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나엘 요1:45~51 출처보기
김성수 목사, 요한복음 9강, 축약
※상당히 난해한 본문인데, 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요1장 나다나엘의 이야기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다나엘은 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사람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바돌로매 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요한복음 이외의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바돌로매는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바돌로매는 헬라어로 ‘bar-tolmai'입니다. 그 말은 ’bar'가 아들이라는 뜻이므로
‘tolmai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가끔 베드로를 ‘bar-jona'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지요?
그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뜻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톨마이의 아들 나다나엘이 바로 바돌로매라고 표기가 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게다가 공관 복음서에 보면 항상 바돌로매가 빌립과 함께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이 바로 바돌로매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본문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나다나엘도 역시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그 구절이 담고 있는 주요 메시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가서 ‘우리가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메시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하고 반문합니다.
그 말은 나다나엘이 율법에 능통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는 미가서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미가서 5장 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에게서 이스라엘의 왕이 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선지자 미가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날 것임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 예언을 나다나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절을 통해서 나다나엘이
메시아가 나실 곳은 그런 허름하고 초라한 시골 동네일 리가 없다는
민속 메시아사상도 또한 갖고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그랬더니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
여기서 ‘간사한 것’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돌로스’는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속이는 자’ ‘간사한 자’하면 생각하는 사람. 바로 ‘야곱’입니다.
게다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주님은 ‘간사한 자’와 ‘이스라엘’을 동시에 등장시켜,
다른 말로 야곱과 이스라엘을 등장시켜
그 둘을 비교하며 무언가를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주님은 지금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육적 이스라엘의 대표인 야곱’과
‘이름이 바뀐 이후의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그리곤 주님께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48
이건 좀 엉뚱한 대답입니다. 보통 칭찬을 받으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나다나엘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자신을 칭찬하는 말씀이 아니라
뭔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라는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 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
팔레스타인에서 번식했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당시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을 하는 장소로 즐겨 사용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자주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내가 너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시니까
깜짝 놀란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다’라고 번역이 된 ‘에이도’는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다나엘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한 것은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민속 메시아 사상> (점프 가능)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무엘 하 7장으로 가서
다윗의 언약의 몇 구절을 보고 설명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삼하 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바로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 사상’이 시작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하신 언약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한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해서 다윗 왕조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해서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로
그를 세워서, 하나님의 아들을 삼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다윗 왕조가 성립이 되었고
솔로몬이 다윗의 씨로 하나님의 아들이 돼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 대신 통치했고 성전도 지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조가 지속될 때는,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다윗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등극을 할 때
시편2편이나 89편, 132편 같은 메시아의 노래를 합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했던 언약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곡해한 것입니다.
이 나단의 신탁이 육적 이스라엘과 육적 다윗의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면
다윗의 후손과 다윗의 왕국이 영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졌고 (BC931)
북 이스라엘이 BC722년에 멸망하고 남 유대마저 BC586년에 멸망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당황했지요.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사무엘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을 메시아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나단의 신탁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어느 날, 종말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다윗의 씨를 일으키시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시고
그 다윗의 씨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재현하실 것’이라는 메시아사상으로 둔갑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민속 메시아사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바로 그 민속 메시아사상을 신앙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도 그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고민하고 묵상하던 것을 아신다고 하자
‘이 분이 바로 나단의 신탁에서 예언된 그 메시아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다나엘의 고백은 충분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다윗적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1절에서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 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금 나다나엘에게
‘네가 지금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너는 나를 민속 메시아로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아는 단순히 너희들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주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
하늘을 열고 땅과 하늘 사이에 중보자로 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칭찬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분명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이가 참 이스라엘이다. 그 마음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것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다나엘이 비록 민속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선민사상이나 율법주의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고민 끝에 깨달을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단순히 나다나엘 한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다나엘을 들어,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 이스라엘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얍복강 가의 씨름 이전의 야곱’과 ‘씨름 이후의 이스라엘’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복은 은혜로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것을 얻기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이 틀렸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꾀로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그 결과 축복을 받아내기는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속이는 짓, 간사한 짓, 궤계’ ‘돌로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기꾼 야곱과 대조되어 등장하는, 참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자신의 꾀나 힘으로 얻어낼 수 없는
완전한 은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그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선민 이스라엘 사람이고 제사도 드리고 율법도 지키는데
그것이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행위나 종교적 행위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묵상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은 결국 ‘은혜’라는 결론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보자마자 ‘그는 마음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
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고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추론이 가능한가? 함께 추적해 보지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온갖 꾀를 다 써서, 결국 부자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 돌아왔는지 아세요? 야곱은 자신의 지혜로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얻어내긴 했지만, 정작 언약의 땅에서는 쫓겨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서만 유효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언약의 땅으로 돌아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축복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식솔들과 하인들 그리고 가축들을 이끌고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400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죽게 될까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얍복 강가에 이르자
자기에게 덜 소중한 순서대로 강을 건너게 합니다.
