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다윗의 자손’ 역대상3 :1~24 출처보기
▲도입/ 인생의 고통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과거에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통하여 일약 최고의 스타가 되었으며
또한 유명 재벌 2세와 결혼을 했다가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 여배우가 있습니다.
그분이 TV에 출연해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분은, 연예계 복귀 선언 이후에도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계속 히트를 치면서
지금까지 톱클래스의 중견 여배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이전보다 더욱 완숙한 연기자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통하여 인생의 쓴 맛들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층 더 성숙해졌다고 짐작해 봅니다.
추측이지만, 십 수 년 전 그녀가 꽃다운 20대에
은막을 떠나면서 결혼할 당시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오로지 장밋빛 꿈만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뿐 아니라 아마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그런 인기 절정의 젊은 여배우와 국내 최고 재벌 2세가 결혼해서 이루어진 가정에
무슨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것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과는 달리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고 재력 있는 집안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에 들어가 보면
인생의 갈등, 번민, 슬픔, 고통들은.. 다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화려한 다윗 가문에도, 인생의 굴곡과 고통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외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집안만큼 화려하고 완벽한 가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무능하고 부패한 사울 왕조와는 달리
이스라엘을 단숨에 최고 전성시대로 끌어올렸으며,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가서는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는 황금시대를 구가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가는 백성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받았으며,
전 이스라엘 중에서 그 집안만큼 행복한 가문은 있을 수가 없다고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사람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완벽하기 이를 데 없이 보였던 다윗 왕가에도
사람의 본질적인 연약함과 본성적인 악함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설교제목이 <다윗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다윗이 ‘그리스도의 예표’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도 또한 사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우애해야 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아니 인생의 온갖 근본적인 문제들은
오히려 이 다윗의 집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 다윗 집안 역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집안에서조차
실제로는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가에도 메시야가 필요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도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이 인간사회에서 지위가 높고 부유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집안에도
왜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죄인'에게 '용서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대상3 :1~9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이 이러하니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다니엘이라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2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3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소생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4 이 여섯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라 다윗이 거기서 칠년 육개월을 치리하였고
또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치리하였으며
5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6 또 입할과 엘리사마와 엘리벨렛과 7노가와 네벡과 야비야와
8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 아홉 사람은 9다 다윗의 아들이요
저희의 누이는 다말이며 이 외에 또 첩의 아들이 있었더라.
▲여기 기록된 이름은 다윗과 그의 직계 자손에만 해당되는 족보입니다.
하지만 이 겨우 2대밖에 안 되는 세대를 통해서도, 뭔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여러 명의 아내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많은 "첩"들까지 둠으로써
이미 그 집안에는 문제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5절에 "밧수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밧세바는,
다윗이 그녀의 원래 남편이었던 우리아를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로써 죽인 후에
빼앗은 여자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의 불륜으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인간 사회에 아주 흔한 죄악이지만,
다윗 같은 유명한 신앙의 사람까지도 거기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 집안에는 근친상간도 있었는데,
바로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다말을 속으로 연애한 암논은 거짓으로 아픈 체하며 드러누워서
아버지 다윗에게 다말이 와서 자기 병시중을 좀 들어 주면 나을 수 있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도록 낯 두꺼운 계교를 꾸민 암논은
자신을 찾아와 과자를 구워 주면서 병간호해 주는 여동생을
끝내 강제로 범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몸서리칠만한 일이 다름 아닌 바로 다윗 집안에서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이 죄로 인해, 또다시 형제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왕자의 난’이’ 이어졌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크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한 2년 후에 그 암논을 속여서 양털 깎는 축제에 초대해 놓은 뒤에
미리 준비한 자객을 동원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은 그런 일을 저질러 놓은 자기를 그래도 용서해 준
아버지 다윗을 향하여 오히려 정면으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이 때문에 수도 예루살렘을 버리고
한동안 도망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기까지 했으며,
나중에 압살롬은 다윗의 신복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 집안의 죄악과 불행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이어받게 되었을 때
다윗의 다른 아들 아도니야가 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 반역이 실패한 후 아도니야는 처음에는 용서를 받았지만
나중에 결국 솔로몬의 명을 받은 브나야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다윗 왕가란, 이처럼 조금만 파헤쳐 보면
그 명성에서 기대되는 바와는 정반대로
온갖 최악의 죄악들로 가득 찬 집안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음욕과 물욕과 권력욕이 판을 치고 있었고,
살인과 간음과 온갖 모략과 음해들과 함께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실상 다윗 집안에 일어난 일을 소재로 해서 사극을 하나 만들어 본다면,
오히려 ‘용의 눈물’ 따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연속극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다윗 집안이 이 정도였다면 다른 집안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다윗 집안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다들 똑같다..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명문가가 이 정도이니, 보통 가문은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조용한 가문이 있다면, 시끄러울만한 여건이 아무것도 안 되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처럼 아름다운 시편으로 찬송할 줄 알았고,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젊을 때의 온갖 고난을 신앙 하나로 견디어내었고
또 하나님 앞에서 크게 칭찬받기까지 했던 그 다윗의 집안조차
내면에는 이처럼 추악한 죄로 가득 차 있었으니,
이 세상의 다른 개인과 가정의 내막을 속속들이 들추어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이 다 엉망진창일 것입니다.
