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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천사와 마리아

LNCK 2012. 7. 15. 20:17
◈사랑방 천사와 마리아         막16:1-8                출처보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고 하는 소설작품을 기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요섭 씨의 아주 대표적인 작품이고

한국 문단에서 한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겠지만 6살 된 딸을 둔, 24세밖에 안 된 과부가 등장을 합니다.

여섯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 옥희의 눈을 통해서,

스물넷밖에 안 된 옥희의 눈에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여겨지는 그 어머니와


사랑채에 하숙을 하게 되어 들어오게 된 그 동네 학교의 교사이신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그저 나름대로 관찰한 바로는

참 작가의 의도가 재미있다는 거예요.


옥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그 집이 사랑채가 있을 정도의 집이라면 꽤 큰 집입니다.


보통 집 한 칸이면 사랑채가 없고 건넌방이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랑채가 있다는 것은 안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와는

별도의 다른 집이, 마당 건너에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이 사랑채가 무엇 하는 곳입니까?

바깥주인이 그곳에 머물면서 그 집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손님들이 오고갈 때,

그 손님들을 맞이하는 곳이 사랑채였습니다.


그러니까 바깥주인의 머무는 장소요, 그 집안을 대표해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안방과 안채는 안주인이 거하는 곳이에요.


남편이 죽은 지 6년이 지난 24살 된 과부입니다,

여섯 살 난 딸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으니까.


남편이 죽은 지 6년이 돼서

이제는 남편이 거하고 손님을 맞이하던 사랑채가 의식 바깥에 있었던 장소입니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사랑채에 대한 관심도 죽은 거예요.

비워둔 채로 7년을 지내 온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머물던 7년 동안 비워둔 그 장소에, 남편의 친구가 들어오게 됩니다.

사랑채라는 건 안채와 묶어서 부부를 연상하게 하는 한옥의 구조입니다.

그 부부관계를 연상하게 하는 사랑채에 남편의 친구가 들어왔을 때,

스물네 살 된 이 젊은 옥희의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남편이 있던 자리에 친구가 들어와서 있을 때.

사랑이 싹트는 겁니다, 가슴이 설레고, 설레는 정도가 아니라 쿵쾅거리고…


그래서 사랑채에 머물고 있는 남편의 친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것을

절제된 표현을 통해서 아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딸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사죄하기 위해

유치원에 꽂혀있던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 줍니다.


웬 꽃이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옥희는 얼떨결에 사랑방에 있는 아저씨가 준

꽃이라고 하면서 건네주자, 어머니가 막 옥희를 야단칩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이런 걸 받아오면 어떡하느냐?’고.


6살짜리 옥희의 생각에는 분명히 어머니가 그 꽃을 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너무 화를 냈으니까.


그런데 6년 동안 잠자고 있던 풍금 위에 꽃병을 올려놓고,

풍금을 열어서 풍금을 칩니다.


어머니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아저씨가 좋아하는 달걀을 날마다 삶아서 갖다 줍니다.

모든 신경이 사랑채에 다 가있습니다.


우리 나이에서 보면, 어린아이에 불과한 이 스물네 살짜리 젊은 과부의 마음속에

사랑채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서 스물네 시간을 지내는 거예요.


자, 사랑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가슴 두근거리며 살고 있는

이 옥희 어머니의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바라봅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이들이 가면서 걱정을 합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그 큰 돌은 어떻게 굴려내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수가 있을까 하고.


그런데 갔다가 기절을 합니다.

돌이 굴러 떨어져 있고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우편에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번개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눈부신 빛의 번개의 형상으로 청년이 앉아있는 겁니다.


청년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너무너무 무서워서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갈래분간을 할 수가 없어 도망하여 나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무덤 앞의 돌을 굴려놓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 이 현장의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복음사건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그대로 이 실생활에서 적용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천국이 옥희 어머니에게 있어서

남편의 친구가 하숙하기 위해 들어온 7년 동안 무관심 속에 비워져 있었던

그 사랑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천국이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고,

그러면서도 그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과 주님과 천사들에 대해서


옥희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억제하고

결국은 그 사랑방 손님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랑방 손님이 나가게 되는

그런 슬픈 이별이 아니라,


그 쿵쾅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도 되는 그런 손님이 들어가 있는

사랑채로 우리에게 천국이 다가온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자,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 천사는 하늘에서 그냥 펄펄 날아서 온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무덤에 묻히시면서

그 무덤은 터널의 이쪽 세상 쪽으로 나있는 입구가 됩니다.


