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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지나쳐 버리지 마옵소서

LNCK 2012. 8. 16. 13:27

◈주님, 저를 지나쳐 버리지 마옵소서      마20:29~34        출처보기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여사는 생후 1개월 쯤 되었을 때에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장님이었지만, 8천여 편의 찬송시를 쓰게 되었고,

우리찬송가도 애창되는 곡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찬송시 중에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가 있습니다.

우리 말 제목이 ‘인애하신 구세주여’라고 번역되어 있고

원작에는 제목이 <Pass me not, O gentle Saviour>입니다.

‘나를 지나쳐 가지 마시옵소서!’ 라는 제목입니다.   ←설교 제목


‘오, 자비하신 구세주여. 나의 비천한 애원이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마시고 들어주소서. 나를 지나쳐 가지 마시옵소서.’

<Pass me not> 이것이 이 찬송의 원래 내용입니다.


영어찬송 1절에 ‘Pass me not, 나를 지나치지 마십시오.’

라는 탄원이 3번이나 나와 있습니다.  주1)


본문에는 여리고성에 두 소경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한 소경의 이름을 바디메오라고 했습니다.

30절을 보면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쳤습니다.


다른 말로 의역하면

“Do not pass me by. 주여, 내 곁을 지나치지 마시옵소서.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주시고 가시옵소서.

제 소원을 들어주고 가시옵소서. Pass me 하지 마시옵소서.” 하는 고백입니다.


29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쫓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두 사람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평생소원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군중 속에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두운 인생이 끝나고, 밝은 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던 소경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무명의 거지가, 그의 이름이 성경책에 기록되어서 세상 끝 날까지

그의 이름이 소개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지 마시고,

나에게 은혜주시고,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요, 거지요, 이름도 제대로 없는 비천한 사람의 부르짖음 일지라도

주님은 지나쳐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Pass me not. Do not pass me by.”

하고 진심으로 주님 앞에 부르짖으면,

“주님, 내 곁을 지나가지 마시옵소서.” 하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면,


부르짖는 사람의 소리를 우리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못 들은 체 하지 않습니다. 지나가지 않습니다. Pass me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머물러서시고,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1. 예수님께서 내 곁을 지나쳐 가시지 못하게 하십시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왜 오셨습니까? 죄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탄에 매여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

지옥 갈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그때만 한번 오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왜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시간도 이곳에 와 계십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도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지나가고 계십니다.

주님이 그냥 지나가시도록 두시겠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Pass me not. Do not pass me by.

나를 그냥 지나가지 마시옵소서. 내 눈을 열어주고 가소서.

내게 은혜를 주고 가시옵소서. 내 소원을 들어주고 가시옵소서.”

하고 간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때도 “주님, 내 곁을 그냥 지나치지 마옵소서.”

찬송할 때도 “내 앞을 지나가지 마시고 서서 내 찬송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배드릴 때도 “주님, 내 곁을 지나가지 마시고 내 앞에 서셔서

내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런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내 집에 들어와서 좀 쉬고 가십시오. 음식 좀 잡수고 가십시오.” 하고

지나가는 길손까지라도 다 초대해서, 그냥 지나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녀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롯도 자기 집을 지나가는 천사들을 그대로 지나가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내 집에 들어와서 발을 씻고, 조금 쉬었다가 가십시오.”

하고 지나가는 천사들을 자기 집에 모셨더니,

소돔 성이 멸망당할 때 그의 온 집이 다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라합은 지나가는 정탐꾼을 지나가도록 버려두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대접하고, 숨겨주고, 은혜를 베풀었더니, 온 가문이 그 성이 멸망할 때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그 앞을 지나가게 될 때에 지나가도록 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십시오.” 하고 방까지 마련해 주고, 침상까지 주면서

“푹 쉬고 주무시고 가십시오.” 라고 했더니, 자녀없는 가정에 자녀가 태어났고,

그 아이가 죽게 되지만 다시 부활하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에 조현재 라는 분이 선원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대만의 카오슝 항에 도착해서, 내일이 귀국하는 날이니까, 밤잠을 설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갑판에 나와 기지개를 켜는데

하필 그 때 큰 파도가 밀려와 배를 덮쳐서, 그만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날이 밝자 배에서는 조현재 씨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으려고

경비행기로 바다 위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그냥 지나가면 자기는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옷을 벗어서 흔들고, 물장구를 쳐서 흰거품을 일으키며 고함을 쳤지만

비행기는 자기를 못 보고 지나갔습니다.


한 2시간 쯤 지나서 또 비행기가 왔는데,

저 비행기가 지나가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에 결사적으로 고함을 치고,

손을 흔들고, 물장구를 치면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려 했지만 

역시 비행기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하고 있는데, 다시 세 번째로 비행기가 오고 있었습니다.

거의 해가 넘어갈 때입니다.


