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받으면 돕게 된다 느2:9~10 설교스크랩
▶성경엔 가끔 우리들을 감탄시키는 이방인들의 등장이 눈길을 끕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야곱 시대의 바로왕입니다.
아무리 꿈 해석을 잘 했다 한들 하루아침에 변방 히브리의 한 종을
애굽의 총리로 등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격인사입니다.
요셉 개인에게 일어난 섭리도 놀랍지만 한 눈에 사람을 알아보고
나라 전체 살림을 맡긴 바로 왕의 배포와 안목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주인공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아닥사스다 왕의 처신도, 의구심과 함께 감동을 줍니다.
‘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지’ 생각하면
일상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각보다 상식적이십니다.
있을 성 싶지 않은 일들을, 마구 배치해 두시지는 않습니다.
구원 역사라는 큰 틀 가운데
인간 사이의 관계에도 자잘한 교훈과 감동을 무수히 숨겨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캐내어 씹으면 그 감칠맛은 오랫동안 입 속에 맴돌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받은 선물은,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
통과해야 될 나라의 통행증과, 성을 쌓기 위한 재목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행을 보호해 줄 군대까지 붙여 준 것입니다.
이 점은 느헤미야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여정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욱이 느헤미야의 유다 행이 소문나면
주변국들의 발호(跋扈)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해서 일행을 보호할 군대의 파병은, 더 없이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이런 배려는, 감동과 함께 의구심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느헤미야에게 마음 쓰도록 했을까요?
사실 왕에게 느헤미야의 행동은 불충(不忠)으로 생각할 여지도 충분했습니다.
외국인을 등용해서 그 정도까지 올린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인데,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왕을 떠나겠다는 것은 배은망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왕이 느헤미야에게 마음 쓴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란, 바로 <감동>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별 상관없는 일에,
관심 갖는 사람(즉, 느헤미야)에게 눈길이 갑니다.
왕이 느헤미야를 보니,
언제부턴가 얼굴에 수심이 차 있고, 생기가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모국의 참화를 알게 된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달려가서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깟 일로 왕을 떠나는 것은 괘씸한 일이지만,
그 마음이 가상한 것입니다.
고생길인데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조국의 일에
어쩌면 자기와 별 관련 없는 일에, 나서서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왕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섬세한 미각(味覺)만 있는 줄 알았더니, 대장부답기까지 한 것입니다.
지도자의 자질로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는 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인배는.. 위험한 일을 보면, 가급적 멀찍이 피해가지만
지도자, 큰 그릇은.. 위태한 일을 보더라도.. 그게 대의를 위한 일이면,
스스로 자초해서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큰 관련 없어도, 절대로 피해가지 않습니다.
일례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피했을 때,
초면인 십보라와 자매들이 자기 양떼에게 물을 먹일 때,
미디안 목자들이 나타나 방해하자.. 거기에 개입해서, 십보라를 도와주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에, 스스로 뛰어들었던 것이죠. 정의를 위해서!
다윗이 골리앗에 대항한 것은,
자기가 끼일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우리 같으면.. 뒷걸음질 쳤을 것입니다. 못 본 척 하면서!
지금 느헤미야도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바사 왕이 그 일을 시켰습니까? 아닙니다.
유대 백성들이 그 일에, 느헤미야를 특별 초빙했습니까? 아닙니다.
괜히 위험한 일에, 스스로 점프해 들어간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그것이 아닥사스다 왕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물심양면으로, 느헤미야를 도운 것입니다.
가는 길에, 호위할 군대까지 붙여주었습니다.
이 글의 주제는,
‘감동 받으면 돕게 된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언제 감동 받는가 하면,
‘자기 이익이 걸리지 않은 일에.. 투신해서 위험을 자초할 때’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자질 중 한 가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대의를 보고, 공의를 보고서도,
위험한 일에 투신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지만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큰일을 감당할 지도자는 아닙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느헤미야에게, 조국의 일은 강 건너 불이었습니다.
이미 느헤미야는 실질적인 바사 사람이 됐고,
권력이든 돈이든 명예든 아무 것도 아쉬운 게 없었습니다.
그 땅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었고, 부담을 가졌고,
그것을 사명으로 알아 책임졌습니다.
아무리 느헤미야라도 본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이 모든 상황을 질끈 눈 감아 버리고 지나가면 그 뿐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수용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는 일이었지만 큰 뜻에 자기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건 희생이었고,
그 희생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감동되자 돕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 감동받기를 원합니다.
