제가 너무나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셔서

한 일이 없는데도 훈장을 하나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나마 대학과 대학원이라는 과정 하나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저는 주의 종으로서 제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겁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사랑에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야간신학교만 졸업하고도

굳건하게 목회를 해 나갈 동료들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그리고 송별식을 하는 날, 친구들에게 저의 이런 심정을 쭉 얘기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대학으로 돌아가는 저보다

신학교에 남아있는 그들이 더 믿을만한 그릇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그때의 제 야간신학교 동료들은, 모두 다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적용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련과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아직도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겉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엔 온통 아픔으로 얼룩져서 생채기투성이인 분,

그런 분이 있습니까?


비록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옆을 보면 정신착란에 걸린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나는 분,

자기 안을 들여다보면 죄와 추한 것들뿐이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요,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실하고 불안한 분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십시다!

그 분이 전능하신 섭리로, 항상 가장 좋은 길로, 나를 이끌어 가심을 믿으십시다!


그래서 때때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나더라도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하면서,  행1:24

우리도 모든 것을 아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에

나의 기도로.. 모든 결과를 다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그 과정을 겪음으로서만

비로소 신실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만 우리 영혼이

정금처럼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어머니 태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우리를 알고 계셨고,

그래서 끊임없이 깊은 사랑의 눈으로 주시하셨고,


그래서 내 영혼의 아무리 미세한 진동까지라도 섬세하게 세고 계신 분이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체질과 마음의 깊은 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런 그 분을 신뢰하십시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 버리고 자유하십시다!


그러면 그 분은 곧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 가슴 속에서 나오는 한숨을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그늘이 되시고,

그 안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분명히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의 끈을 꼭 부여잡고

오늘도 내일도 내 마음을 아시는 주님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