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ifyzPHJTyjI
◈어린 양이 영광 받기에 합당하시도다! 계5:12~13, 사53:10~12, 고후4:12 출처보기
By Lois J. Stucky 번역, 정리
◑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은, 지금은
천국의 엄위로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상하거나 아름다운 언어적 표현도,
천국에서 어린 양께 돌려지는 찬양과 경배의 표현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5:12.
라는 찬양의 언어는,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시어詩語보다 더 고상하고 아름답습니다.
영어로 한 번 들어보실까요?
"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 to receive power, and riches,
and wisdom, and strength, and honor, and glory, and blessing" Rev.5:12
천사들이 이렇게 찬양할 때, 천국의 그 외 나머지 천군과 우주만물이 화답하며 찬양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 계5:13.
▲오늘날 우리가,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또한 나를 위해 부활하신 것을 묵상하면서 어린양께 찬양 드리는 것은,
이 계시록에 나오는 천군 천사들의 영광스러운 찬양에, 오늘 내가 조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상을 떠나 천국에 가서는, 그 존귀하고 아름다운 찬양에,
우리가 영원토록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 영광스러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보게 될, 우리 자신의 구원도, 얼마나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될런지요!
우리가 너무 놀라서, 자기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말할 수 없는 자기 영광 중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문의 주제는, 그 천국의 영광과 또한 나의 구원 받음의 영광..
그것과 아울러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내 구원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오늘날, 내가 비록 괴롭지만,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죽는,
나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는 그 고통에, 내가 반드시 동참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제
오늘날, 내가 지고가야 하는 그 십자가를 요리 조리 피한 사람이,
본문 계시록 5장에 나오는, 그 천국의 영광에..
지금 현재도 참여할 수 없으며, 장래에 천국에서도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죽는 사람만이,
결국에 오늘 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장차 천국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계5장에 나오는, 천군천사의 찬양은,
장래에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드릴 영광스런 찬양도 되지만,
동시에 현재에 우리 영혼이, 천국에서, 드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찬양도 됩니다.
두 측면을 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 우상 중의 우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란 우상입니다.
그 <나 자신, 내 자아>라는 우상이 먼저 제거되고 포기되는 것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의 첫 걸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계획과 내 장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의 뜻을 선택합니다.
이런 ‘나 자신, 내 자아’, 즉 ‘내 계획, 내 장래 소원’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면서
끊임없이 갈아지고, 다듬어지고, 마모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는..’
그런 수준까지, 내가 성숙해져야 합니다.
내 꿈과 소원이 망가져도 아무렇지도 않고,
주님의 꿈과 소원이, 나를 통해 세워져 나아갈 때,
내가 덩달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높은 수준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끊임없이 내 뜻과, 내 장래 소원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주님께 떼를 쓰면서,
주님이 그 소원 안 들어주신다고 내가 삐지고 토라지면서,
어떻게 현재/미래에, 그 영광스러운 천군천사의 찬양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 현재에 천사들의 찬양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입니다.
오늘 현재, 내가 주님의 뜻과 소원에 합치된 삶을 살면서,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삶을 산다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내 삶에 넘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바로 그의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그 성도와 함께, 그 십자가를 함께 져 주십니다.
그와 함께 동행 해 주시고, 십자가를 지는 그에게, 임재를 나타내 주십니다.
아무 때나 동행해 주시고, 자기 뜻을 따라 사는 자에게 나타내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힘겨워 가고 있는 성도에게 이렇게 속삭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요15:11.
보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런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그런 삶, 즉 십자가를 지면서 괴로움 가운데 기뻐하는 삶을,
주님은 모범으로 보이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이 구절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도들이 반드시 외워야 할 구절입니다.
▲제가 1960년대에, 이 선교단체(Herald of His Coming)에 조인했을 때,
우리 단체의 사역자들 가운데 일부는, 워치만 니의 글들을 읽으면서,
많은 영적인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 사역자들은 영적으로 고지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그 시간에, 워치만 니 형제님(1903~1972)은,
중국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망’이 그에게 역사하고 있었을 때, ‘생명’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사도바울의 삶이, 또한 워치만 니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2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9:23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매일 간절히 의지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고통의 십자가를 지면서, 계속 주님을 섬기는 길에 순종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욱 친밀하게 알아갑니다. 친근히 교제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계시록 5장의 찬양의 대열에, 내가 동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질 때, 그 고난의 길을 묵묵히 계속 걸어갈 때,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지요.
영광스런 찬양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또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내가 비로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그 길이, 바로 사는 그 길입니다.