육축과 하인들, 하인 출신의 아내들과 자녀들 그리고 레아와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봅니다.
여차하면 혼자라도 도망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야곱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포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닙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위골이 되게 만드시지요?
환도뼈를 치실 수 있는 분이 씨름에서 못 이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니라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씨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타락한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스스로 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외부의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요, 방법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과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축적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살게 됩니다.
얍복 강가의 야곱은, 바로 그 죄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까지도 이기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협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행해지는 그런 금식기도,
그런 철야기도, 그런 새벽기도 많이 보셨지요?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그러한 야곱들에게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게 바로 환도뼈를 치시는 하나님입니다.
▲고집스러운 야곱 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축복을 얻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야곱들에게 너희들 힘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다른 말로 언약의 땅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환도뼈가 위골 시켜, 다리를 절게 만드시더라도 가르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이 되자, 그제야 약하디 약한 자신의 실존을 실감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자신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이 매달림은 은혜를 향한 매달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축복의 땅에 입성할 수 있음을 안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인 것입니다.
바로 그 이름이 나다나엘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도뼈를 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품어 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의 ‘전인(全人)’이 살해되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탄생이 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 일을 이루려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폭격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씨름하며 깨달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의 언약을 하실 때
야곱이 뭐 대단한 일을 했을 때입니까?
야곱은 자신의 꾀로 축복의 땅에서 쫓겨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은 ‘야곱아 네 힘으로는 넌 그렇게 축복의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자이다. 이제 알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를 반드시 내 힘으로 가나안으로 데려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야곱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주지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매한 야곱 들은 그 것을 깨닫는
데 아주 오랜 세월을 허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야곱이 끝까지 삽니까?
아니지요? 야곱은 아시다시피 애굽에서 죽습니다.
어떻게 야곱이 그 축복의 땅 가나안을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얍복 강가의 씨름 이후에 ‘은혜’를 깨닫게 되자
베델의 사건 또한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실 약속의 땅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열린 하늘을 통해서 본,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던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단지 상징으로 주어졌던 가나안 땅을 쉽게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통해 주어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되자
야곱은 세계관이 확 바뀌게 됩니다. 이 땅의 권세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재물로 하늘의 복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의 거지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바로에게 축복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 이스라엘은 어떠한 자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 에서의 야곱의 환상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 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잘 그려보세요.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머리위로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었는데
요한복음 1장의 주님의 말씀 속에서는 ‘인자’ ‘예수 그리스도’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유대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의 언약 신학을 배경으로 해서
유대인들만의 복음이 아닌 참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렇게 우리의 꾀나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측에서 보면 거저지만
하나님 측에서는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환도뼈를 맞아 얍복 강가의 야곱이 되셔서 죽으시고
이스라엘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다리가 되셔서
우리가 이제 하늘로 연결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인 ‘바라크’를 풍성하게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신 분들이지요?
맞습니까? 여러분도 얍복 강가의 씨름을 해 보신 분들 맞지요?
우리는 단지 죄인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지옥 불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아시지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랑과 술수와 잔꾀와 힘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좇아 주님께만 순종하며,
주님께만 이끌리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지요?
오늘 본문은 그렇게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늘로 갈 수 있게 된
그 주님의 십자가를 ‘더 큰 일’이라고 합니다.
‘네가 이제 더 큰 일을 보리라’
여러분은 바로 그 ‘더 큰 일’을 보신 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부러워서 울고 갈 존귀한 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도 겨우 하룻밤 잠깐 환상으로 본 그 베델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것을 초개처럼 여기고 어떤 권세 앞에서도 당당했으며
오직 하늘만 소망하다가 갔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그 ‘믿음‘을 통해 수시로 열린 하늘을 보시는 분들입니다.
야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를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사셔야 하겠습니까?
하루 밤 꿈으로도 평생을 하늘만 보고 살았던 우리 조상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열린 하늘을 통해
하늘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 맞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부터라고 좀 당당해 집시다. 오늘부터라도 좀 의연해 집시다.
오늘부터라도 좀 세상 것들로부터 초연해 집시다.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참아줍시다. 비록 그러한 삶이 힘이 들지라도
우리는 겨우 발뒤꿈치를 물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사단의 머리를 짓밟아 뭉개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영웅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로 여러분에게 선악과를 내미는
사단의 머리를 짓밟아 버리십시오. 절대 그 미혹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신분에 맞는 삶을 열심히 경주하며 사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 온갖 권모술수와 잔꾀를 부리는 야곱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땅인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시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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