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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직하게 절망하기

LNCK 2012. 11. 3. 12:43

◈지금 정직하게 절망하기          눅16:19~31                출처보기


◑서론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박 노해 시인의 시 가운데 ‘길이 끝나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마지막 구절에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라고 했는데,

도대체 박노해 시인이 말하는 정직한 절망이라는 것은

무엇을 어디까지 절망하는 것을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참으로 마음을 통쾌하게 해주는 반전입니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정직한 절망’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희망의 시작이니까요!


요즘 ‘절망하지 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너무너무 시끄럽습니다. 저는 아주 듣기 싫어 미칠 지경입니다.

어떤 고난의 환경에 처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라’고 말합니다.


위 시의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지요?

위 시에서는 ‘정직한 절망을 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류의 문제가 뭐냐 하면, ‘희망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세상 죄인의 문제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세상적 희망’에 대해서는.. 절망해야 되는데..

그래야 예수 안에서 참 소망을 붙들 수 있는데,


세상의 선생들과 책들은 ‘절대로 절망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인간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정말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살것이다!’ 하는 게 인간이고,

세상적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근데 이게 진짜 문제고, 이게 바로 원죄로부터 표현되는

인간의 가장 극악무도한 체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귀의 업적 중의 업적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해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체질을 만들어주고,

희망이라는 단어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도록 인간을 설득시킨 것이

마귀의 최고의 업적니다. 무슨 뜻인지 계속 읽어보세요.


◑본문 설명 


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 해석의 딜레마

그런데 이 본문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딪히는 문제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부자가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되는 이유가, 그다지 명확하거나 설득력이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낙원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경위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럽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됐는지에 대한,

그렇게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을 보였다거나

구원의 조건이 될 만한 것을 충족시켰다거나 하는 그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부자의 대문간에 앉아가지고 부자의 집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빵부스러기로

자기 주린 배를 채우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온 몸에 헌데가 나가지고 북북 긁고 있는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는 것 말고는

나사로가 잘한 일이 없어요.


부자도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는 것을 우리가 순화시켜서 이야기하면,

조금 럭셔리하게 치장하고 다니면서 그걸 좀 기뻐한 겁니다.


이 ‘즐기다’라는 단어 자체가 ‘기뻐한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뭐 그렇게 잘못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 보통 기독교인들, 다 이렇게 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명품 가방에 명품 목걸이에, 돈 쓰면서 기쁨을 얻고 살고 있잖아요?

그리고 날마다 또는 하루걸러 외식을 즐기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가 그렇게 잘못 되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부자가 죄 입니까? 그거 신명기에 의하면, 잘 믿어서 축복받은 것 아닙니까?


반대로 나사로가 뭐 그리 잘해서,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가난과 질병이 벼슬입니까?

 

지금 <본문 해석상>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만 놓고 해석해 보면, 오리무중에 빠집니다.


▶그런데 본문에, 해석의 실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25절에, 아브라함이 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에게 말합니다.

‘너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나사로가 받았다는 이 '고난'이라는 단어는,

히틀러의 압제 하에서 고난을 받은 것 같은, 이런 의로운 고난이 아닙니다.


앞에서 부자가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나사로는 ‘고난’ 즉, 나쁜 것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다..

이 땅에서 살 때 좋은 것을 받은 것이..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된 겁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나쁜 것을 받은 것이

낙원(천국)에 갈 이유가 된 것이라는 거예요.


이게 사실이라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좋은 것’을 즐기다 살면.. 나중에 부자처럼 됩니다. 

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본문 중에서 풀이하면

19절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가 됩니다.


<날마다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들로, 즐기면서 살면..>

최후에, 부자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즐기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지만,

날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쾌락위주로 살면.. 영원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에덴에서 추방되어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에덴이 뭡니까? 기쁨의 땅입니다.


기쁨의 땅에서 추방되었으면 19절에 나오는 ‘즐기더라’,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땅의 삶의 현장은 에덴 밖이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이 없어요.

    *‘에덴’의 뜻이 기쁨입니다, 에덴은 기쁨의 땅이에요,


이 상태, ‘세상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다’는 이 절망에 대해서 정직해야 된다는 겁니다.

(서두에, 시인이 ‘정직한 절망을 해야, 희망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부자도, 날마다 잔치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매일' 잔치 했던 것이 아닐까요?  혹시 내일 잔치는 기쁠까봐..


그런데 마귀가 한 일이 뭐냐 하면, 

그 기쁨의 땅에서 추방된 인간들에게

이 세상에서도 에덴을,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설득을 시킨 겁니다.


전부 마귀에게 속아가지고, 돈 많이 벌면 내 마음이 기뻐지는 거예요,

그거 속은 겁니다.


예수가 없이 ‘홈 스위트 홈’이 있다고 내 마음이 기쁜 거예요.

가짜 기쁨입니다. 예수 없는 ‘가정의 행복’은.. 속은 것입니다.


애인이 생겼다고 내 마음이 기쁜 거예요,

이게 지금 마귀에게 설득되었고, 속은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내 마음이 기뻐질 수 있는 좋은 것을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내가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천국의 기쁨,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갖지 못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 벌어서 기쁘다, 사업이 잘돼서 기쁘다,’

그러다가는, 부자처럼, 낙원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정리하면, 부자가 낙원(천국)에 못 들어간 이유는,

‘세상 기쁨의 낙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 기쁨’이라는 것.. 그것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허무’는 말이 되지만, ‘세상 기쁨’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일생의 목적을 ‘세상 기쁨(=세상 허무)’에 걸고서,

그 신기루를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영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나사로, 뭐 잘한 것 하나도 없지만..