죽지 않으려 하면서, 내가 살 길을 찾는 것은.. 그런 십자가의 길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주님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되,
우리가 십자가를 피하도록 도우시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품고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왕 걸어가게 되는 이 십자가의 길이라면,
가급적 비틀거리면서 질질 끌려서 가지 말고,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감사하며, 찬양하며, 걸어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유일하게 나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얻는 승리.. 그것은 가짜 승리입니다.
십자가 고통 없이 얻어진 부흥 .. 그것은 가짜 부흥입니다.
십자가를 피해서 얻는 성공적인 삶, 승리하는 삶..
그것은 오히려 남을 고통스럽게 한 경쟁관계에서 승리한 삶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기뻐하는 수준의 신앙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Thanks For The Thorn / Matheson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 말고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갈6:14.
그 ‘자랑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내 영광이다’는 뜻도 됩니다.
NIV는 자랑하다 boast로 번역했고, KJV는 영광이다 glory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말로, 사도바울은 ‘십자가 말고는, 내 영광이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깨달은 성도들은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내 영광이 있네.
내 무겁고 거친 십자가를.. 영광의 면류관과 바꾸겠네.”
◑가끔 우리는 이사야서에,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경이에 놀라서 경배하면서, 동시에 놀라서 잠잠해 집니다.
“주님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사”
여기서 상함이란 완전히 몸이 부서지고 찢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주님이 그 고통 받으심을 스스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주님은 ‘자기 영혼을 스스로 버려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을 들여다봅시다.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그 형제사랑의 삶을 살아내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없으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가, 십자가에 죽는 삶을 살지 않고는,
우리가 제자의 삶을, 성도의 삶을.. 전혀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고차원적인 수준에 도달한 성자만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각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아예 크리스천의 삶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내 입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입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Not I, but Christ who liveth in me." 갈2:20
▲우리가 어떻게 모든 내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 십자가를 지는 길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 십자가를 지는 길뿐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은 정말 사실입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할 수 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없는 사람은,
차라리 십자가를 설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전혀 피상적인 설교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계5장 본문에서, 또한 이사야53장에서 ‘어린양’이란 표현에 유의하십시다.
십자가는.. 어린양 같은 사람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동물 중에 가장 온순하고 약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린양입니다.
물어뜯을 발톱도, 날카로운 이빨도, 뿔도, 힘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뭐 자랑하거나 내세울만한 것도.. 어린양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다른 약한 동물들이 가진, 민첩하고 빠른 발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힘을 내세우며, 자기를 뽐내는 사회입니다.
거기서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오직 스스로 ‘어린양’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모두들 자아가 강하고,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걸 ‘독립심’이라고 두둔하기도 합니다.
연속극을 보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자아 충만’입니다.
자기의 뜻과 의지를 스스로 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부인하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진다.’와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은, 둘은 같은 말입니다.
▲제가 하루는, 개강하는 시즌에, 신학생들 기숙사 앞을 차를 몰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자기 짐을 가져와서, 자기 기숙사로 옮기느라 바빴습니다.
저는 과거 우리의 학창시절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우리 때는, 그저 여행가방 한 두 개 분량의 자기 짐을 꾸려 와서,
기숙사 자기 방에 풀어놓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니까, 자기 집 차량으로는 부족해서, 이삿짐 운반용 트럭까지 빌려와서
소파, 안락의자에다 짐을 잔뜩 가져오고, 또 자기 차도 있습니다.
옛날 우리 시절에는, 그저 기숙사 방에 자기 책상 한 개, 딱딱한 나무 의자 한 개,
침상 한 개, 옷장 한 개..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많은 짐들을 보면서, 저는 ‘저 학생들이 신학교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잠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저들은, 성경을 공부하는데,
또한 사역자로 자기를 준비하려는 목적으로 신학교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저렇게 많은 짐이 필요 없을 터인데요?
혹시 신학교에까지 와서, 자기를 즐기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기 위해 온 것입니까?
이렇게 오늘날의 세상이 ‘자기중심적, 자아 위로적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번역 생략, 각자 출처의 원문을 읽어보세요.
'분류 없음 > 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랙가비 목사님 인터뷰 1/2 Blackaby (0) | 2013.02.14 |
---|---|
새로운 부류의 설교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Greg Gorden (0) | 2013.02.13 |
성경의 진리가, 진리로 깨달아지려면 Bickle (0) | 2013.02.07 |
복음의 첫 마디 / 데이빗 구직 (0) | 2013.02.06 |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 / W. C. 무어 (0) | 2013.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