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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다섯 처녀 Bickle / 中國語

LNCK 2013. 4. 12. 15:53

◈미련한 다섯 처녀                  마25:1~13                                   출처보기

 

by Mike Bickle                                                                               中國語

 

 

 

▲서론/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자기 램프에 기름이 떨어진 줄을 깨닫고,

집 밖으로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때마침 신랑 일행이 도착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름을 준비하며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 (들러리)는, 신랑과 함께, 결혼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 집 문은, 굳게 닫혀 버렸습니다. 마25:10.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는,

‘임박성’과 ‘지연성’을 둘 다 고려해야 합니다.

 

본문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임박성’ 하나만 갖고 기다렸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지연성’과 ‘임박성’을, 둘 다 갖고 기다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잔치 집 문이 굳게 닫힌 후에,

미련한 다섯 처녀가 돌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사정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냉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12

 

여기서 ‘내가 너희를 모른다’라는 표현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어로 I don't know you 인데,

‘내가 너희를 결코 모른다. I never knew you’라는 표현과는 다른 말입니다.

 

이 미련한 다섯 처녀는, 제 비클 목사의 생각에는,

한 때 거듭났던 신자들입니다.

 

주님이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진짜 ‘나는 너희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또는 고의적으로..

길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친하지 않으니까, 또는 긴가민가 하니까,

그냥 모르는 척 해 버립니다.

 

또는 과거에 서로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상처를 받은 일이 있으면,

그냥 모르는 척 해 버립니다. 내가 그를 보고서도,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12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씀은,

진짜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불신자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이 그들과, 서로 아는 척을 할 정도로, 친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기름을 준비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한때는 거듭나고, 주님을 열심히 섬기던 성도였으나 (그때는 등불에 기름이 있었지요)

신랑이 오기를 지체하니까,

기름을 더 준비 못 해서, 동이 나 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신앙이 싸늘하게 식은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진짜 그 다섯 처녀를 몰랐다면, 과거에 서로 일면식도 없었다면,

‘나는 너희를 결코 모르노라. I never knew you!’라고 하셨을 것인데,

 

‘나는 너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고 하신 것은 .. 아는 체 할 정도로 친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평소에 주님과 멀찍이 떨어져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은

 

신랑이 오실 때,

‘주님 저 아시죠? 저 OOO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하며 부탁해도,

 

주님은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하고, 싸늘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왜 평소에는 멀찍이 떨어져서 있다가, 또는 잠만 쿨쿨 자다가,

급할 때 주님께 손 내미는 것은.. 주님이 쉽게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렵지요?

 

▲‘깨어있으라’

비유의 결론으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있으라 watch’ 라는 말은,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과 비교해서 보면..

 

종말을 기다리며 깨어있으라는 뜻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 생활에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 이고,

기도 생활을 하지 않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종말을 기다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시가 닥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깨어서, 종말을 대비하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안 그러면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처녀’

여러분, 미련한 다섯 처녀도

‘처녀’ 라고,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신자’라는 말입니다. ‘불신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불신자’들은.. ‘처녀’가 아니라, ‘마을 사람’쯤으로 부르겠지요.

 

그의 과거의 삶이 어쨌는지에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거듭난 신자는

성경에서 ‘처녀, virgin’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호칭은, 성도에게 있어서 대단히 영광스런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말할 수 없이 고귀한 보혈을 흘리사

우리 죄를, 대신 값을 다 치르셨으므로

우리는 존귀한 ‘처녀’가 되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치르신 보혈의 값이, 너무나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램프’

그런데 이 열 처녀는, 각자 모두 ‘램프’를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램프, 즉 등잔불을,

<자기 사역>으로 이해합니다.

주님이, 이 열 처녀에게, 각각 자기 사명, 자기 사역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열 처녀는,

그냥 교회 일반 성도도 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지도자라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각각 자기 램프(자기 사역)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그렇게 봅니다.

 

본문의 열 처녀는,

‘처녀’라는 점은.. 그들이 과거에 한 때, 거듭난 신자였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램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들은 한 때,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등불을 비추는

지도자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포인트는,

그 열 명이 다 잔치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천국 잔치에 참여했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한 때, 성령으로 거듭나고, 교회의 지도자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 깨어있지 못하고, 쿨쿨 자고 있어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열 처녀가 모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다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결론에 이르면, 그 중에 다섯 처녀만 잔치에 참석합니다.

중간에 도태될 ‘거듭난 신자’들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한 때 거듭난 신자였고, 한 때 지도자적 위치를 감당했던 신자들 가운데서

잠자고 있는 영혼들이 꽤 있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세상의 불신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꼭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들을 대상으로 비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이 비유를 주십니다.

‘너희들이 조심하고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적용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도생활에 깨어있어서, 신랑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재림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오늘의 현실에만 함몰되어, 정신이 거기에만 팔려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주일날 오전에만 크리스천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신랑 되신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습니까?

 

‘내가 너희를 모르노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진짜 그들을 전혀 모른다, 한 번 일면식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잔치에 초대할 만큼,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다!’ 라는 뜻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친밀하게, 주님과 교제하는 사이가 되어야,

마지막 그 잔치에, 내가 초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의 현실적으로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년에는 신앙의 길에서 떠나, 세상으로 나갈 거야!’

이렇게 결심하거나, 소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년이 되어 보면,

신앙의 길에서 떠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습니다.

 

아무도 고의적으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기를 원치 않지만,

현실적으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언제든지, 매시대마다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IHOP 국제기도센터에서

제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다 열심을 갖고서, 마음에 성령에 불을 갖고서

사역에 임하고, 기도생활에도 임합니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중도포기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옵니다.

 

3년, 4년, 5년이 지나면.. 등불에 기름이 메말라서, 등불은 꺼져버리고,

과거에 주님과 그렇게 친밀했던 관계도.. 점점 식어지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소그룹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책도 썼던 사람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싸늘하게 식어지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주님이 이런 비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꼭 나오기 마련이니까.. 너희는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1절에 ‘그 때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은 마태복음 24장, 25장은 한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에 걸쳐서 하신 설교가 아니라, 한 번에 하신 설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마25:1절의 ‘그 때에’라는 뜻은,

‘종말의 때에’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마24장부터,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적 의미의 종말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기간이 모두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천년의 매 시대가.. 종말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매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항상 ‘종말을 준비하며,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모든 성도들을 ‘처녀, 신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우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지지만,

영적으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처녀요, 신부요, 여성’입니다.

 

그러다가 신랑을 만나면, 다시 남녀 성도 모두가 ‘아들’이 됩니다.

거기에 대해선 ☞성도는 예수님의 호적에 올라갑니다 -강추- 를 참조하십시오.

 

 

▲정리하면,

본문은 <현실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아무도 자기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기를 원하는 신자는.. 없습니다.

마음만큼은 모두가 빠짐없이,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주님이 경고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다 시작은 열심입니다. 화려합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졸며 자는 사람들도.. 반드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신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등불에 기름을 예비한다’는 뜻은,

평소에,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상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으며,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