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2

모든 이에게 기쁨이 되는 승리

LNCK 2012. 10. 31. 11:14

◈모든 이에게 기쁨이 되는 승리      삼하19:1~10     12.04.09. 김영준 목사님 설교, 인터넷에서 스크랩

 

*부제: 리더십의 릴레마와 그 해결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조지 패튼 장군에 대한 영화를 보면, 벨기에 바스통(지역)에서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당해서 항복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공군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패튼이 군목을 부릅니다.

‘날씨 기도문을 써 주시오.’

‘장군님, 무슨 말씀입니까? 날씨 기도문이라니요?’


‘날씨가 너무 나빠서 공군기를 띄울 수 없으니, 날씨를 바꿔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으니, 기도문을 써 주시오.’

‘날씨가 좋아져서, 형제를 죽이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기도문이나 써 주시오.’


그래서 군목이 기도문을 써가지고 옵니다. 패튼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다음날 희한하게도 날씨가 화창해서 연합군이 공군기를 대거 투입하게 되고

독일군의 포위망이 뚫리고, 위기에 몰려있던 연합군이 구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패튼이, 군목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을 명합니다.

아마 기도를 잘했다고 훈장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한쪽에서는 전쟁에 이겼다고 하나님께 감사하겠지만

이쪽이 이기든 저쪽이 이기든 많은 사람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지는 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드신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기뻐하실 이유가 하나님에게 있겠습니까.


오늘날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 딜레마는 첫째는 성과를 거두어야 되는 의무가 있는데,

성과만 거두면 안 되고, 둘째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는 것,

즉, 성과도 얻고, 사람들의 마음도 얻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성과 위주로 나가자면.. 사람들의 인심을 잃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인심을 얻게 되면.. 성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건국 이후 국가 발전에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지만

그 공로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독재정치를 폈다는 것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대통령처럼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다 그때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공로가 참 큰데, 그 공로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함으로 국민의 인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리더의 딜레마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정치 지도자도 그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국민의 인심을 잃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반대당이 일어날 것이고 국민이 일어날 것이고 여론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독재니, 민주주의의 후퇴니, 별의 별 수식어를 사용하면서 비판할 것입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보면 검투사들의 주인 프락시모가

주인공 러셀 크로우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훌륭한 검투사가 되려면, 싸움만 잘해서는 안 되고, 청중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


참 어려운 주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어려운데,

싸움도 잘해야 되지만 관중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니요.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오늘날 지도자들의 입장입니다.

일도 잘해야 되지만, 국민들이 좋아해야 됩니다.

그런데 과연 몇 명이나.. 그걸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은 못하는데, 국민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포플리즘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정치가가 되려고 하는데, 그래서 포플리즘 정책을 펴지만,

실제로 나라를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할 만한 배짱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먼저 유능한 사람입니다.

거기에 용기 있고, 배짱(소신) 있는 사람이에요.

윈스턴 처칠 같은 사람, 마가렛 대처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나중은 어떻게 됐습니까?

2차대전이 끝난 다음에 영국 국민이 처칠을 수상의 자리에서 내쫓지 않았습니까.

전쟁 시에는 필요한 인물이지만, 평화 시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윈스턴 처칠 수상을 국민이 그 자리에서 내쫓았어요.  *Churchill : 교회가 있는 언덕?


마가렛 대처도 ‘철의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지도자였지요.

냉전이 끝날 수 있었던 이유, 또 영국의 경제가 다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가렛 대처의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독선적인 스타일 때문에, 자기 당 사람들마저도 그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은, 잘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서봤자 본인이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일을 잘 하더라도, 결국은 비판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 정말로 공동체를 위하여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욕먹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됩니다.

요즘에는 초등학생들까지도 권위(지도자)를 욕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로도 세우고, 영광도 누리려고 하면 그 사람은 실패합니다.

