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해야, 우리가 삽니다 눅20:34, 골3:13-15 2006-08-06 출처
*원제목 : 용서 그리고 사랑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용서를 안 하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성지에 가는 분들은 두 분을 만나러 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헤롯이라고 하는 왕입니다.
그 분이 지나간 지가 이 천년이 되었지만,
그 분이 지었던 건축들은 아직도 세계적입니다. 너무너무 장엄하고 어마어마합니다.
그는 한 마디로 ‘건축 광’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건축 업적은 예루살렘에도 있습니다. 사해바다에도 있습니다.
전 이스라엘에 헤롯의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헤롯을 보러 성지로 가는 사람은 사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흔적 하나, 옷 한 벌 남기지 않으셨던 한 왕이 있습니다.
아무 건물 하나 안 남긴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용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웅장한 건물을 남기는 것은, 남기면 좋고, 안 남겨도 큰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작은 예수’들이 꼭 남기고 죽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용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 ‘사랑의 주님, 용서의 주님’을 만나려고
해마다 수백만 수천만의 성도들이, 주님을 찾아서 성지순례를 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발자취 하나하나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삶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유산을 남겨주더라도.. 오히려 형제간에 싸움만 격화됩니다.
그러나 ‘사랑, 용서의 삶’을 남기고 떠나면
그 자녀들이 자자손손, 조상을 기리고, 추모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묘지를, 마치 성지순례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 온화한 성품이
조카, 손자에게까지 다 미쳐야 합니다.
장례식 때 다 찾아와서, 고모, 이모부의 삶을 애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신자를 포함해서, 그렇게 존경 받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용서의 삶’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싸우고 싶을 때 다 싸우고, 화내고 싶을 때 다 화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한 번뿐인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용서의 삶이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삶이였습니다.
끝까지 사랑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 그리고 사랑의 삶’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영원히 하나님 앞에 가서도, 길이길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없는 삶입니다.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아무리 많이 배워도, 아무리 부유해도,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제일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 온갖 고생을 참는 일인가, 고난을 견디는 일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이 세계를 정복해도
이것을 정복 못 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그의 생애는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녀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어도,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삶은
본인의 삶도 실패의 삶이며, 물려준 재산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일 어려운 일은 원수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내 자녀의 생명을 빼앗아 가며,
우리 재산에 어떤 막대한 지장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들,
그리고 나를 비방하고 해치며 욕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용서,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에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를 향하여서, 자기가 죽이는 사람들 정말 원수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그것만 보면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가복음 23장 전체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두 다 침을 뱉습니다.
여러분! 침 뱉음 한번 맞아 보십시오. 당해 보십시오.
그것도, 자기보다 더 못한 죄인이, 자기에게 침을 뱉는다... 그거 참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감당하기 불가능 수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막 침을 뱉습니다. 전부 욕 하더라 그랬습니다.
욕을 하고 저주를 하며 때립니다. 채찍으로 막 때립니다. 끌고 갑니다.
잔인하게 끌고 가서 십자가에 가져다 놓으며, 양손에 못을 박고 다리에 못을 박을 때,
그 아픔 속에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용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 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2천년이 되어도,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모두 다 무너져도,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지 아니하고 힘 있게 온 인류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은,
우리 주님은 바로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그 터 위에
이 나라를 건설하였기 때문입니다. (건축도 필요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주님만이 성공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일에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면서
모두 용서해 주시는 사랑, 한없는 사랑, 크신 사랑, 어떤 원수도 용서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가, 오늘까지 든든히 서 있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날 나도 용서 받은 줄 믿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들여야,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거하게 되어
내가 남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사랑은,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만은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며, 상처를 주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사랑이 풍년이 들었지만,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은
세상의 사랑은, 나도 행복할 수 없고, 너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여야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주의 사랑입니다.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인간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 크시오니
주의 사랑이 내게 임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내게 큰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출세, 성공, 헤롯 같이 성공 했을지라도
용서하는 일에 정상에 서지 못한 사람들 그는 실패자입니다.
그냥 미워하고 증오하며, 사기하고 질투하며, 이 세상을 살았다면
그의 삶은 실패의 삶입니다.
내가 화내고, 분노하는 것이 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실패자로,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가치와 능력이,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격 안에 있습니다.
오늘 물질이, 번영하니까.. 우리 각자가 행복합니까?
이 나라가 고속도로가 뚫려지고, 집집마다 자가용 2대, 3대 가진다고 행복해 집니까?
사랑과 용서가 없는 곳에는.. 그런 가정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이 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아이들까지 모두 자살하고 있는데도, 모두 고소하고, 형제간에 서로 맞고소하며,
소송하고..
모두 다 돈이 없어 그렇습니까?
