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한 핍박과 고난을 즐거워하라니 마5:10~12 출처보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0~12
▲종교 개혁 이전의 개혁자였던 이탈리아의 설교자 기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세기에 접어든 후 더욱 부패해진 로마 교회 아래서 온갖 향락을 즐기며
타락해 가는 조국 이탈리아를 향하여 설교했습니다.
멸망을 향해 치닫는 조국 이탈리아 역사의 비탈길에 서서
그는 플로렌스를 향해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죄악의 도성 플로렌스를 하나님이 멸하시리니 회개하라"
그는 추기경의 자리를 주겠노라고 제의하던 로마 교황을 향해
추기경의 붉은 모자보다는, 차라리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결국 1498년 어느 날, 적들에게 체포되어
목 졸려 죽은 뒤 화형 당하고, 한줌의 재가 되어 아르노 강물 위에 뿌려졌습니다.
1485년부터 그가 설교하였던 두오모 교회당에서는
매시간 불같은 메시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숨을 건 용기와 도전 속에서 외친 그의 선포는
정치 지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부패한 삶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청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들고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이 한밤중부터 교회 문 앞에서 줄을 서서
예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한줌의 재가 되어 강물을 따라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각성을 외친 그의 설교는
다음 세대에 도래할 종교 개혁을 알리는 횃불이 되어
칠흑 같은 중세 교회사에 찬연히 타올랐던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의와 불의의 계속적인 싸움입니다.
불의한 통치자나 정권치고, 기독교를 미워하고 핍박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핍박한 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 기독교를 미워하고 싫어할까요?
세상정권이란 대개 정권을 잡고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부정과 부조리를 범하게 되는 데
교회는 불의를 미워하고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일제치하에 있을 때,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산치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의 나치가 왜 교회를 핍박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합왕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왜 미워하고 죽이려 했습니까?
엘리야의 생활이 너무 의로웠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 거리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악을 신랄하게 공격하다가
권력층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 당시의 음란과 사치, 불의한 관원들을 향해서
담대하게 그 죄를 책망하고, 모든 특권층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다가
마지막에 므낫세 때 톱으로 켬을 당해서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민족의 죄악을 생각하고 울며 외치고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미워하고 핍박하며 우물 속에 잡아넣기도 하고
결박해서 옥에 가두기도 하며, 갖은 모욕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려하면
반드시 핍박과 미움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며 오히려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롬8:38-3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핍박당한 성도가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핍박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빌3:10)
주남선 목사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잡혀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은 잔인하여 말로 다 형용하기 힘들었습니다.
엄지손가락 두개를 노끈으로 한데 묶어 대들보에 매다는가 하면.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콧구멍에 붓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며. 손톱 사이에 대나무 침을 꼽고.
인정사정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이러한 악형을 한 차례 가한 형사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돌이켜.”라고
주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백 번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요. 참신은 하나님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소.”
또 다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듭니다.
주 목사는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았고 사방은 조용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이 시련을 이기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다가 우연히 시멘트 바닥을 만져보니
추운 겨울 물로 젖은 시멘트 바닥이, 불땐 온돌방처럼 따뜻하였습니다.
그의 온몸은 포근한 담요에 싸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사르르 저절로 감겨 그는 깊은 잠에 잠겼습니다.
주 목사는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근한 담요는 우리 주님 자신이었어요. 나는 주의 품에서 평안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주목사님과 같이, 고난 받는 자와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2. 현재 당하는 고난보다,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히10:32-34)
1940년대의 한국 교회는 수난의 교회였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신사참배 강요 정책 때문에
수많은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정절을 빼앗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옥되고, 혹은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삼척 지역의 한 감리교도인 최인규 권사도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경찰 당국은 그에게 온갖 회유와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장은 마지막 수단으로 최 권사에게 똥지게를 지우고 가슴에는
"나는 신사참배 하지 않는 최인규이다"라고 써 붙여,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자에 대한 경고요 최인규 권사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최 권사의 친구인 차국성이라는 전도사가 경찰서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였으니, 용서해 달라는 청원을 했습니다.
이에 경찰서장은 차국성 전도사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 처럼 믿으시오.
최인규가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은 바로 당신이요"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 집니다.
최인규 권사의 고난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고난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고난 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이 혼미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쉬운 일을 찾아서, 편한 길을 찾아서 사는 사람이 잘 살고 출세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를 위해 고난 받은 사람들이 잘 살고 주인이 됩니다.
성경에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의롭게 살려고 애쓰다 실패하고 낙심 당한 때도 수없이 많지만
결국은 승리한다는 분명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에서
힘써 이 길을 지키고 극복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고난과 역경을 당해야,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든 위대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살았던 그 당대에는 조롱과 비방을 당했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요한 웨슬리입니다.