그야말로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런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칭찬해 주든, 칭찬하지 않던 간에

오직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을 믿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리더십의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상처가 많고 실망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연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 말씀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설명 드리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예루살렘성에서 내쫓았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아무리 기다려도 형 암논을 죽인 자기 과오가 있기에 왕의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줄을 알고 선제공격을 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한때 상당한 위기에 처하지만

압살롬이 전략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다윗의 신복들이 반격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군대를 무찌르고 압살롬을 죽입니다.


쿠데타는 평정됐습니다. 다윗의 왕권은 회복됐습니다.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이 기뻐하지 않고 슬퍼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아무리 반란을 일으켰지만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아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면서 울면서 슬퍼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의 신복들은 입장이 난처해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다윗에게 충성한 것입니다.

큰 공로를 세운 것입니다. 큰 업적을 이루었어요. 다윗에게 충성했어요.

그러기에 사람들이 다윗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뻔하였나이다’


맞는 지적입니다. 다윗의 신복들이 이렇게 충성해서 다윗을 섬겼는데

다윗이 기뻐해 주어야지

그러지 않고, 슬퍼하면, 차라리 압살롬이 이겼으면 나았다는 그런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약간 비약을 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이.. 본문의 다윗의 입장과 같다고 보고,

오늘날 우리가.. 다윗의 신복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힘써서 하나님을 섬기고 공적을 남기려고 할 때

우리가 어떤 공로를 세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애를 써서 공적을 세운다고, 국민들이 좋아한다는 법이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공로를 세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건 딜레마입니다.


내가 열심히, 내가 충성스럽게, 내가 성과를 거두었다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하나님도 좋아하실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공적을 세웠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이 슬퍼하실 수도 있습니다.

-민심을 못 얻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내 나름대로 성과를 세울 때 그렇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애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지 않았습니까.

구약 성경에 모세와 같은 인물이 없습니다.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므리바의 물가에서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니까


모세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며 반석을 치자, 거기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지팡이로 반석을 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그것 때문에 모세에게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까지 인도는 하지만

모세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금지하셨어요.

큰 업적을 세우고도, 어쩌면 하나님께 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수고하고 그렇게 애를 많이 썼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가 한 일을 기뻐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거룩함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지 않았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우리가 공로도 세우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처럼,

공로를 세우고 하나님도 좋아하게 하는 것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결론, 핵심 단락

그럼 누가 이 일에 성공했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것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귀감이 되는데 성공하셨고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하신 모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그 비결은 단 하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낮추시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이던 예수님을 의심하던 사람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 앞에서는 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느냐.

그건 예수님의 공적 때문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위대함,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성과,

이것만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 앞에서는 그들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뭐라고 말했느냐면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


그래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


도마는 결국은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보고나서야 ‘나의 주, 나의 하나님’하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이 비결이 바로 한 알의 밀알의 원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공로만 세우신 것이 아니고,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것을 기뻐하시고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국가든 기업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이런 것을 위해서 공로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한 알의 밀알이 되면 됩니다.


영웅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됩니다.


밀알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공로는 세우는데, 인심을 잃던가

아니면 사람 눈치 보느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든가

혹은 (공로, 인심 얻기) 둘 다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 또한 캐나다 같은 영연방국가에서는 공무원을 부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civil servant 라고 부릅니다.

아니면 public servant. servant 라는 말은 ‘종’이라는 뜻인데

또 장관을 뭐라고 부르느냐면 minister 라고 부릅니다.


minister 라는 말은 원래 목사라는 말인데 ‘섬기는 자’라는 뜻입니다.

총리를 뭐라고 부르느냐면 Prime Minister 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역사 속에 공직에 있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미니스터)’이라는

생각이 뿌리가 깊이 있는 거예요.


미국 같은 데에서는 장병을 serviceman 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군복무를 military service 라고 부릅니다. 이건 참 좋은 말이에요.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관직이라고 부르고 벼슬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벼슬이라고 부르는 것과 public service 라고 부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리더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도자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이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에요.

그게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셨더니 당신의 일도 성공적으로 이루시고,

사람들의 마음도 얻으시고 하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유일한 길이에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는 것,

그것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