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재건의 기초 작업 스3:1~13 출처
스1장에서는 유다 백성이 바사(페르시아)에서 귀환하게 된 원인과 경과를,
스2장에서는 귀환자들의 수와 그들이 바친 예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스3~6장은 성전 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 중에 3장은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신실하게 시행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을 위한 제반 준비 사항과
기초작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 (1-7절),
-성전 재건의 기초작업 (8-11절)
※에스라서의 저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경에 2차로 귀환했습니다.
본문을 포함해서 에스라 1~4장은, 60~80년 전 과거의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스라가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에스라 5~10장까지 2차, 3차귀환 이야기가 나오면서,
여기는 에스라가 직접 경험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서' 하면, 당연히 에스라가 모든 것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에스라가 기록했지만, 1~4장은 과거의 역사를 누군가로부터 듣고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때의 주인공은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선지자 학개, 스가랴 등이지,
에스라는 아닙니다. 에스라는 그때 아직 바벨론에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본문 스3장의 등장인물 속에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본문을 읽으면, 많은 혼동이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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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주전 537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1-6장은 1차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7-10장은 2차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느헤미야 1-13장은 3차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어제 본문인 2장에 나온 바와 같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일반 회중이 42,360명, 남녀 종이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등
모두 49,897명(약 5만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고향땅에서 회복과 안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귀환한 7월에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7월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인데, 지금의 양력으로 하면 9-10월 경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일제히’ 모였는데, ‘일제히’의 문자적인 뜻은 ‘한 사람처럼’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초막절을
7월 15일일부터 일주일동안 지켰습니다.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같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마치 추석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듯이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모임이 특별한 것은, 수십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와 처음 맞는 초막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남미나 유럽으로 이민을 갔던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에서 추석을 맞이한다면,
정말 감회가 남다를 것입니다.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모인 사람들 중에서 예수아(대제사장)와 그 형제 제사장들과 스룹바벨(총독)과
그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지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임시로 제단을 만든 겁니다.)
즉 모인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예배를 복원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때부터 인도하신 하나님, 특히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그 일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혹 삶이 망가진 것 같고, 모든 관계가 어그러진 것 같아서 혼란스러운 분이 계십니까?
그런 삶에서 온전한 삶과 관계로 회복되는 첫 출발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삶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해 둘째 달에,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 그룹의 주도로 성전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고, 시돈과 두로의 기술자들도 고용하고,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수입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20살이 넘은 레위사람들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했습니다.
본래 레위인은 25살이 넘어야 본격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포로에서 돌아온 후라 인원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20세 이상을 감독관으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 성전을 다시 건축했다고 하는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훌륭하고 멋진 건물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재건을 통해서 무너진 자신들의 신앙을 다시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 성도님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종종 교회 근처에 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또한 남은 생애동안 교회에 편하게 다니기 위해서 이사를 하셨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예배드리는 홍보관 근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가까이로 오셨거나
오고 싶으시다는 의미만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으시다는
소망과 결단의 표현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던 이유가 그러했습니다.
10-1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성전의 기초가 놓였을 때에 제사장들은 나팔을 들었고, 레위인들은 제금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서로 찬양하고 감사로 화답”하였습니다.
이쪽에서 찬송을 부르면, 저쪽에서 감사를 드렸고,
저쪽에서 찬송을 하면, 이쪽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장면이 꼭 시편 136편을 찬송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시 136:2-4)
이쪽 :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저쪽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쪽 :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이쪽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쪽 :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저쪽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찬양을 올려드리는 사람들에게 찬양과 감사는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찬양과 감사는 인간의 길보다 언제나 높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또한 인간의 생각보다 언제나 높으신 생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길을 돌아보고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12-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성전의 기초공사가 끝이 났을 때, 그 광경을 보러온 사람들의 반응이 2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한 그룹은 너무 기뻐서 함성을 질렀고, 또 한 그룹은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기뻐 함성을 질렀던 사람들은 무너졌던 예배처소가
이제 다시 생기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고,
대성통곡을 하였던 사람들은 과거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로 옛 성전과 비교하면,
지금 성전의 초라함과 지난 세월 이런 성전도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의 서글픔이 기억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이 둘 다 멀쩡할 때는 전혀 의식을 못하다가 넘어져서 팔 하나가 부러져 깁스를 하면,
두 팔이 있을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압니다.
팔 하나로는 세수하고 머리를 감기도 불편하고, 옷을 입는 것도 불편하고,
음식을 준비하기는 정말 불편합니다. 전구를 갈아 끼우는 것은 거의 포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를 드릴 수 있도록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고,
실시간 방송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책상에 앉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몸이 아파 쉽게 움직일 수 없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없을 때,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던 때가 얼마나 그립고,
그 때에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함이 얼마나 죄스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가 주님께 올려드리는 온전한 초막절 절기가 되고,
우리의 삶을 더욱 성전으로 가꾸어가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에서
세속적 가치관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리의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임스 스미스 라는 분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이 책을 썼는데
그 분은 예배를 흥미롭게 풀어나가요.
오늘 현대문화 속에서 예배를 잘 해석하는 그런 책을 썼는데요.
이분이 얘기해요. "현대인들의 새로운 성전은 쇼핑몰이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실천의 공간이 백화점이다" 라는 것입니다.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떻게나, 얼마나 가슴이 흥미진진해 지는지요.
나도 모르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현대인들은 현대의 그 성전 안에서의 예배가 시작이 되고, 깊이 몰입이 되는 들어가는 순간,
생기가 돌고 눈에는 빛이 나고
이제 막 도착한 신상품들의 그 영광의 광체를 눈으로 보면서,
가슴은 뛰고 만족감은 극치를 향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신상품에 몰입되고, 엎드려 절하게 되는
지갑은 거리낌 없이 열리고 희생의 헌금을 드립니다.
그 앞에 서면, 왠지 내가 주인 된 것 같은 느낌,
저 옷을 입어야만 내 삶의 변화가 이루어 갈 것 같은 환상,
그래서 내가 원하는 옷을 입는 순간, 나는 어롭다함을 받은 것 같아요.
같은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을 든 사람끼리의 공동체성이 형성되기까지 하죠.
그러나 백화점에서 나올 때는, 여전히 나는 나의 부족함을 느낀다고 해요.
다음에는 반드시 업그레이드 하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된답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흠이 많음을 인정한다.
이 명품 브랜드의 신상품들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값을 묻지 않는다. 값을 묻는 것은 매우 불신앙적이다.' 하고 다짐하는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 헌신을 결단하게 만드는 브랜드 중에서도
슈퍼 브랜드들이 있습니다.
'그냥 믿어! 슈퍼 브랜드의 값을 묻는 것은 신성 모독이야!'
소비자들과 브랜드 와는 신비로운 연합이 형성됩니다.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까지 연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광신적 숭배자들이 됩니다. 충성도는 매우 높습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에 비해, 정작 진짜 교회, 참 성전인 회중 들의 모임에 들어가면,
기도 시간이나 설교는 너무 길고 따분함을 느낍니다.
예배 시간 내내 시계를 드려다 보고 또 봐도, 좀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축도입니다.
여러분 물질적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현혹시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세 가지, 금과 옷과 약이에요.
오늘날로 표현하면 money, 패션, 그리고 건강 입니다.
그 문제에 현대인들은 온통 관심이 쏠려 있어요.
오늘날과 라오디게아 교회는 너무도 흡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