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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4:1~11 인터넷에서 스크랩
<안식>은..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쉬는 개념’
또는 ‘일을 잘 하기 위해 미리 쉬는 개념’ 보다는,
내 신앙생활 전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휴식’보다 넓고 깊은 ‘안식’
쉼표가 없는 노래가 없듯이 쉼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피로를 푸는 쉼이 있어야 하고, 인생의 전환기를 가질 때 일정 기간의 쉼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쉼이라는 단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잠을 자는 것,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는 것,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것입니까?
여러분, 육신의 쉼만으로는 진정한 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양심과 마음의 쉼, 영혼과 관계의 쉼이 필요합니다.
쉼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쉼에는 질서가 있고 균형이 요구됩니다.
진정한 쉼을 쉬기 위해서는 균형이 중요합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들에게 하루의 쉼이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쉼에는 조화도 필요합니다. 쉼은 개인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공동체적입니다.
자신은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쉬고 있는 사람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쉼은 진정한 쉼이 아닙니다.
쉼이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개인적인 쉼과, 공동체의 쉼이 같이 있어야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은
우리가 생각하는 휴식보다 훨씬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쉼은 ‘안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안식에는 쉼이 포함되지만, 쉼이 곧 안식은 아닙니다.
▲리전트 칼리지 교수, 마르바 던 Marva Dawn은 <안식>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안식에는 네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상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염려, 근심, 불안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을 그치라는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쉬는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영적, 사회적으로 휴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휴식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진정한 안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받아들임 단계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축제와 향연 단계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축제가 바로 진정한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4가지 단계가 모두 있어야 합니다.
먼저 내려놓고 그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휴식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이는 항복과, 마음의 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서로 기뻐하고, 축복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입니다.
여러분, 안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믿음으로 화합하면,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받아들임의 안식>의 예
이번 세네갈 선교현장에서 만난 사역자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보았습니다.
세네갈에서 30년 동안 사역하고 계시는 백원경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 세네갈을 떠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왜 없었겠느냐’고 대답을 하면서
“자녀들이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고 영주권이 있어서
언제든지 미국으로 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 있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합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열악한 지역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상황과 형편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에, 내가 순종해서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안식 입니다.
그분에게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사역해야하는가?’라는 불편함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뜻을 받아들인 그분에게는, 마음의 쉼이 있었습니다.
안식은 하던 일을 중지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속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최근 두란노에서 발간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 테네시 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20대 백인여성 케이티 데이비스가
우간다의 한 고아원에서 1년 동안 봉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그녀를 부르신 내용입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고아들의 엄마가 되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녀의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요.
한국의 어머니들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고국으로 데려 왔을 것입니다.
그녀도 부모님의 마음을 해아려 미국에 돌아와, 한 학기동안 대학을 다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익숙했지만
우간다를 다녀 온 이후, 미국에서의 삶이 낯설었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우간다의 그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안식
▲안식은.. 삶의 절정이자 목표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유명한 유대인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안식>이라는 책에서,
“안식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에서는 가장 마지막에 하셨지만
천지창조의 목적과 의도에서는 가장 첫 번째다.”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안식을, 모든 우주만물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7일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6일 동안 무리하셔서, 7일째에 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쉼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우주 만물에 안식의 원리를 불어넣기 위한 것입니다.
평일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삶의 쉼표가 아니라, 삶의 절정이요 목표입니다.
본문 히브리서는, 어떻게 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까?
▲들은 말씀에, 믿음을 더해야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1~2
히브리서는 흩어진 유대인, 핍박 속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핍박 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핍박과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지 않고
“안식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안식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은 말씀에, 믿음을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4:2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하는 자들이.. 안식을 누립니다.
핍박과 열악한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환경과 상관없이 누리는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허락하신 안식입니다.
죽음 너머의 삶을 <영원한 안식>이라 합니다.
그 안식은 미래에 얻게 되는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남아 있습니다”(9절).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안식은, 미래에만 얻는 안식이 아닙니다.
지금도 얻을 수 있고, 또 누려야하는 안식이 있습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와 같이 불순종의 본을 따라 멸망하지 않도록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히4:11
우리에게는 현재 약속된 안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할 안식의 모델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찾았습니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4
‘어디엔가’라고 기록한 것은, 저자가 그곳이 어딘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당시에는 구약의 장절 구분이 없었습니다.
‘어디엔가’는 기록은 창2:1~3절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완성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천지창조의 완성은 6일째 이뤄진 것이 아니라
7일째 하나님이 쉬심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안식일)을 복되게 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우주만물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필요 없지만, 인간을 위해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거룩하고 복되게 하신 날은 제7일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7일은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제7일이라는 시간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공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질서가 거꾸로 되어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어떻습니까.
공간을 거룩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장소를 멋있게 만들면
그 안에 무엇인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공간을 거룩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들은 공간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종교성을 유지합니다.
그 공간에 들어가면 사람이 거룩해 지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먼저, 공간이 아닌 시간(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시간을 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7일이라는 시간을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으로, 서로 기뻐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으로 구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
종교학자들은 늘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신이 공간속에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이 아니라 물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공간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바다가 아무리 넓고 광활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담을 수 없습니다.
산이 아무리 높을 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영원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세상 모든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눈을 감는 순간 우리는 공간을 떠나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도는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이 아니라 시장 속에 있거나 터미널에 있어도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식은 시간속의 거룩함입니다.
7일중 하루를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두어야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간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줄 몰랐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공간 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음미하면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세월이 무상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조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보장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합니다.
영원을 느끼는 하루를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시간중심으로 사는 인생
우리는 기도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세월이 무상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시간을 느끼고 시간 가는 줄 알면서 살아야합니다. ☞ <시간> 관련글 모음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거룩함을 구별해서
자신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됩니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간은 생명이요, 영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하는 것은 내 인생을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하심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 때문에 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공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내다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짧은 인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영원한 인생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에서 영원을 느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안식을 누리는 축복
매일 매일의 삶이 안식이 되어야합니다.
꼭 안식년을 떠나야만 안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이라는 단어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복잡한 제도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 그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안식은 제도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안식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안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환경에 있든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이라는 축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간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쉼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와 안식을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와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속에 양심에 쉼을 얻게 하시고, 영혼의 안식을 얻게 해 주시고
관계에 안식을 갖게 해 주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민족에게도 참된 안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