그와 그의 동생 찰스와 조지 휫필드는, 영국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유혈혁명을 막은
영적 지도자들로 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는, 영국의 거리와 뒷골목에서 고통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이라 불렀고
때로는 교회 밖으로 내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가 생긴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나도는가 하면,
그는 온갖 죄목이 붙여진 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수십 번이나 그를 반대해서 일어난 폭도들에 의해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이와 같은 것을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즉 자신이 그 사역 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있는 것의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루는 웨슬리가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즈음의 지난3일 동안,
어느 한 사람도 벽돌이나 계란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그는 그의 말을 멈추고 내려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내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것은 아닌가?’하고,
하나님께 혹시 그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반대쪽 울타리 한쪽 끝에서, 그의 기도를 듣고 있던 한 사나이가
그가 바로 웨슬리임을 알아보고는
"잘됐다. 저 감리교 목사를 내가 이번에는 손 좀 봐야겠군" 하고는
벽돌 하나를 집어 그에게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살짝 빗나갔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 괜찮았군요.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었군요!"라며 펄쩍 뛰며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고
여러분에게 욕하고 핍박을 당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만약 그런 일이 지금까지 전혀 없었고,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따르고 있다고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자의 피와 고난의 박해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흰옷을 입은 큰 무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핍박을 당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오히려 기이한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거쳐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4.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필립 쉐프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의 최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처형자들은 그를 채찍으로 몹시 때렸으며 마침내 불태웠습니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처형자들은 미처 타지 못했던 신체를 창 끝에 걸어 놓고
야수의 밥으로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화형에 처하기 직전에‘네가 만약 로마의 시저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이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
라는 제안 앞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86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분을 지금 이 나에게 부인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나는 그를 사랑하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의를 위한 행동과 결단 때문에 받는 핍박은, 자신의 옳음과 진실을 드러나게 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핍박 없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자신이 스스로 불의하고 악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음은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벧전3:14)
▲5. 핍박받는 자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감당 못 할 핍박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핍박을 통해 우리가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을 더 크게 하시기 위해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 핍박을 통해 이 땅위에서의 삶만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오늘 핍박 속에 있다할지라도
미래의 큰 상급을 바라보는 여기에 참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는 말씀처럼,
의인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했고
예수님의 그림자로 일컫는 요셉도 형들의 미움을 사 애굽으로 팔려가야 했으며
그곳에서도 온갖 유혹을 믿음으로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고 경외하던 다윗도
정적 사울왕에게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의인들도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고 광야에서 외친 세례 요한은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했고,
스테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와 사도 바울 등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다가
마침내 감옥에 갇히고 매 맞는 등 모진 고난을 받다가 순교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도 초대교부들과 중세의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등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길을 걷다가 수난을 당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6.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1513~1572)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 참된 성직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 왕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설교했습니다.
이것이 알려져 그는 왕 앞에 끌려갔습니다.
왕은 대노하여 "당장 그 설교를 취소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존 낙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마음이 그것을 생각했고, 입이 말했으며, 손이 정의를 썼습니다.
만일 이것으로도 모자란다면 피로써 그것을 증거하겠습니다.’
▲7. 핍박받을 때,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약1:2~3)
마드라스의 주교가 한번은 트라반코레를 방문하게 되어
‘꼬마 사도’라 불리는 한 노예 소녀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주 열심히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녀의 조용하고도 꾸준한 전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혹독한 박해를 받아,
얼굴과 팔 등 온 몸에 맞은 자국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를 본 주교가 눈물지으며 ‘꼬마야, 이것을 어떻게 참았느냐?’라고 묻자
그녀는 웃음 지으며 ‘주교님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 받는 것이 즐겁지 않으세요?’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역경이 위인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될 때에 사람은 안일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이 닥치면
이전에 못 보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핍박은 더욱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열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핍박 속에서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핍박은 의를 위한 더욱 큰 열심을 내게 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8. 핍박받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왕노릇 할 것입니다. (딤후2:10~12)
한국 교회사에서도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머스 목사,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
의롭게 살던 분들의 길은, 그야말로 고난과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의의 길에서 고난과 수난을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외면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의인의 길이 비록 고난과 수난의 길이지만
이 길을 여호와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은 결국은 형통으로 인도하신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의인의 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가뭄과 더위에도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습니다.
언제나 푸르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시절을 따라 귀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또한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케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에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길이 비록 고난과 수난으로 망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승리의 길입니다.
고난과 수난을 통해 죽음으로 끝날 줄 알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의 삶은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해줍니다. 의인의 길은 승리입니다.
▲9.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능히 지키십니다. (딤후1:12)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썬다씽이 밀림지대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그 군대의 연대장이 썬다씽의 활동보고를 듣고 그를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때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핍박을 했지만, 순종하지를 않자,
나중에는 돼지우리 같은 지저분한 곳에 옷을 다 벗긴 썬다싱을 가두고
그곳에서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 대장은 밤새 지독한 모기들에게 뜯겨서, 썬다싱이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기와 온갖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돼지우리에 갇힌 이 성자는
밤새도록 찬송을 기쁜 소리로 불렀습니다.
연대장이 이것을 보고는 감동하여, 예수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같은 고통 중에도 찬송을 부르게 하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예수를 믿어 보겠다하여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기쁘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견고하게 해주십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는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을 주시며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을 담대하게 지켜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의 목적은 한 영혼, 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때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물러서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일어날 때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환난, 두려움, 핍박, 곤고, 아픔이 닥쳐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이 언제나 평탄한 길만은 아닌 것을 저희가 압니다.
때때로 어렵고 힘든 가시밭길 같은 험한 길을 갈 때, 우리의 힘이 되어 주옵소서.
의로 인해 핍박받을 때,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창조적 삶을 이루는 승리자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핍박이 기다리는 땅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믿음으로 가게 하시고
핍박을 도구 삼아 영혼을 구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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