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6

사자와 어린 양 / 김성수

LNCK 2013. 8. 29. 09:01

◈사자와 어린 양                  계5:1-8                              계시록30강 김성수 목사

 

▲여러분은 혹시 그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저 못된 세상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본때를 좀 보여 주세요. 하루 속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세요’

이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일곱은 무슨 수? 완전 수. 그럼 일곱 뿔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적인 힘, 전능,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책은 단순히 일 곱 인으로 봉함 된 저주가 들어 있는 책이 아니라

재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과 섭리가 들어 있는 책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단순히 인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그 안에 있는 저주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5절을 보면 알 수 있지요?

 

(5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인이 떼어지고 책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책을 열고 그리고 인을 뗀다.’라는 표현을 쓰지요?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이 완전하며

그 내용은 반드시 이행 될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임을

상징하는 것뿐입니다.

 

첫 번째 인을 떼면 기근이 오고

두 번째 인을 떼면 지진이 오고

세 번째 인을 떼면 전쟁이 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 책을 펼 사람이 없고

그로 말미암아 그 책을 볼 수 있는 자도 없는 것을 보고 웁니다.

그 책이 펴져야 그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 계시되고, 성취되고, 완성이 될 텐데

그 책을 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 모든 인간은 함께 타락을 해 버렸기 때문에

그 책을 펼 수 있는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운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그 책을 펴고 볼 자가 없어서 지연이 되거나

유보가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울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요한의 울음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염원인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계 6:9-10)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성도들의 기도는 마찬가지로 “언제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까?“

라는 안타까운 기다림이 담긴 염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저 못된 세상 사람들에게 하루 속히 본때를 좀 보여 주세요.

하루 속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세요’ 이런 기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박국이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모두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박국의 기도만 한번 보고 가지요.

 

(합 1:2-4)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기도’의 올바른 이해

 

▲그런데 그 요한의 울음이나 제단 앞에서의 성도들의 기도나 선지자들의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 우리 원수를 언제 갚아 줄 것입니까?’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원한을 이를 갈며 품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일러바치는 기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한 번 보세요.

 

(계 5:8)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8:3-5)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이 ‘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서 예물을 항상 동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향 제물은 보통 숯불을 담은 냄비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숯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향과 섞여진 형태가 기도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많이 썼습니다.

 

(시 141:2)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향기로운 예물인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

‘하루 속히 제 원한을 풀어주세요. 저 원수를 빨리 죽여주세요.’ 라고 하면, 왠지 안 어울리지요?

이런 원한 섞인 기도의 내용을 보면 복음서의 어떤 부분이 생각이 나세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생각나시죠?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도 원한에 사무친 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가

귀찮게 찾아오면 그 원한을 풀어 준다,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전능하시고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느냐?

 

그러니까 기도하고 나서 금방 그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안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 는 내용입니다.

‘강청 하고 매달리면 하나님도 귀찮아서 들어 주신다’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대조해서 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신자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낙망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울음이나

요한 계시록의 성도들의 기도나, 구약의 선지자들의 기도와

이 비유에서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아직 들어지지 않는 기도

(그래서 낙망하지 말아야 할 기도)는.. 같은 성격의 기도입니다.

 

▲그럼 그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풀어 주셔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됩니다.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대적들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머물면 우리도 왠지 철없는 악당이 되는 느낌입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원수 갚는 일에만 몰두하는 철없는 악당.

그럼 그 기도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옳을까요?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단순히 법을 안 지키는 자들에게 형을 선고하는 자가 아닙니다.

재판관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준행하며,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잘 살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재판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수호하다보면, 거기에 반하는 악당들에게 벌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원한’ 이런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성취’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

바로 재판관입니다.

 

▲여러분, 사사기를 영어로 뭐라고 합니까? ‘Judges’

사사들은 전부 전쟁을 해서 적을 쳐부순 사람들인데 사사들을 ‘장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판관’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금요 예배 때 사사기를 공부했지요? 그 때 그 사사기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사사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관영한 악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예표 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왼손잡이의 모습으로, 소모는 막대기를 가진 자의 모습으로,

약한 아녀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오신다는 것이 사사기의 교훈이었지요?

 

그러니까 사사들이 열심히 전쟁을 해서 적군을 물리친 사건들은

전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악과 무지와 불법을 진멸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판관이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단순히 악당을 죽여 원한을 갚아 주는 일이 아니라

악을 진멸하여 의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시록과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 ‘하나님, 언제 우리를 조롱하며 멸시하는

저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겠습니까?’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악이 진멸되고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한번 보자고요. 만일 오늘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면

여러분 거기 들어가실 자신 있으세요?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추하고 엉터리 같은 모습이 남아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 많이 고민하시잖아요? ‘왜 예수를 믿고도 나는 요 모양이냐?’

‘왜 내 안에는 여전히 이렇게 악이 가득 차 있냐?’ 이런 고민들 하시지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단순히 ‘저 악한 놈들을 빨리 심판해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이 악한 것들 언제나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들이 되겠습니까?

하나님 하루 속히 그날이 오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주된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기도는 원수를 심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인 거예요.