미움, 시기, 욕심들이 판을 치고 재산 싸움, 치정 살인에까지 이르는
온갖 더러운 것과 악한 것들이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잘되어 나가는 집안이라 해도,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주제)
왜냐하면 비록 우리 집안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스위트홈이고
행복하기 짝이 없는 가정처럼 보일지라도,
만약 우리 집의 식탁에 거실에, 침실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언제든지 우리 집안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온갖 죄악으로만 가득 찬 더러운 곳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죄인에 대해서 한없이 인자하시고
그 어떤 추한 죄악이라도 무조건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죄악을 깨끗이 도말해 줄 수 있는 분,
우리 집안에 숨겨져 있는 수치들을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분,
바로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시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와 내 집의 구원주로 영접하고, 모시고 사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인생 실패자'에게 '왕 중의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대상3 :10~16
10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이요 그 아들은 아비야요 그 아들은 아사요
그 아들은 여호사밧이요
11 그 아들은 요람이요 그 아들은 아하시야요 그 아들은 요아스요
12 그 아들은 아마샤요 그 아들은 아사랴요 그 아들은 요담이요
13 그 아들은 아하스요 그 아들은 히스기야요 그 아들은 므낫세요
14 그 아들은 아몬이요 그 아들은 요시야며
15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과 셋째 시드기야와
넷째 살룸이요
16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
▲비록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구가했었지만,
그 가문의 몰락은 바로 그 다음 대에 순식간에 닥쳐왔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의 대표들이 그를 찾아 와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탄원하고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르호보암은,
부친 솔로몬 왕 때부터 나라 일을 해 왔던 연로한 대신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놀면서 자란 제 또래 친구들의 말만 듣고서
그 백성의 대표들을 오히려 위협하면서 돌려보내었습니다.
이런 냉담한 왕의 반응에 실망한 10지파는 르호보암을 떠나
솔로몬의 신복이었던 느밧의 아들인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북이스라엘로 독립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남유다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그처럼 화려하고 강대했던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제3대에 와서 그만 하루아침에 두 쪽 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위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은 그 중에서 남유다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온 왕들,
즉 메시아 계보를 이어 간 왕들의 이름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대부분 다 악한 왕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남유다 역시 선한 왕보다는 악한 왕이 더 많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19명의 왕들 중에도 6명만 비교적 선한 왕이었고
2명은 중간 정도, 그리고 나머지 11명은 악한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남유다는 결국 "요시야의 아들들" 시대에 가서는 (:15절)
바벨론에게 완전히 망하게 되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멋있게 시작되었던 다윗 왕조,
온 국민의 성원과 칭송을 받고 인기를 모았던 그 명예로운 왕조가
오히려 나라를 둘로 쪼개어 놓고 결국 둘 다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역사에 성공적으로 보였던 다윗 왕가였지만,
3대를 채 못 가서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이방나라들처럼 사람 가운데서 왕을 뽑아 세우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미리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 대신 사람을 추앙하고 의지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일인지를 뼈저리게, 톡톡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참된 왕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실 왕 중의 왕,
즉 오실 메시아밖에 없음이 더욱 확실해졌던 것입니다.
▲왜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사람은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 문제를, 이 인간 사회의 갖가지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해 줄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가운데서 제아무리 좀 지식 있고 능력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똑같이 죄 가운데 저주 아래에 있는 '유한적인 피조물'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원하는 바를 다 충족시켜 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자. 존경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지도자를 존경하고 존중하지만
초점과 소망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의 왕들과 대통령들이 각 나라들과
인류 역사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궁극적인 주권자라고 한다면
그 끝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온 세상이 다 유토피아로 발전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람 손에 잡힌 지구란, 결국 자원 고갈이나 생태계 파괴 등으로
비극적인 멸망을 향해 치닫게 되어, 순식간에 자멸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왕 중의 왕'으로 화육강세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똑똑하고 낫다고 기대를 받던 지도자들이
오히려 이 인류 역사를 잘못 만들어 놓을 때,
이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전지와 전능을 겸비하신 유일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아무리 세계적인 인물이 유엔을 리드한다 해도
결국 모든 개인과 전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는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줄을 깨닫고,
그런 까닭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참되고 유일하신 왕으로
고백하고 모실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사단의 종이 된 자'에게 '대속의 메시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대하3 :17~24
17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 아들 스알디엘과
18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19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 매제 슬로밋과
20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21 하나냐의 아들은 블라댜와 여사야요 또 르바야의 아들 아르난의 아들들,
오바댜의 아들들, 스가냐의 아들들이니
22 스가냐의 아들은 스마야요 스마야의 아들들은 핫두스와 이갈과 바리야와
느아랴와 사밧 여섯 사람이요
23 느아랴의 아들은 엘료에내와 히스기야와 아스리감 세 사람이요
24 엘료에내의 아들들은 호다위야와 엘리아십과 블라야와 악굽과 요하난과
들라야와 아나니 일곱 사람이더라.