‘내가 건강해서 기쁘다’ 이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나사로처럼 헌데를 앓아야 된다는 거예요.

세상 건강의 기쁨의 허무함을.. 그는 질병을 통해 느꼈던 것입니다.


에덴 밖에 쫓겨난 현실의 상태를.. 그는 처절히 느끼면서,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에덴,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세상 (마귀가 주는) 기쁨에는 속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 영생의 기쁨, 에덴의 회복의 기쁨..

이런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느껴도 이론적으로만 알고

그저 ‘스위트 홈이 있어서 기쁘다’.. 이거 안 됩니다.

그럴 바에야, 나사로처럼, 아예 집도 없어야 된다는 얘기에요.


세상 기쁨, 세상 부귀영화, 세상 즐거움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그 신기루에 대한 ‘정직한 절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부귀 영화.. 그게 정말 행복인가?’

내가 정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그것을 향해, 일평생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실패하는 삶입니다. 부자처럼!


애인 때문에 기쁘다고요? 아니요, 거지 나사로처럼 돼야 된다는 겁니다.

애인이 주는 기쁨.. 그거 신기루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누가 애인이 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나사로가 되지 못하고, 부자가 되면,

애인 때문에, 7전8기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7번 실망하고도, 8번째 다시 도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친구요, 신랑이 되어주시는 기쁨은..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나중에 부자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땅 위에 있는 것들,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중에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이 지금 있지요?

지옥 간다는 얘기에요.


극단적으로 ‘거지 나사로처럼 돼야 된다’는 이야기를 표현하시면서,

이게 아니면 아무도 천당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세상 신기루에 대해.. 정직하게 절망하고

주님이 주시는 참 영생의 행복, 주님과 동행의 기쁨.. 그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직접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선결 조건이.. <정직한 절망>입니다. 


▶정리하면

아,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참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돈 많이 벌어서, 그것으로 기뻐하면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가 거의 없어요.


‘(예수 없이) 가정이 홈 스위트 홈이 되었다’고 기뻐하면

지옥에 간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에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면 에덴 밖에서 벌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기쁨에 대해 절망해야 되는 거예요.

이 정직한 절망이 있어야 구원의 참 희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세상 안에서 기쁨의 일, 좋은 것, 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이

언젠가 생길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아, 무서운 거예요, 이 희망, 원죄에 뿌리를 두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희망의 힘.

이걸 끊어내야 됩니다.


에덴 바깥으로 추방을 당했으면, 마땅히 정직하게 기쁨이 없음을 고백해야 됩니다.

그래야 참 기쁨의 세계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이 계셨으므로 기뻤던 에덴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때? 자식으로 기뻐하면 되잖아?

돈 벌어 기뻐하면 되잖아?

몸이 건강해서 기뻐하면 되잖아? 애인 사귀어 봐, 기쁠 수 있어!’

여기에 다 설득이 돼버렸어요. 다 속아 넘어가버렸어요.


◑마음의 간음, 영적인 간음


이것을 ‘간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본문이 19절부터 시작하는데, 직전인) 18절에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얘기를 잘못 이해할 때가 있어요.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들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게 간음이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탈선을 하는 것도 간음이지만

지금 18절을 가만히 보면

‘아내를 바꾸어야만 마음이 즐거워진다면

이 마음은 아내라는 존재를 통해서 간음하고 있다’ 이 뜻입니다.


‘왜 네 마음이 아내를 바꿔야만 기쁠 수 있느냐? 아내 때문에 기쁘다면 그게 간음이다’

이겁니다.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것과 맞물립니다. 대칭적으로.

이 돈을 좋아하는 것, 돈에 마음이 닿아야만 기쁘다.. 이게 바로 영적인 간음이라 이겁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에요.

마음의 간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세상에서 기뻐할 일을 찾아낸 것,

그래서 그 일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게 바로 마음의 간음,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이 영적 간음을 없애야 돼요. 간음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갔다고 기뻐하는 마음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앞서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마음은 쬐끔이고,

자녀 명문대로 인해 기뻐하는 마음은 엄청 크다면.. 부자처럼 연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하신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차 있지 않는데도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신 겁니다.


왜 독사의 새끼라고 그랬습니까?

사탄이 독사가 무엇을 했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 말고 내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이유를 가르쳐준 겁니다.

다 거짓말이고 사기인데, 이 사기에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도,

독사의 새끼들이 된 겁니다.


왜? 독사가 가르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도 우리 마음이 기쁠 수 있는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도우는 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움의 궁극적인 방향성은 행복과 평강과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돕는 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이 기쁨의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거지가 돼서 헌데가 온몸에 나있고,

개가 헌데를 핥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 이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도움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원죄의 체질을 받고 난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절망하지 말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대부분 사람들은, 절대 절망 안 합니다. 세상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혹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자살합니까?


이 세상에서 너무너무 강하게 희망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기쁨의 이유를 하나 찾아내고 거기에 모든 걸 다 걸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살하는 거예요,

절망해서가 아니에요, 희망이 너무나 과해서이지.

그건 절망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자식을 바라보며 절망하세요.

그 자식을 통해서 기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세요.


돈을 버는 사업가라면, 돈을 벌어 사업장에서 기쁠 거라는 희망을 버리세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절망하세요.


왜? 에덴 밖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절망하세요.


이 정직한 절망의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내 마음이 먹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대해 절망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으로 하여금 기쁨을 기대하게 하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죽는 지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직하게 절망하는 자에게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만이 기쁨의 이유가 되면서 에덴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을 향해 나가세요,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을 가지고.

이게 바로 천국백성이지요.


하나님아버지, 정직한 절망이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정직한 절망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래서 참된 희망을 하나님을 향하여 갖게 하시며,

하나님으로 인해 생긴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