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복음? 요17:11, 25
Rev. David Pawson (1930~ ) Gospel of Love?
*맨 아래 동영상 녹취, 정리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방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넘쳐나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성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1서에 주로 나오고, 다른 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요한1서의 전체 주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이
오늘날, 기독교를 거의 대표하는 신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최근에는, 형용사를 하나 더 붙여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unconditional love of God
하나님에 대한 그런 믿음이, 오늘날 교회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을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국, 에섹스 지방에 두 남자가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동성 결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국 법은 동성간 결혼을 허용하니까요.
두 사람은 한 동안 살다가, 아이를 갖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아이를 임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한 여자에게 대리모가 되어 달라고 해서
동성부부 중의 남자의 정자를 미국에 보내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거쳐, 그 아이를 영국에 데려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동성 부부는, 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 아이를 영국 교회로 데려와서, 세례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동성 커플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목사는 조금 망설였습니다.
두 남자 중에, 남편 노릇을 하는 사람이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 아닌가요?’
그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어느 설교자가,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기는 ‘unconditional love’라고 하니까,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누구도 심판하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무조건 용납하는 분’이라고 이해합니다.
*일면 맞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우롱하는 자들은,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실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면, 꼭 전도에 도움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전도에 손해 보는 면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합니다.
1. 사람들은 ‘이 세상에 고통을 허락한 하나님’에 대한 비판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데, 왜 이 세상에는 고통스런 일이 많으냐?’고 합니다.
어려서 소아암에 걸려 죽는 아이도 있고, 무고하게 폭행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실제로 감옥에 가지 않고 비교적 착하게 산 사람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는데,
그래서 그들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든지,
아니면 지옥에 보낸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은, 누군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너무 맹신한 나머지
생기는 부작용들입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맞지만,
그것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주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주제를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제가 지옥에 관한 책을 썼을 때,
영국 전체의 TV와 라디오 방송에서 저를 인터뷰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21세기에, 지옥을 믿는 진기한 인간’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오늘날 서구에서, 지옥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드물어진 것입니다.
제가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파슨씨,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건 제가 예수님께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개념은, 당신은 어떻게 갖게 되었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게 된 진행자는, 당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말씀하지 않았나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만,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오히려 지옥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약10차례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말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그 누구도 지옥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부/스올은, 무덤 또는 죽은 자들이 간다고 믿는 곳인데, 지옥과는 다릅니다.)
신약에서도, 요한도, 바울도, 베드로도,
지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옥의 존재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지옥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확실히 아시기 때문에,
지옥에 관한 설교는 예수님만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이
동시에 ‘지옥의 공포스러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흥미로운 것은, 지옥에 대한 경고는,
두 경우만 빼고는, *바리새인들에게 지옥을 경고하신 적이 두 번 있습니다.
모두 거듭난 신자에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죄인들에게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지옥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충돌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납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한,
의로우신 사랑이며, 강인한 사랑 stubborn love 이십니다.
무조건 우리의 모든 죄와 응석을 영원히 다 받아주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에 몇 번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강단에서는 너무 자주 인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34,000개의 구절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은 고작 36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약 1천 구절 중에서, 1구절만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중심적 사상인줄 알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해치고 있습니다.
성경전체를 빠르게 살펴봅시다.
창세기: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번
레위기: 0번
민수기: 0번
신명기: 1번
여호수아: 0번
사사기, 룻기: 0번
그렇게 쭈욱 나가다가, 시편에 ‘하나님의 사랑’이 몇 번 나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할 때 나옵니다.
잠언 : 0번
이사야서 전체에서: 1구절
예레미야 전체에서: 1구절
에스겔서 전체에서: 1구절
다니엘서: 0번
호세아서: 몇 번 자주 나옵니다.
신약으로 가봅니다.
마태복음: 0번
마가복음: 0번
누가복음: 0번
요한복음: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죠. 몇 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0번
로마서: 1구절
서신서: 0번
요한일서: ‘하나님의 사랑’이 몇 번 나옵니다.
계시록: 0번
그러니까
구약에는, 다윗이 쓴 시편에,
신약에는, 사도요한이 쓴 <요한복음, 요한일서>에만
‘하나님의 사랑’이 주로 나오고,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안 나오거나,
나오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편중해서 강조하는
오늘날 기독교는..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난, 심각한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말이 안 들어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성경 내용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란 표현이 안 나오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편중되어 강조되고 있다’는 데이빗 파슨 목사님의 주장은
틀리지 않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지적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전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도 그런 식으로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가 성장하고 널리 퍼져나갔던 사도행전에도
거기에 사도들이 설교가 몇 편 나오는데,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절이 한 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그런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에도, 즉, 그가 전한 복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복음의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변종 복음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하면, 어떤 사람은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요3:16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나오고,
그것이 성경과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그 한 구절이,
성경 전체를 대표하는 구절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중심적 주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적 주제가 아니라면, 그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전해야 하나요?
만약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 무엇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야 하나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 Righteous Father’라고 불렀습니다. 요17:25
또한 '거룩하신 아버지여 Holy Father' 라고 부르셨습니다. 요17:11
또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 자비하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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