그러나 돌로 막혔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장사되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터널을 뚫으시고 승천하셔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이 있어요,

이제 그 길이 생겨난 겁니다.


그 터널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그 터널을 거꾸로

이 세상을 향하여 다가와서 막혔던 돌을 밀어낸 거예요.


다시 말해서, 개통식을 한 겁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터널의 입구를 뚫어 놓은 겁니다.


예수님은 돌무덤에 갇혀서

저쪽 아버지하나님이 계신 쪽을 향하여 뚫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면서 완전히 터널이 저쪽 방향으로 뚫어졌는데,

저쪽 방향으로 뚫어진 터널의 입구로 천사가 내려와서

막혀있던 돌을 밀어내고 이쪽 세상으로 터널을 열어놓은 거예요.

문을 열어놓은 겁니다.


부활 자체만 문제였다면 돌이 무덤 입구에 막혀있는 상태에서라도

얼마든지 주님은 부활하셔서 무덤 바깥으로 나와서 그들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꼭 누우셨던 곳,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곳이 보이지 않아도

부활하신 당신이 나타나시면 부활하신 거지요.


그러나 그 무덤에 막혀있던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천사들이 그 주님이 뚫어놓으신 저쪽으로부터 무덤 입구 쪽으로 와가지고

밀어낸 겁니다.


7년 동안 비어있던 사랑채가, 안중에도 들어와 있지 않던 사랑채가

죽은 남편의 친구가 들어오면서 사랑채가 다른 세계가 돼버리고,

옥희 어머니의 마음이 24시간 사랑채에서의 기미,

사랑채로부터 느껴지는 그 분위기에 온 신경을 다 쓰며 살아가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그런 장소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터널을 뚫으시면서 천국이라는 곳이 말로만 듣던 곳이고,

죽은 다음에만 가는 장소가 아니라,

천국이.. 가슴 뛰게 하는, 가슴 설레게 하는.. 내 삶의 사랑방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예수님께서 뚫어놓으신 터널 때문에, 그 터널 때문에,

그 터널을 통하여 오고감이 생겨버린 거예요, 오고감이.

옥희 어머니의 마음으로 천국을 대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얘기에요.


돈이 많이 벌리는 것,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 훌륭한 결혼하고 잘사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내가 건강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가며 사는 것,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슴 설렘을 올 킬 해버리는 가슴 설렘이

천국이 나의 삶의 사랑방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터널을 뚫으시는 바람에.


자, 이 터널을 통해 어떤 오고감이 있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떠한 설렘보다도 더 설레는 사건이

이 천국이 사랑방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통해

사랑방과 내가 있는 곳에 어떤 오고감이 있느냐는 것이에요.


자,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됩니다.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어리석도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훨씬 뒤인데

사도바울은 직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현장에 있지 않았고 몰랐었는데,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러므로 듣고 믿음을 갖는다는 얘기는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듣고 모든 의식이

십자가사건에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옥희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이 거하는 그 사랑채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 집중되는 것이 눈에 밝히 보인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십자가를 보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끝이에요.


의식이 십자가사건에 집중돼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나 대신 죽은 것이고,

그러므로 함께 죽은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며


내 의식이 십자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시며 뚫어놓으신 터널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갑니다.


그냥 내 마음이 이동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어진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그 상황을 의식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그 터널을 통해서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라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이 몸이 남아있는 현장으로 그 터널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 내려오는 것이에요.


요한복음에 보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는 그 말 때문에 그렇게 놀라느냐,

앞으로 너희가 인자 위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있는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연합할 때에

그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돼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내가 예수님과 함께 붙어있으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붙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는 장소가

십자가장소라는 얘깁니다.


십자가장소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늘에 있는 존재가 지상에 있는 내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게 터널을 통해서 오고간다는 거예요.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죽은 다음에나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천사가 머물고 있는 천국이 내 삶의 사랑방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옥희 어머니의 사랑채와 같이 그렇게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랑방이 되어서,

그 천사가 내려온 것을 보고 마리아가 놀라고 무서워 떨면서 도망가는 거예요.