서로를 검찰에다가 소송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를 이렇게 많이 잔인하게 죽이고, 자식도 잔인하게 죽이며,
부부간에도 잔인하게 서로 찔러 죽이는.. 이 사회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식이 부족합니까? 교양이 부족합니까?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미개인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이, 용서가 없는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 문제가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데,
영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행복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핵심, 생명은 안에 있습니다. 심령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내면의 종교입니다.
세상은 문제를 밖에서 모두 찾는데, 교회는 문제를 어디서 찾습니까?
여러분! 교회 오셔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 나오셨습니까?
안에 것을, 영적인 것을, 내 심령을 찾아서 주님 앞으로 나온 줄로 믿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에서 29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를 많이 할수록 복을 받습니다. 용서를 많이 할수록
상대가 큰 원수 된 사람일수록, 큰 죄악일수록,
용서하는 자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자기하고 그 신하고만 맞으면 됩니다.
그래서 치성을 다해서 어쨌든 빌고, 신에게 제물 받치면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잘 할지라도
형제와 원수 맺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죄가 하늘에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는 잘하고, 이거 용서를 못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잘 할 뿐만 아니라
내 이웃,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에게도 잘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배를 드리다가도 기도하다가도
내가 누구하고 불화하고 용서하지 못한 거 생각나면,
빨리 예배드리지 말고 중간에 돌아가서 화해하고 난 뒤에
교회당에 와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내 기도가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 보러 오기 전에는 절대로 부부간에 싸움하면 안 됩니다.
둘이 같이 나와서 앉아야 됩니다. 속상해도 예배드리기 전까지는 참아야 됩니다.
예배드리고 가서 대판 벌리는 건 괜찮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되지만은, 하여튼 예배 보기 전에 다투고 오면 안 됩니다.
▲사랑해야 사랑이 오고, 용서해야 용서가 옵니다. 덮어주고 용서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할렐루야!
우리는 자꾸 가족 간에도 덮어야 됩니다. 집안에도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과거에 뭐 했느냐며 들추어내고, 처갓집까지 어떤 분은 들추어냅니다. 자꾸 들춥니다.
그럼 내가 처가댁 들추면, 집 사람은 우리 집안 일을 안 들춥니까?
자꾸 서로 집안을 들추어 보십시오. 뭐가 되겠습니까?
자꾸 들추고 이러면, 집안에 안 나오는 게 없습니다. 모두 다 들추면 나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안 되는 집안은 들추어내는 집안입니다.
우리의 억만 죄악도 하나님이 덮어 주셨는데, 내가 조그마한 거 왜 들추어냅니까?
영영 죽을 죄도 하나님이 모두 다 덮어 주셨는데, 내가 왜 들추어냅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눈에 있는 티끌도 들추어낸다.” 그랬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들보도 용서해 주셨는데
요만한 티끌도 우리가 용서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온 나라가 그냥 이렇게 좋으면서 잘 살면서
우리는 가진 힘, 축복을 가지고.. 전부 들추는데 사용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부 다 가정에도 들추어내면 한도 없는데,
이 나라를 모두 다 들추어내려고 그러니까
온 사회가 걷잡을 수 없이 전부 다 상처받고 패가 갈라지며
전부 고통을 주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증오하고 있습니다.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지금 비정상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은혜 받아 교회 나와서는
요사이는 목사님 소송을 얼마나 모두 많이 하는지요..
목사님이 교인들 소송하고 교인끼리, 장로님끼리 막 소송하고
큰 교회가 평안한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피차 물고 먹다가.. 결국 마귀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대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날 낼름 잡숴요!’ 하고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나아가 소송까지 하는 가운데,
찬송을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랑하는 자는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3장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 1서 3장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사랑하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졌습니다.
용서, 사랑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더 큰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 그 아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사랑의 은사를 주셔서
사랑의 끈을 묶어주시는 일을 성령이 하십니다.
주님의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성령이 날마다, 날마다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임재 하시고
사랑을 통하여 인류 모두를 구원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움과 증오와 원수의 배후에는 사탄이 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사탄이 우리 마음에 미움을 심어주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심어주며,
원수 맺도록 좋은 관계도 사탄이 와서
아담 이브가 원수 되듯이 우리 마음에 늘 역사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물리치지 말고, 미움과 증오를 물리치면
사탄은 저절로 물러가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살게 하기 위해서
항상 용서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며 긍휼을 베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쟁하면 이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다 같이 망합니다.
누가복음 11장 17절에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서지 못 하느니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무너지느니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가 어찌 어떻게 서겠느냐고
한절에 세 가지를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쟁하면 끝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나 하나만 이러면 된다.’ 이런 마음으로 하면
집, 나라, 교회에도 평안이 옵니다. 할렐루야!
이 세상에 무엇이 아름답습니까? 무슨 대단한 일했다. 아닙니다. 별거 아닙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이 세상을 살다 가신 분이 제일 훌륭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 별 거 아닌 것이, 사실은 제일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가능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녕 예수님이 가신,
아름다운 삶, 영광스러운 삶을
지금 21세기에, 우리가 재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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