혹 오늘 그렇게 감동받기를 원하면 신약 성경의 앞쪽을 펴십시오!
거기엔 삶 자체가 희생이신 어떤 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마지막엔 처형 틀 하나만 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감동의 근원이 되는 샘입니다.
그것을 마음껏 마시고, 씹고, 넘기십시오!
그러면 감동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샘솟을 것입니다.
감동은 오직 희생의 모판에서만 자랍니다.
그 모판 한 귀퉁이에, 이제 내 자아를 누이십시다! ☞ 개입
◑2. 기도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느2:15~20
▶저는 한국과 이곳 비엔나에서 각각 한 번씩 운전면허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두 번 다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옆에 탔던 시험관의
“자신감을 갖고 해 보세요. 될 겁니다” 라는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자신감이란 자기를 믿는 마음입니다.
사실 자기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자기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믿을 만한 힘이나 근거가 자기 속에 든든히 구축돼야 하는데
그게 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의 자신감이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우리의 자신감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기도로부터 나옵니다. ☞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
▶드디어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합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시작된 것이므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성벽 쌓는 기간 내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자원도, 일체 다 공급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느헤미야 자신의 이런 각오와는 달리
실제로 성 쌓는 노역을 감당해야 할 백성들이
자기와 같은 마음이 되지는 않은 데 있었습니다.
무너지고 황폐해진 현장을 본 느헤미야로서는
공사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 것임을 알고 덜컥 겁이 났을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본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밤에 현장 답사를 한 날과,
백성들 앞에서 자기의 결심을 밝힌 때 사이엔 약간의 시차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물론 그때 그가 한 일은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시간 가운데 주님은, 지금 느헤미야의 처한 상황과
어떻게 일을 풀어 나갈 것인지, 또 친절하고 꼼꼼하게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레슨을 받은 느헤미야 속엔
다시 자신감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기도란 그렇게 사명을 확인 받는 시간이고,
자신감을 부여 받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매일 진지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고르기 작업
느헤미야가 이렇게 도약을 위해, 잔뜩 움츠린 그때도
주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성벽중건을 위한 땅 고르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귀환해서 황폐해진 옛 도읍을 처음 바라본 백성들의 심중이 어땠을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감격은 잠깐이었고
이내 지금 이대로라면 다시 또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은 뻔했습니다.
성읍에 성벽이 없다는 것은 무방비요 無대책임은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것과 시름을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을 것입니다.
그런 비감(悲感)은, 앞서 귀환한 자들이나, 느헤미야와 함께 귀환한 자들 모두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아무 힘도 없었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이곳까지 인도해서 데려온 리더, 느헤미야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뭔가 하긴 해야 하겠는데, 자기들로서는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만 바라보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성벽재건 전야까지 하나님이 하신 땅고르기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성벽재건을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그 즈음엔, 푹 절어진 배추처럼 순순해졌습니다.
바로 그때 느헤미야는 전체 백성들 앞에서, 성벽재건을 외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 자신들이, 더 바라던 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필요하고 보람된 일이라면, 희생을 치를 각오를 하는 법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동시에 맞아 떨어져서, 자발적으로 일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조율방법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였습니다.
▶게다가 그 동안 느헤미야에게 있었던 일을 알게 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 할 것 없이 높아졌습니다.
이 일에 장애가 될 일 몇 가지가, 이미 다 해결됐기 때문입니다.
성벽을 쌓아도 좋다는 조서와
거기에 필요한 자재는 이미 왕의 허락이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자신감은 느헤미야에게서 귀족들로, 방백들로, 전 백성들 사이로
급속히 전염되고 확산됐습니다.
물론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 시도한 자들이 몇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한 두 마디의 경고로, 그 방해꾼들을 일축해 버립니다.
▶느헤미야를 알면 알수록
그는 철저히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기도가 끝난 후, 그의 모습은 기도하기 전과는 딴판임을 봅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감을 충전 받는 시간이었고
믿음의 두께와 넓이를 견고케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의 자신감에 자신을 얻었고,
그 자신감을 옆의 동료들과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전체는, 그 자신감 속에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은 꼭 자신이 있어서 갖게 되는 마음은 아닙니다.
사실 어떻게 우리가 늘 자신감으로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체로 뭔가 가진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 속엔 이미 주님이 친히 무엇인가 하실 것임을 믿는 믿음이 생기고,
바로 그 믿음은 우리들에게 자신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도로.. 자신감을 기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자신감 없어 보이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불신앙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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