저 비행기가 지나가면 (그때까지 물속에서 버틴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이제는 캄캄해 져서 구조될 희망이 거의 없다고 발버둥을 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비행기에서 조현재 씨를 발견하여

망망대해에서 18시간 만에 구조되어서, 우리나라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 비행기가 지나가면 끝입니다.

비행기가 지나가지 않도록 얼마나 발버둥을 치고,

얼마나 결사적으로 매달렸습니까?

우리가 그런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바디메오도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는 마지막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여리고성을 지나 25㎞ 쯤 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거기서 일주일 동안 마지막 바쁜 일정을 지내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됨으로

육신의 몸을 가지고는, 다시 여리고로 내려오지 못하는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그때 만약에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평생동안 그는 눈 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시기였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시간 나에게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이제 영영히 맹인으로밖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지 마십시오!” 하고 절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내 곁을 지나가시는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십니다. 기도시간에 우리 앞을 지나가십니다.

찬송 시간에 우리 앞을 주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주여, 나를 지나가지 마옵소서. 제발 내 곁을 지나가지 마시옵소서.

Pass me not.” 하고 주님 앞에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 앞에 머물러 서실 줄 믿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서 41장 14절에 보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렁이 같이, 낚싯밥이나 될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나일지라도

하나님은 도와주시기 위하여서 오십니다. 우리 앞을 지나가십니다.

그냥 지나가시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대강절에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시는데

지나쳐 가시도록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에 예수님께서 나를 지나쳐 가도록, 나와 아무 관계없이

지나가시도록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지 말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자를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Pass me 하지 못하게,

멈추어 서게 하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은 비결이 뭡니까?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 지르기를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여”라고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메오는 눈이 멀었지만, 귀는 들렸습니다.

보지는 못해도 들을 수는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분이야 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구나’ 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앞으로 메시아가 오게 될 것이다. 그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다윗의 혈통으로 오게 될 것인데,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산에서는 단 포도주를 흘리는 놀라운 잔치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

예언을 무수하게 해 두었거든요.


그런데 소문을 들으니까,

예언된 그대로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 분이야 말로 정말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 그리스도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이 분이야 말로 정말 다윗의 자손이구나.’하는 확신으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그냥 지나가지 말고, 나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니까, 소경 바디메오가 물었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물으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지금 지나가시는데

그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들었으면 “나사렛 예수여”라고 불러야 될 것인데,

바디메오는, 다른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나사렛 예수여”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님만이 메시아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그의 부르짖음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경들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도 가졌습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만약에 바디메오가 믿음이 없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헛소문이야. 아니면 우연이거나!’ 그렇게 했다고 하면

평생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문둥병은 고치지만 역사 이래로 눈을 고친 사람은 없는데, 그럴 수 없을 거야.’

라고 불신했다고 하면 역시 평생 눈 감고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은혜받고 기뻐하는데, 왜 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신앙만 있으면 나도 동일한 은혜,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 복받은 사람,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있지만 나는 예외다,

그 은혜 못 받을 거야.'라든지 또,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가 없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간증하는 동일한 은혜를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 나도 은혜 받을 수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예수님 믿어서 문제 해결되었다고 하면

나도 유사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질병에 걸렸는데 기도하여서 치료받았다고 하면

나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디메오의 신앙이 바로 이 신앙이었습니다. 바디메오는 볼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의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하면,

내 눈도 뜨게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졌습니다.

이게 바로 바디메오의 믿음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얼마나 많은 질병들이 치료받았습니까?

질병이 치료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내 질병도 치료해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세요.

성경 속에 보면,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내 자녀의 문제도 예수님에게 가지고 나가면 해결 되겠구나.’ 그렇게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라와 리브가, 한나와 같은 여인들이 아기가 없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더니 아기를 낳게 되어졌습니다.

‘내가 비록 자녀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아기를 낳을 수 있구나.

나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렙다 여인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신 주님이십니다.

모두가 다 불황 가운데 있을 때에 그 여인의 가정만은 불황을 타지 않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렇게 역사하신 하나님이시면 나의 문제도 해결하여

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성령충만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런 은혜 받을 수 있음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문제 해결이 나오지만,

단순히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그 문제 해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나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만,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같은 각도에서 볼 때,

때로는 주님께서 내 문제, 내 질병을 해결해 주시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내 몸이 건강하게 되면,

<주님의 뜻 성취>가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문제 해결되고 나서, 신앙을 떠나는 사람 부지기수입니다.



◑3. 예수님은 자신에게 부르짖는 자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다음은 바디메오의 열정적인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자기 앞에 지나신다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소리를 질렀다는 헬라어의 ‘크라제이’는 보통 소리가 아니라 비명입니다.

이 비명을 성경 속에는 어떤 데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지르는 소리와 같은 말로 씁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 소리치는 그때의 소리를

여기에서 소리 지른다고 하는 말과 같은 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비명을 질렀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를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Pass me 하지 마시옵소서!!”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야단을 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지나가시며 이야기하시는데, 너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안 들린다고

한 사람 뿐만 아니고 모든 무리가, 많은 사람이 바디메오를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바디메오가 “아, 그렇습니까? 좀 조용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방해했습니까?

