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3

영적 전투의 세 영역 / 프랜지팬

LNCK 2013. 4. 23. 11:29

영적 전투의 세 영역 ⁄ 프랜시스 프랜지팬 - YouTube


◈영적 전투의 세 영역           유1:6, 눅11:35, 잠20:27          출처보기

 

프랜시스 프랜지팬
 
◑제1부, 영적 전투의 영역 : 마음                      ☞제2부 : 겸손
 
▲여러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의 이름이
"골고다" 곧 "해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골고다, 곧 해골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도, 골고다, 곧 해골이란 곳에서,
내 육신이 죽어야.. 나의 영적 전투의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되기 위해
싸움을 배워야 할 첫 접전지는 ‘마음’이란 영적 전투의 영역인데,
곧 "해골의 곳"입니다.        *해골: 여기서 ‘머리, 생각’이란 뜻.
 
왜냐하면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내 생각, 내 사고’의 영역은
사탄이 우리의 삶을 공격하기 위한, 상륙거점 또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해골’이란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의 영역, 생각의 영역이
온전히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사탄의 영토는 ‘어두움’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귀가 땅에 있는가? 또는 지옥에 있는가?
기독교인 안에도 거하는가? 또는 세상에만 있는가?
로 논쟁을 벌입니다.
 
사실인즉 마귀는 ‘흑암’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 흑암이 있는 곳마다, 마귀는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거기를 점령하고, 자기 영토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라는 용어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반갑다고 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을 소개합니다.

신자인 자신이, 악한 영들을 맞아 싸운다는 생각은
무언가 자기를 불안하게 하는 개념이며

특히 자신이 ‘잃어버린 양’이지
‘강한 용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불안한 개념입니다.

결국 우리 가운데는,
실제로 ‘영적 싸움’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영적 전투’나 ‘영적 싸움’은 같은 뜻으로, 호환해서 사용)
 
그러나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사실은
마귀가 이미 우리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사탄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영육간의 안녕을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영적 전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반드시 맞부딪히게 되는 현실입니다.
내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내가 그 전투를 피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니, 내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는,
그 전투에 무참하게 패배하여,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 에 가두셨으며"(유다서 6절)
 
사탄이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영원한 심판 아래 두셨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 ‘무저갱’ 또는 ‘흑암의 결박’이라고 부릅니다. ↑
 
마귀와 그와 함께한 타락한 천사들은
어두움 속에 거하도록 추방당했습니다.
 
이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지역들
다른 말로 가시광선이 없는 지역들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뜻하는바 ‘영원한 흑암’이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흑암입니다.
 
문자적인 캄캄한 흑암도 그 영역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흑암’이며, ‘도덕적인 흑암’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다는 것이 아니요
빛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탄을 그 속에 가두어 둔 이 흑암이
인간의 외부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도, 나의 범죄로 인하여, ‘흑암’이 형성될 수 있으며,
거기에는 사탄과 마귀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성도인 우리는
흑암의 영토 혹은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3 
 
우리가 빛의 자녀로 거듭났다면, 우리는 ‘어두움의 함정’에 빠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용납함으로써 어두움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사탄의 공격 앞에, 우리 자신을 무력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 있는 곳마다
‘영적 어두움’, 곧 흑암이 생성되며
그곳에 귀신이 활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경고하시기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눅11:35)
   
여러분 속에 한 빛이 있으니,
곧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잠20:27)
 
여러분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조명을 받아
"여호와의 등불"이 되어, 여러분의 속을 살핍니다.
그래서 참으로 성령충만한 기독교인에게는, 항상 거룩한 광채가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죄를 품고 있을 때
여러분 속에 있는 빛은 어두움 속에 있게 됩니다.
 
사탄은 어두움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가 거할, 합법적인 권리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귀는 어두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독교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어두움의 영역에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작기
사탄이 인간 본성의 육적인 면에 들어가는 예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보지 못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정확하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 그의 행동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은, 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간단히 결론 내립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성이 두려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왔던 무리들을 상대로
칼을 뽑았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두려움이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사탄에 의해 유도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1-32)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사탄은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타작) 하려고 시도하여, 일부 성공한 것입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심령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에 드나 들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사탄은 베드로를 넘어뜨릴 수 있었습니까?
 