▲여기 기록된 사람들은,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게 망하고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족들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간 이후의 족보입니다.
:17절에 "사로잡혀 간 여고냐(여호야긴)의 아들들은"이라고 문단이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부분에 기록된 족보는
앞에 나왔던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조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들의 아들들',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라고
매우 상세하게 그 족보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의외의 사실입니다.
아까 16절 이상에 나왔던 족보는
그래도 다윗 자손이 유다의 왕위를 잇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쨌든 왕가로서의 명색과 권위가 있을 때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이 17절 이하에서는 왕의 자리를 잇기는커녕
남의 나라에 잡혀 간 볼모로, 혹은 종의 신세로 전락해 있을 때였습니다.
핏줄을 따져 볼 때만 멀리 왕의 자손일 뿐
현실적으로는 왕조와 너무나도 거리가 먼, 왕가의 집안으로서 남은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다른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조의 후손들의 이름들이 그런 시대에 와서
오히려 더욱 자세하고 조직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런 바벨론 포로 시대에 와서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이 시대에 와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 그것 하나에만
온 민족의 소망을 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장차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나라를 잃고 몸까지 사로잡힌 처지가 되었지만,
그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 때문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그 메시아 도래의 약속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소망 외에는 다른 아무 기대할 대상도, 의지할 사람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기 때보다,
남북왕국 분열 시기 때보다, 바로 이 바벨론 포로 시대를 지내고 있을 때,
그들의 메시아의 소망을 이어주는 다윗 왕조의 족보가 더더욱 중하고
귀히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소망은 부분적으로는 '고레스 왕의 칙령'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근동 지방의 권력이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바사 제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그 첫 제왕이었던 고레스가 유다의 해방을 선포하고
고국으로 귀환하도록 허락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에게는 그야말로 '공짜로 주어진 해방'이었습니다.
자기네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했던 '바벨론 포로에서의 자유'가
순전히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심으로써
기적처럼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진정한 해방의 예표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속박되고 사단의 종이 되었던 우리들은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킬 힘이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처럼 '죄의 종노릇하던 자'들에게는
오직 '메시아'만이 유일한 소망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그 모든 '죄의 삯'을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우리 대신 갚아 주시는 '대속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그 어떤 민족의 해방이나 독립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구원입니다.
도대체 세상의 어떤 훌륭한 군주가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친 적이 있습니까?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존경을 받는 위인이나 추앙을 받고 있는 교주들 중에
그 누가 전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속죄제로 바쳐주었습니까?
실로 '대속의 주'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망의 저주를 대신 속량해 주시고,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해 줄 수 없었던 사단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나의 고마우신 구세주'로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다윗 집안은 그처럼 명예와 부를 누리며 아무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지만,
그 명문의 가문에도 메시아가 반드시, 꼭 필요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처럼 행복해 보였던 다윗과 솔로몬 집안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실상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훌륭하고 유능하게 보인 다윗 왕가도
그들을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하고 장구한 태평성세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 다윗 왕가가 저지른 실패와 망국은 오직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양심적으로 살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인생 내면에는 실로 온갖 죄악들,
살인과 간음과 욕심과 거짓이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악해서 도저히 구원을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라고 해서 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타락과 전적무능력에 사로잡혀
스스로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죄인을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혈을 십자가에서 대신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람 가운데서 훌륭하고 뛰어난 개인과
아무리 이 인간 사회에서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최고의 가문이라 해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정답이며 틀림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윗의 집안 꼴을 비웃고 권력자와 재벌의 사생활을
흉볼 자격이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나 자신을 살펴보고 우리 가족부터 돌이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개인의 생애와 가정의 앞날, 그리고 이 인간사회와 인류역사 전체의 미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만 참된 구원이 있음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바로 그 메시아의 생명책 족보에 영원히 자기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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