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6

신자가,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 데이빗 파슨

LNCK 2013. 6. 13. 12:02

신자가,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 David Pawson,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oN2Jew3AhbY&t=5s&list=PLbjFVE2uXgnZLTOkUWEMZ3U0eVM55n9WV&index=1



저 데이빗 파슨은 구원을, 수평선처럼, 어떤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획득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즉 수직선이 아닙니다.

 

구원은, 평생을 통해 이루어가는 여정입니다.

‘천로역정’처럼, 천국으로 가는 일평생의 여행길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행이 방해를 받아서, 도중에 중단 될 수 있을까요?

혹은 느리게, 느리게 지체 될 수 있을까요?

 

더 심하게, 그 여행에서, 중도 하차 할 수 있을까요?

제 대답은 명확합니다. 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참고로, 데이빗 파슨 박사는, 영국에서 아주 존경받는 저명한

신학자 중 한 분입니다.          *David Pawson의 다른 설교 보기 ☞ 의로운 복음사랑의 복음?

 

▲제가 성경을 통해서, 설명을 드리지요.

마태복음 25장을 보시겠습니다.

 

거기에 3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 번째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의 비유입니다.

그 신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늦게 도착했습니다.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문은 닫혔고, 잔칫집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 즉 주님의 재림을 준비 못한 처녀 즉 신자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처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전혀 기다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등불도 없고, 기름도 없었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등불도 있었고,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자들도, 혼인 잔치의 문은 닫히고,

바깥 어두운 곳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청지기들’의 비유입니다.

거기에 주인의 집의 제반 사무를 돌보는 ‘청지기’들이 나옵니다.

 

거기에 한 악한 청지기는,

여행을 떠난 주인이, 아주 늦게 되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집의 제반 사무를 성실히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지만, 이런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입니다.

거기도 마지막에는, 양과 염소로 갈라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5장에 나오는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신자들에 해당되는 비유입니다. 불신자가 아닙니다.

 

즉, 신자들 중에, 일부는, 그들의 구원을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은 잃어버릴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의 결국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저는 여기가 지옥이라고 봅니다. (다른 사람은, 연옥이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

결코 판단착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들만이

그 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내가 한때 신앙고백을 하고, 과거에 한 때 신자가 되었다는 사람들,

-내가 마음으로는 믿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쉬고 있는 사람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형식과 습관으로 다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마25장의 비유에 해당되는 ‘탈락자’들입니다.

마25장의 비유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한 비유가 아닌 것입니다.

신자들이, 한때 예수님의 제자이었던 사람들이, 탈락할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

 

마22장의, 주인의 혼인잔치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하객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그 잔치에 참석을 거부합니다.

결혼 준비에 바빠서, 소를 사서 논밭을 갈아야 하고...

 

화가 난 왕은, 이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아서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 사람들이, 아무나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잔치 장소에 사람이 그득하게 되었고, 잔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무나 잔치에 오도록, 초대를 받았지만,

그래도 올 적에는, 자기가 예복을 입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일할 때 입던, 작업복을 입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왕과 왕의 아들과, 그 혼인잔치에 대한.. 모욕이 되었습니다.

 

그때 왕은, 그 사람을 보고서, 아주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저기 가서, 옷을 예복으로 좀 갈아입고 오지요?’

(당시 잔치에는, 주인이, 예복을 여벌로 미리 준비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은, 예복을 갈아입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마22장에 대한, 파슨 박사의 해석을, 성경과 대조해서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비유의 맨 마지막에 나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으니라” 마22:14

 

그러니까 이 설교에서, 제가 서두에 제기했던 질문,

구원을 받았는데, 중도에 탈락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성경은 일관적으로, 그럴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저 ‘청함’을 받았다는 사실,

내가 한 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청함을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그 중에는 있을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을 경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파슨 박사님, 당신은 ‘한번 구원, 영원 구원’ 교리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 교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라고 누가 제게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예, 저는 그 교리를 믿습니다. 그 교리는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직 구원을 완성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교리는, 구원이 완성된 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인데,

나는 아직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오기를, 저는 기다리고

제 구원이 완성되는 날, 저는 기뻐하며,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을, 목소리 높여서 힘차게 외칠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거룩      엡1:1~7                 김성수 목사 에베소서 10강 출처

                                                                                          *관련글 보기 -클릭- 강추   

 

◑구원의 3 시제.

 

오늘은 ‘거룩’에 관해서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 보지요.

 

구원이란 혹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관계의 회복’이란 하나님의 속성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할 자들이

전적으로 타락을 해 버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상태에서

그 거룩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선물을 하셔서

거룩한 자로 만들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정확한 표현은 ‘나는 구원받았다, I've been saved’

그리고 ‘난 구원을 받고 있는 중이다, I am being saved’

그리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I will be saved’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완료 적 표현은 ‘칭의’에 관한 부분이고,

구원을 받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성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미래 시제는 영화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하면 성화와 영화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에서 건짐을 받은 것만을 구원이라 표현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은 훨씬 적극적이고 영광된 목적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목적은 다름 아닌 ‘거룩’입니다.