이 무서움은, 만약에 흰옷 입은 천사가 아니라

검고 붉은 옷을 입은 마귀가 나타났다면 그때도 무서워했을 거예요.


그러나 흰옷 입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과

마귀가 무서운 형상으로 마리아에게 등장했을 때의 무서움과는

무서움의 종류가 다른 거지요.


제 아버지가 처음으로 저희 어머니를 보려고 집에 찾아왔을 때,

멋모르고 마당에 나갔다가 신발을 떨어뜨리고 버선발로 뛰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해요, 너무너무 당황해서.


마리아가 지금 이런 겁니다.

도대체 천국의 존재가 내 삶의 사랑방에 와있는 거예요.

이럴 수 있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잘못 믿고 있어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이 세상 것, 내가 이루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이루게 되었을 때를 꿈꾸며

마음 설레며 살 때가 아니에요, 지금, 때가.


주님의 십자가에 의식을 집중하기만 하면, 내 마음이 천국으로 갈 것이고,

천국에서 하나님아버지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내 삶의 현장에 천국의 존재들이 내려오는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밝은 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에 집중할 때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교통하실 때

그 교통을 가능케 하시는 그 성령께서 이제 내게도 내려오신다는 얘깁니다.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신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천사가 내려온다는 얘깁니다, 어떤 형태일는지 모르지만.

천국이 우리 삶의 사랑방이 되었다는 얘깁니다.


24시간 그 천국에 관심을 가져야 될 때라는 얘기에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내 몸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그렇게 사랑방이 돼버린 천국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예요.

신경 쓸 것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잘 살까, 못 살까 걱정하고,

이것을 이루어야겠다 하지 말아야 되겠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아랫것을 생각하지 말라, 천국이 지금 사랑방으로 와서

옥희 어머니의 설렘을 가지고 천국과의 관계를 삶의 스물네 시간

모든 주관심사로 삼아야 될 때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바로 이 설렘을 가지고 사랑방이 돼버린 천국을,

그러나 옥희 어머니처럼 그 사랑을 억제할 필요가 없어요,

인습과 기존의 윤리를 따라서 그 사랑을 억제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아버지와 주님과 하늘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익혀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일은 그냥 다 저절로 돼요.


하나님의 뜻대로 돼갈 거예요, 내 뜻을 고집하지 않으면.

이미 나는 죽어서 마음이 천국으로 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든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되겠지요.

반드시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아프던 건강하던,

자식이 잘되던 못 되던 상관할 것이 없어요.


그냥 우리 의식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떠나면 되는 거예요.

그 터널을 따라 하늘아버지께로 가면 되는데,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으면 돼요.


내가 지금 처한 경제문제, 건강문제, 가족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이것에 대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뚜렷한 의식만 곤두세우고 있으면

마음은 천국으로 가고,


사랑방이 돼버린 천국은 천국적 존재들이

하나님의 뜻이건 능력이건 성령이건 천사건,

그 무엇이건 하나님에 속했던 하늘나라 존재들이 그 터널을 통해

내 삶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게 된다는 얘깁니다.


단, 우리 의식이 십자가를 놓치잖아요?

십자가를 잊어버림과 동시에 우리 마음은 다시 세상의 한복판에 떨어져서,

세상에서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희로애락으로 반응하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의식이 십자가를 기억하면

우리 마음은 사랑방이 된 천국으로 우리 삶의 현장으로 천국적 존재가 들어올 것이고,

우리 의식이 십자가를 놓치자마자 우리의 마음은 다시 한 번

이 세상 한복판에 떨어져서


세상에서 좋다고 설정해놓은 것들을 조금이라도 얻어먹겠다고

저주스러운 삶을 위해서 소모전을 펼치게 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사랑방 천사와 마리아> 이 마리아가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셔서 부활하시면서 뚫어놓으신 그 터널을 통하여

내 마음은 하늘로 가게 하시고,

이제 내 삶의 현장에 사랑방처럼 가까이 오게 된 천국으로부터는

천국적인 존재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왕래하는 복된 삶이

나의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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