 

우리가 지금 우리의 꼴을 보면, 절대 우리는 변할 것 같지 않지만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불의한 재판관도 자기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과부의 염원을 풀어 주는데

의로운 재판관인 내가 왜 너희들의 그 향기 나는 기도를 응답하지 않겠느냐?

그 날은 반드시 속히 곧 온다.’ 그게 성도들의 향기 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단순히 ‘원수만 갚아 주세요.’라는 기도라면 거기서는 ‘악취’가 나겠지요.

거기서 무슨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거룩과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를 염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가 나는 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그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 유보되거나 지연 될 것을 염려하여 운 것입니다.

 

(벧후 3:13)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되어 있습니까? 아직 부족합니까? 완성이 되어 있지요?

‘the home of righteous’ 반드시 그 날은 우리에게 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아직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의 회복인 그 ‘의’를 추구하며 염원하며

그 완성의 날을 열망하며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하늘나라,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들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일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요한 계시록 강해에

이 구절을 설명하시면서 우리는 (벧엘-하나님의 집)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김(이스라엘이 통곡 한 곳)을 지나야 한다고

사사기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맞습니다. 그것으로 눈물을 흘리십시오.

 

 

◑사자와 어린 양

 

▲그런데 장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을 읽어보지요.

 

(계 5:5-6)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요한이 장로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장로가 말하기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일곱 인을 떼실 것이다’

그럽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 7:14)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장로가 지금 하늘에 계신 이제 하나님이 영광을 회복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 지파의 사자’로 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육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성을 지금도 갖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을 하지요?

그 분은 다윗의 후손이신데, 다윗의 뿌리라는 것은

다윗이 그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났다는 말입니다.

 

다윗보다 훨씬 먼저 있던 분, 그 분의 선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 11: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분이지만

동시에 그 뿌리가 되시는 선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자신의 선재를 말씀하십니다.

 

(요 8: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만이 그 책을 열고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창세기 45장의 야곱의 유언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5:8-12)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 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임금의 지휘봉)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율법의 능력을 나타냈던 동물입니다.

 

그리고 헬라 사람들에게도 사자는 세상을 통치하고 악을 파괴하며

다음 세상에서 죽은 자를 안전으로 인도하는 헷 신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은

원수를 정복하고 승리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강함’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요한이 장로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이 그 분을 봅니다. 그런데 들은 것과 직접 본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계 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들은 것은 분명 ‘사자’의 모습이었는데, 직접 보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거기서 ‘죽임을 당하다’라고 번역이 된 ‘습하조’라는 말은 ‘도살당한’이라는 말입니다.

승리를 한 사자가, 모양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재창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면 나의 힘을 키워서, 상대방을 완전히 묵사발을 만드는 그런 것을 연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내가 당하고 내가 죽어서 이루는 승리입니다.

 

그게 지난 주 수요일 성경공부에서 우리가 함께 공부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삶의 원리입니다.

 

(사 53:7)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우리 주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요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힘을 키워서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라,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도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삶은 손해보고 당하고 하면서도, 그 중심을 잃지 않고

주님 주신 평안을 잃지 않는 그러한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삶입니다.

 

이미 창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예언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유다에 관한 야곱의 유언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사자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에 빤다고 나옵니다.

 

(11-12절)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나귀에 대한 내용은 스가랴서 9장에 나오지요?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메시야는 겸손하여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이 왕으로 등극을 할 때는 항상 나귀를 타고 등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은 섬기는 왕이라는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솔로몬도 나귀를 타고 왕위에 등극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가 겸손한, 섬기는 왕으로서는 모두 실패를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귀를 탄 왕의 삶을 살다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자가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빤다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 구절은 전에 우리가 이사야서 63장을 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메시아이신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그 피가 전부 그 메시야의 옷에 튀어 버렸습니다.

그 말은 그 진노의 심판을 자기가 다 뒤집어 써 버렸다는 것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삶, 십자가의 도)

로 살아가는 삶, 사자이지만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연약한 어린양의 일곱뿔 승리

 

▲그 어린양이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일곱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뿔은 항상 힘과 승리를 상징했습니다.

 

(신 33:17) “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

 

(시 18:2)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그런데 뿔이 일곱입니다. 일곱은 무슨 수? 완전 수. 그럼 일곱 뿔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적인 힘, 전능, 완전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분이 이 세상에서 그 힘을 발휘하셨는데

그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게 힘입니다. 그리고 그게 완전한 승리입니다.

 

여러분, 부디 그 힘을 키우세요. 능히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도로 세상을 살 수 있는 그 힘을 키우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도살당한 어린양 취급을 하며 조롱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들의 조롱하는 입이 지옥의 숯덩이로 이글거리며 불 탈 날이 곧 옵니다.

곧 옵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히 10:32-34)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1:35-38)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독교는 고지를 점령해서

보란 듯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로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할 전, 길도 그 도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러분, 팥죽 한 그릇 같은 다른 것에 목숨 걸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나의 거룩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낙심이 되고 좌절할 때마다 그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책을 열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우리의 그 향기 나고 거룩한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도살당한 여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자의 삶, 한번 잘 살아내 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