그만 두지요.”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더욱 소리를 질렀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에는 거기다가 부사가 하나 더 붙어요.

<더욱 심히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부사가 몇 개 붙은 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개의 부사가 붙을 만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방울이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디메오는 <더욱> 소리를 질렀는데, 거기다가 <심히>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꼭 방해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좀 더 잘 믿어보려 하면, 좀 더 기도하려 하면,

좀 더 헌금생활 잘 하려 하면, 좀 더 봉사생활 하고,

좀 더 전도생활 하고, 좀 더 구제하려고 하면 반드시 방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는 뭐 광신자처럼 믿는다느니, 그렇게까지 믿어야 되느냐느니,

이상하게 너는 믿는다느니, 건방지게 믿는다느니, 별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면 이런 방해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방해가 오면 낙심하지 말고, ‘아, 올 것이 오는구나.

예수님 만나기 전에 마지막 하나의 장애물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더욱 더 심히 부르짖고, 열심내는 그런 멋진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들이 잘 믿어보려고 하고 은혜 받으려고 하면,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협조하지는 못할지언정, 기도해주지는 못할지언정,

그 신앙을 방해하고, 또 다른 사람의 신앙을 꾸짖고 기를 꺾어놓는 일만은

내가 절대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수족 노릇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묵상기도라는 말은 성경에 몇 번 안 나와요.

그런데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말이 몇 번 나오는가 하면 372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372번이나 <부르짖어 기도하라>, <부르짖어 기도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르짖음은 간절함의 외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부르짖지 않아도 간절하다고 하면 부르짖지 않아도 괜찮아요.


렘29: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부르짖으라고 했습니다.


렘33: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으라. 그러면 응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비밀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점잖게 지성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 질러 기도하면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응급환자에게 무슨 교양이 필요하겠습니까?

죽게 되었는데 무슨 이런 점잖을 뺄 수가 있겠습니까?


덜 급해서 그런 말하고,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지,

만약 자신이 교통사고로 죽어 가는데 지나가는 차가 세워주지 않는다면,

그때 교양을 찾겠습니까? 체면을 찾겠습니까?


부르짖되, 주님이 멈추어 서실 때까지 계속 부르짖는 것이 바디메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자세를 누가복음 18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떡을 구하는 친구에게 떡을 주면서 하는 말이

‘너하고 나하고 친구관계 때문에 떡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강청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부탁하는 과부는

밤낮을 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가니까

재판장이 이래서는 내가 못 살겠다고 들어준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멈추어 서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실 때까지

계속해서 바디메오는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에이스 페르시발은, 캐나다가 낳은 최고의 운동경기 코치입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서 운동에 관한 과학적인 분석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한 가지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이 원칙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선정한, 그가 만든, 그가 발견한 원칙이 뭔 줄 아십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멈추지 말라>. 그 한 마디입니다.


멈추지 아니하고 동일한 운동을 계속해서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신앙에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기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멈추지 말고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에 응답해 주마고 누누히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가 얼마나 대단한 기도입니까?

그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요즘처럼 조명탄도 없고,

또한 내일 전쟁에서 이길 승산도 없으니까 오늘 전쟁을 해야 되겠는데,

이미 태양이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태양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넘어가던 해가 넘어가지 아니하고 딱 멈추어 섰습니다.

하루 종일 승리하여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기도보다도 더 대단한 기도가, 두 소경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두 소경은 태양과 달을 만드신 그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의의 태양>이라고 합니다.

의의 태양되시는 예수님을 그들 앞에 멈추어 서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바디메오였습니다.


의의 태양되시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데, “예수님 지나가지 마십시오.

Pass me 하지 마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더니,

두 소경 앞에 예수님께서 멈추어 섰습니다.


우리도 두 소경 같은 믿음과 부르짖음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을 우리 앞에 머물러 서게 할 수가 있습니다.


두 소경이 받았던 은혜를 우리들도 오늘 이 시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이 기도의 자세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내가 살 수 없습니다.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지 마십시오,

오늘 나에게 은혜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 찬송하면 찬송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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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 Pass me not, O gentle Savior,

Hear my humble cry;

While on others Thou art calling,

Do not pass me by.


Refrain / Savior, Savior,

Hear my humble cry;

While on others Thou art calling,

Do not pass me by.


2 Let me at Thy throne of mercy

Find a sweet relief,

Kneeling there in deep contrition;

Help my unbelief.   Refrain


3 Trusting only in Thy merit,

Would I seek Thy face;

Heal my wounded, broken spirit,

Save me by Thy grace.  Refrain


4 Thou the Spring of all my comfort,

More than life to me,

Whom have I on earth beside Thee?

Whom in Heav’n but Thee?  Ref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