유월절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 중의 하나가 자기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성경은 아래와 같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22:23)
 
그때 당시는, 아주 어둡고 우울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몸서리치는 순간에, 성경은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22:24)
 
그들은 충격과 실망의 자세에서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냐는 논쟁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그들은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물위를 걸은 자,
사도들 중에 가장 담대하고 가장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가
이 논쟁의 자리에서, 다른 사도들을 눌렀을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 중에 높이 돋보인 것이
그를 우월감에 쌓이도록 했고
사탄이 이를 부채질하여, 자만과 오만한 자세로 이끌어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교만으로 높아진 베드로는 넘어지게끔 된 것입니다.
   
교만은.. 성경 말씀에 따르면, 패망의 선봉입니다. (잠16:18)
교만은 사탄을 타락시킨 원인이며
또 교만은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도록 하는데 쓴 바로 똑같은 어두움입니다.
 
루시퍼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앙적인 교만과 질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잘 알았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죽일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의 교만이 ‘흑암’을 형성하게 했고,
그 흑암을 통해서, 베드로 사도를 공격해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라.
사탄이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데 사용한 덫은, 베드로 자신의 교만의 죄입니다.
 
영적 싸움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각자의 ‘어두움, 즉 흑암’ 속에 숨기고 있는 영역들이
우리가 앞으로 패배를 당할 영역들임을.. 인정하십시다.
 
종종 우리가 부딪치는 싸움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찾아내어 회개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에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면
우리는 계속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우리의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첫 행동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우리를 피해 달아날 것입니다. (약4:7)
 
▲베드로와 우리 자신에게 좋은 소식은
사탄이 성도들을 멸망케 하도록, 결코 허락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이 허락 받은 것은
성도들을 밀알처럼 까부르는 것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속에는 밀알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 같은 (밀 까부르는) 방식의 공격은
우리가 먼저 흑암을 형성해서, 그 문을 열어준 것이며,
공의의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지켜보고만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탄의 밀까부름을 통해
그 결과는 내 교만의 마음을 씻어버리고
우리의 삶을 보다 더 겸손하고 보다 더 정직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도, 일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호두껍질 같은 딱딱한 겉사람의 본성은
새로 피조된 사람의 부드러운 밀알 같은 우리 속사람의 본성이
단단히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돕기 위해.. 겉사람은 죽어야만 합니다.
겉껍질이 깨어져야 합니다.
 
겨나 껍질은, 한 때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우리를 참으로 쓰실 수 있게 되기 전에
우리는 껍질을 깨는 탈곡의 때를 지날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졌던 껍질의 본성은, 주제넘은 것과 교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잘한 일들 때문에, 그는 야심에 차고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이 깨지지 않은 자에게는, 누가 누구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맡기실 수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흑암’이 되고, 사탄이 틈타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베드로를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실제로 베드로를 까부를 수는 있어도, 즉 타작할 수는 있어도,
그를 멸망시키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는 자기 속에 있는 어두움의 영역들에 관해 무지했으며
이 같은 무지로 인해, 그는 영적 공격을 불러 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 네 속 어디에 있는지 네가 아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에 무지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실 때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마귀의 역사를 허무시려는destory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심령을 유지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한 곳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호하려는 본능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 캄캄한 골방으로부터 작은 변호사가 불쑥 나서며
내가 맡은 이 피고는 별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시시한 소리를 잠잠케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변호인은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여러분을 감싸려 할 것입니다.
또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며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코 직시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여러분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주 예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여러분을 참으로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이 같은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우리는 영적 전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야고보서 4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대적하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면
 
그런데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히 우리의 허물과 죄를 평소에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7절에서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 신자라는 그 자격 그 자체가
영적 싸움의 승리를 보여주는 기념탑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회개, 겸손 그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는데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막연하게 순복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싸우는 전투에서
정확하고 구체적인 영역을 주님께 순복하여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능력을 대적하게 되는 때
이는 분명코 예수님께 순복한 심령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책 전체에 거듭해서 나오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이 원칙을 알며, 이를 깨닫고, 또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원칙은 이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는 예수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완성은,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이 규정은 영적 싸움의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응답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참으로 사탄은 여러분의 연약한 곳을 공격하도록 허락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까지도 덧입기 시작할 때
적은 물러갈 것입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망치려고 짜놓은 상황들이
이제 여러분을 온전케 하도록 역사하고 있다면
여러분을 공격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결과는
오순절 후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한 앉은뱅이를 고치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겸손하게 된 새 베드로가 모여든 군중에게 말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교만과 마귀를 이긴 베드로의 승리는
그의 입술에서 나간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심령속에 이루어진 예수의 성품으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베드로 안에 있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었으며
베드로 안에 있던 교만의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