그 거룩이야 말로 영화 상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에 예정된 목적 - 성도의 거룩

 

엡1:4절에 보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을 무엇이라 설명되어 있습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적극적인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리고 흠이 없다는 것은 외적인 완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목적은 그렇게

겉과 속이 다 완전한 거룩함과 흠이 없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한 곳에서 사는 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러한 자로 우리는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고 흠이 없음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분과 한 곳에서 함께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구원은.. 거룩으로 완성되게 됩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딛 1: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거룩으로 완성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번복하시지 않는다는

차원에서의 이야기이지, 우리는 계속해서 완성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의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이 왜 이렇게 달라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맹렬하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완성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의 모습이 문득문득 인식되어질 때

우리는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렇게 변하게 만드신 그 분이

앞으로 약속된 모든 것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구나.’ 그게 소망입니다.

 

혹시 ‘내가 정말 변하기는 변할까’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염려 마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확한 자각이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떠세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것보다

그 전에 미리 항복하는 것이 좋을 듯싶지 않으세요?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몰고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룩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이 땅에서의 행복’으로 달려갑니다.

 

구원의 목적은 ‘거룩’이지 ‘이 땅에서의 세상 적 행복’이나

‘물질과 공간의 획득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늘 기쁩니다.

그러나 그 행복과 기쁨은, 예수님의 힘을 이용해서

나의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을 때 오는 세상적 행복과 기쁨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세상의 힘이 내게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룻이

거지처럼 이삭을 줍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관자이시며,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행복과 기쁨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무엇을 얻어 내고 성취했을 때

오는 행복과 기쁨을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그건 기독교의 본질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는 이단사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그 거룩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때론 채찍을 드십니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히 12:5-11)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고전 11:30-32)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지요? 하나님은 자기 자식들의 성숙과,

성숙을 위한 양육의 방법으로 징계를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자식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식의 눈물도 가슴을 치시며 목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 없듯이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후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죄인들은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다른 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이 너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 안 하는 자식을, 패서라도 가르치려는 게 부모의 마음이듯이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채찍과 막대기를 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고 나서, 겁이 나서 길을 돌이키게 되는 경우가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고 놔두어서 지옥 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질곡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 완성 될 때까지 계속해서 채찍과 막대기로 우리를 몰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성도의 삶에 환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사단의 공격도 함께 공존합니다.

따라서 주위에서 곤란한 지경에 빠진 분들을 보며

‘저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서 저렇게 벌을 받는다.’

라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성도의 삶은 겹으로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서 나오게 되는 정금 같은 거룩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러한 거룩의 모습으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 ‘거룩’이 빠지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재림을 앞두고, 성도가 준비해야 될 것은 - 거룩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초대형 예배당입니까? 내가 전도한 사람들의 명부입니까?

내가 봉사와 구제에 쏟은 시간들인가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는, 거룩한 삶을 향한 추구에 쏟았던 열심과

그 열매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실까요?

 

(살전 4:1-8)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 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맹렬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룩을 잃은 인간들의 특징을 구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지요?

바로‘살인’과 ‘성적인 타락’ 이 둘로 나타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이 둘로 타락을 특징 지워 설명하는지 아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타인을 밟으며

모든 사람을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밖에 모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세상 왕의 자리에 올려놓은 ‘아담’들은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이성(異性)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쾌락의 도구로 사용을 하기에

성적인 타락과 살인을.. 타락의 대표적 성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 회복이 되어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타인을 자기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여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상대를 세워 주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순히 죄를 안 짓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사랑’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고요.

 

(마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거룩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이해한 만큼 성도의 거룩은 성숙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무서운 경고를 한 번 보세요.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딛 1:16)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를 믿고 거룩한 행위가 조금도 나오지 않고 그의 삶이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는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 즉, 가짜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이지요?

 

이렇게 우리 구원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의 가능성을 심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해서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이 나오게끔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노력이 나오지 않을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 눈을 돌려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단은 그 거룩을 향한 추구에서 눈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수많은 쾌락과 호기심을 쏟아 붓습니다. 그 때 속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거룩한 생명의 씨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 생명의 씨는 자라야 합니다. 그 자라남의 삶을 추구하셔야 합니다.

 

돈을 좇느라 명예를 좇느라 세상의 자랑을 좇느라.. 그 자라남의 삶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거룩은 찬송을 은혜롭게 한다든지, 기도를 멋지게 매력적인 저음으로 깔아서 한다든지,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늘 스마일 페이스를 만드는 것을 거룩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자세나 원칙이 세워져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거룩, 성화가.. 자기 공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우리 맘에 흡족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 64:6)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더러운 옷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순결함 앞에서면

우리의 모든 것은 걸레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압도되고,

그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노력을 꺼내 놓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복음을 아는 데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순종과 열심.

그게 바로 우리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유일하게 경주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